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7)15. 설월화(雪月花) - 14
그것은, 아무런 징조도 없이 불현 듯 찾아왔다.
처음에는 평소보다 겨울이 며칠 정도 길게 이어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3월이 되어도 새순은커녕 하늘에서 눈이 흩날리는 것을 보자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6월, 평소 같으면 무더운 열기가 대륙을 덮쳤을 시기. 허나 사방에는 온통 눈으로 가득하였으며 사람들은 두꺼운 방한복을 착용하지 않고는 거리를 나다니지 못하였다.
...그제야 사람들은 알아차리고 말았다. 이 대륙에, 끝나지 않는 겨울이 찾아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10년 전부터 예고되어 있던 멸망이 대륙을 덮쳐오고 말았지만.
멸망을 막아내기 위한 중요한 열쇠 조각 중, 두 개가 이미 사라져 버렸기에 처음부터 인류에게는 승산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겨울의 마녀’를 토벌하기 위해 제국은 황녀를 지휘관으로 삼아 대군을 일으켜 에스텔 공작령으로 쳐들어갔으며.
5만이 넘는 대군이 전부 얼음조각상으로 변해버린 직후, 대륙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국은, 아니 인류는 이미 끝장나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휘몰아치는 거센 눈보라에 언제나 지상을 밝혀주던 태양의 은혜조차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으며,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 또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한 채, 천상의 여신을 향해 자신들의 구원만을 갈구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겨울의 마녀’가 지상에 강탄(降誕)한지 3년이 지난 지금.
인류는 멸망을 고작 한 걸음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대륙의 남쪽 끝, 어느 자그마한 오두막.
눈 속에 갇혀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그 자그마한 오두막이야말로 인류의 최후의 안식처였으며, 동시에 이 세계의 전부이기도 하였다.
모든 것이 멸망해버렸음에도 끝내 살아남아버린 최후의 인류는, 어느 세 명의 가족이었다.
****
휘이잉-
창문 밖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소리가 을씨년스럽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사람의 생존 그 자체를 불허하는 영하의 기온이 세상 그 자체를 얼어붙게 만들고 있는 가운데, 오두막에 나 있는 하나 뿐인 창문은 금방이라도 떨어져나갈 것만 같이 쉴 새 없이 덜컹거리고 있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과연 눈보라 때문에 창문이 덜컹거리고 있는지 조금은 의심이 들기까지 하였다. 왜냐하면 현재 창문 밖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 그 자체가 새까만 어둠 속에 잠겨 있는 것 마냥 어두컴컴한 ‘무언가’ 만이 자리하고 있기만 할 뿐이었으니까.
“...끝나버렸군요. 모든 것이, 전부 다.”
그런 창밖의 경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알고 있었다. 자신은 처음부터, 이러한 결말이 닥쳐올 것이라는 것을 전부 다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성녀(聖女)로서의 의무를 내팽겨치고,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친 끝에, 스스로의 행복만을 추구하게 된다면 어떠한 결말이 다가오게 될 것이라는 것쯤은 모조리 알고 있었단 말이다.
그럼에도 