소설리스트

기억상실에 걸린 마녀를 주워버렸다-168화 (168/201)

(EP.168)15. 설월화(雪月花) - 15

“...아리엘?”

없었다.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어 이 방 안을 훑어보았지만, 아리엘의 모습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이 방 안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카인? 갑자기 왜 그러는 것이지? 혹시 뭐 깜빡한 것이라도 있는 것인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방 안을 이리저리 살피는 나의 모습이 이상하게만 느껴지는 것인지 아이리스가 그런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의문을 제기하였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목소리는 나의 귓가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아리엘.”

그 순간, 떠오르고 말았다. 어젯밤, 아이리스가 연신 헛구역질을 하는 모습을 보이자,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고 만 아리엘의 얼굴이. 아이리스의 아랫배를 진찰하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처연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아리엘의 모습이. 아이리스가 태기(胎氣)를 지녔다는 소식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면서, 그녀를 향해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이던 아리엘의 표정이, 전부 떠오르고 말았다.

“...아리엘.”

나는 그제야 깨닫고 말았다. 이번 생, 아이리스가 내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는 기쁨에 도취된 나머지, 내가 어떤 병신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인지.

지난 생, 나와 관련이 있는 모든 여자를 책임지겠노라고, 지금까지의 생을 모조리 합한 것보다 더욱 그녀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아이리스의 앞에서 다짐을 한지 얼마나 지나지도 않았거늘, 벌써부터 이 따위 실수를 저지른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게만 여겨진다-

“...카인!”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무시한 채로, 나는 스스로의 몸을 일으켜 방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한심하다. 비겁하다. 치졸하다. 스스로가 너무도 머저리 같이 여겨져 나 자신을 흠씬 두들겨 패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고 말았다. 알고 있지 않았나. 비록 나 자신이 경험했던 것은 아닐지라도, ‘끈’을 통해 아리엘이 경험한 과거를 엿보았고 그녀가 나와 어떠한 삶을 보냈는지 잘 알고 있지 않았나.

그런 그녀 앞에서 아이를 가진 다른 여자를 사랑스런 눈길로 바라보고, 오직 다른 여자만을 신경써주고, 그 여자와 장차 만들어 나갈 미래를 아무 생각 없이 떠들어 댄 나는 정말 생각이라는 것이 있는 놈이란 말인가.

아리엘이 어떠한 심정으로 나와 아이리스를 바라보았을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주제에, 세상 어느 누구보다 그녀를 잘 이해해주고 그녀의 편이 되어주어야만 하는 내가 오히려 그녀를 벼랑 끝까지 몰아세우는 주범이 되고 말았다니. 스스로가 너무도 한심하고 한심해, 구역질이 목구멍 끝까지 치밀어 오른다.

“하아, 빌어, 먹을-”

뛰었다. 또 뛰었다.

평소에는 그토록 비좁게 느껴지던 에스텔 공작가의 본성은, 오늘따라 너무도 넓게만 느껴졌다. 아리엘의 방, 평소에 아리엘이 드나들던 장소, 그녀가 있을 법한 장소를 전부 둘러보았지만, 본성 안에서는 도저히 그녀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

자신도 모르게 창밖으로 내다보고 말았다. 바깥에는, 구슬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이미 겨울을 지났음에도,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무척이나 차가웠으며 내뱉는 숨결은 무척이나 하얀 나머지, 그대로 열기가 얼어붙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아리엘.”

우산 따위 챙길 시간도, 정신도 없었다. 나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현재 나의 머릿속에는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발견하고,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하, 아. 하아-”

무턱대고 이리저리 달려 나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생각도 없이 빗속을 달리고 있는 것은 또 아니었다. 발걸음은 그녀의 행적을 찾아 정처 없이 달려 나가고 있었지만, 나의 머리는 현재 그녀가 있을 법한 장소를 맹렬하게 추측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에스텔 공작가를 아예 떠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아마, 혼자 있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해, 잠시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픈 시간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하였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라 믿고 싶어 하는 자기 자신이 이곳에 있었다.

“아리엘.”

머릿속에, 그녀와 함께 했던 지난 시간이 선명히 떠오르고 말았다.

너와 함께 걸었던 산책길, 너와 함께 구경을 했던 바다, 자그맣고 보잘 것 없지만 안락했던 우리의 보금자리.

내가 기억하고 있는 추억 속 어디에서나 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고 너의 자취를 떠올릴 수 있었지만.

정작 지금, 나는 너의 모습을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설사 그녀를 찾아낸다고 할지라도,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말을 걸어야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모습을 찾아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린 끝에.

결국 너의 모습을, 발견해낼 수 있었다.

“.....”

발이 멈췄다.

공작가 뒤편의 후원, 그곳에서도 다른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인기척이 드문 장소에.

그녀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왜 이런 장소에서 아무 말도 없이 홀로 서 있는 것인지 깨달아버리고 말았다.

지금 그녀가 서 있는 곳은 그 날 우리가 처음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던 바로 그 때 그 장소.

몰리고 또 몰린 끝에,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 아리엘에게 있어 이 장소야말로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던 것일까.

...아니, 그녀를 이 지경으로 몰아세운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너를 책임지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주제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 눈치 채지 못했던 나 자신이 가장 큰 문제였던 것이다.

“...아리엘.”

그녀를 향해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간다. 그리고 그제야 나의 모습을 인식하게 된 아리엘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가까이 오지 마세요. 제게, 더 이상 다가와주지 마세요. 제발...”

그리고 그런 나로부터, 아리엘은 필사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선다. 마치, 이 이상의 거리를 좁히는 것을 결코 허용해줄 수 없다는 듯이.

“.....”

순간, 자신도 모르게 발을 멈추고 말았다. 그녀의 말 때문에 발을 멈춘 것이 아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맺혀 있는 무언가를 보았기에, 끝내 발을 멈추고 만 것이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는 비를 맞으며, 울고 있었다.

아니, 울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녀를 울렸다.

오직 나 하나 때문에, 그녀는 지금 저리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그녀의 우는 얼굴은, 나의 마음을 참으로 아프게 하기 충분하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향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해야.

“...그만 돌아가자. 감기라도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고작해야,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며 다시 한 발짝 앞으로 걸어가는 것뿐이었다.

“...카인.”

그제야 아리엘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빗물과 눈물이 섞인 물방울이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다.

“죄송해요. 그리고 괜찮아요. 무리해서 저를 신경 써 주실 필요도 없고, 괜히 저 때문에 그렇게 마음 아파하실 필요도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당신에게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으니까요.”

“...뭐.”

“키리에로부터 전부 전해 들었어요. 당신이 어째서 그렇게 행동을 하는 것인지, 현재 당신의 상태가 어떠한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그리 애매모호한 상태로 대하는 것인지, 전부 다...”

흰 숨결이 공기 중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 나를 원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고, 방금 전 내가 저지르고 말았던 실수를 책망하고자 그런 것도 아니었다.

“사실,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니죠? 우리와 함께했던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기억하고 있는 척을 하고 있는 것이었죠?”

아리엘은 그저, 스스로를 꾸짖고 스스로를 죄인이라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아무도 책망하지 않았기에, 자신 스스로에게 형벌을 부과하고 있던 것이었다.

“키리에가 그러더군요. 우리들이 시간을 넘어 과거로 회귀한 것도 기적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데, 당신마저 우리와 함께 했던 기억을 전부 떠올린다는 그런 형편 좋은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 같았냐고. 설사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런 기적이 일어날 것 같았냐고-”

아리엘의 말에, 나는 스스로의 눈을 지그시 감아버리고 말았다.

...그렇다. 실로 유감스럽지만 키리에의 말이 옳았다. 비앙카와 함께 했던 그 날 이후, 비앙카가 내게 걸었던 마법의 부작용으로서 나는 기억의 색채를 몇 가지 잊어버리고 말았으며.

그를 대가로 하여, 키리에와 이어져 있는 ‘끈’을 감지하고 그를 통해 이어져 있는 여러 가지 기억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록’이었지 기억이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내가 기억을 받아들인 행위는 한 권의 책을 읽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받아들인 기억 속의 ‘나’는 나 자신이 분명하긴 했지만, 동시에 ‘지금의 나’와 완전한 동일인물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만큼, 현재의 나와 기억 속의 나 사이에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괴리감이 존재하였다.

...그렇지만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시간이 되돌려지기 이전, 아리엘과 함께 했던 ‘카인’은 그녀에게 약속해주었다. 다시금 그녀를 만나러 와주기로. 다시금 그녀를 사랑해주기로. 다시금 그녀와 사랑에 빠지기로.

“물론, 당신은 그런 것을 신경써주지 않는 사람이니 다시금 저를 받아들여주겠죠. 그리고 예전처럼 저를 아주 많이 사랑해주시겠죠.”

“그런데 이거 아시나요. 저는 사실 아주 많이 추한 여자에요. 어젯밤, 황녀님께서 저보다 먼저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제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아시나요.”

그리고 그 맹세는, 없어지지 않았다. 시간을 넘어, 공간을 넘어, 아리엘과 나누었던 약속은 아직까지도 똑똑히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나를 독점하려고 하는 아이리스와 대립하면서까지 검을 맞대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지내온 인생 속에서, 잃어버리고 떨어뜨려갔던 것을 다시는 놓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죽이고 싶었어요. 없애버리고 싶었어요. 티아, 그 아이보다 먼저 세상에 나오고 먼저 당신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될 황녀님의 아이가 너무도 증오스러웠고, 너무도 질투가 나 견딜 수가 없었어요. 저도 엄마인데, 엄마에게 있어 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는데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도-”

“그런 나쁜 생각을, 저는 떠올려 버리고 말았어요.”

그러니, 처음부터 이미 답은 정해져있던 것이나 다름이 없다. 만일 아리엘이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나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자신을 끝내 용서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저는 욕심쟁이에요. 오직 저만이 당신을 독점했던 기억을 끝내 떨쳐버리지 못하고, 다른 여자들에게 질투심을 보내는 그런 추한 여자에 불과해요. 이대로 가다가, 저는 당신이 만들어 나갈 미래 속에 방해물 밖에 되지 않겠죠.”

“그러니까, 그러니까, 저는. 당신 곁에 있을 자격이-”

그녀의 말은 이어지지 않는다.

비를 맞아 싸늘하게 식은 그녀의 몸을, 내가 살며시 껴안아주었기에. 망설임과 죄책이 가득 담겨 있던 그녀의 입을, 나의 입으로 조용히 막아준다. 너의 죄를 내가 전부 사해주고, 너의 책임을 함께 나누어 짊어지겠다는 그녀와의 약속이었다.

“...미안. 정말로 미안해. 내 생각이 짧았어. 적어도 나만큼은 당신을 위해주었어야 했는데, 당신의 편이 되어주었어야 했는데, 너라는 사람을 미처 생각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카인.”

아리엘의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간다. 나를 충분히 밀쳐 낼 수 있음에도, 그녀의 팔은 축 늘어진 채 올라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리엘의 두 눈은, 마치 참회라도 하는 것처럼 조용히 감겨 있기만 할 뿐이었다.

“당신의 말이 맞아. 내겐 당신과 함께 했던 '카인'의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아.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몇 년 뒤, 나는 분명히 당신과 맹세했었어. 언제까지도 당신을 믿어주고, 당신을 신뢰해주겠다고. 이것이 바로 내 대답이야.”

“...그리고 당신이 말했었지? 자기 자신은 아주 나쁜 욕심쟁이에 지나지 않다고. 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원체 욕심쟁이인지라, 당신이라는 사람을 놓아주고 싶은 마음이 없어. 그러니 나는 당신을 멋대로 끝까지 책임질 거야. 그리고 이게 가장 결정적인 이유인데...”

그녀의 귓가에, 나는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이번 생, 우리는 아직 티아를 만나보지 못했잖아.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놓아줄 수 없어. 그러니까 당신은 다른 것은 신경 쓰지 말고-”

“오직 나만 보면 돼. 내가 너의, 하나뿐인 이유가 되어줄 테니까.”

나의 그러한 대답에, 아리엘은 그저 멍하니 나의 얼굴을 쳐다본다. 흘러 내리는 비에 머리카락이 젖어버려, 그녀의 눈에는 나의 얼굴이 얼마나 꼴사납게 보일까 하는 이상한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미련하고 멍청한 사람 같으니. 당신은 기필코, 후회하게 될 거에요. 오늘 있었던 일을. 전부 다.”

마치 한탄을 내뱉는 듯한 탄식음.

"...후회 안 해.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

비가 그쳐간다. 날씨가 서서히 개어나가고, 점차 햇빛이 들기 시작하였음에도, 나는 그녀를 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 또한, 더 이상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카인.”

빗방울 때문인지, 아니면 눈물 탓인지, 촉촉이 젖은 눈동자를 하며 그녀를 나를 올려다본다.

“...그렇다면 오늘 밤, 저를 품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티아가, 너무도 보고 싶어요. 그것도 지금 당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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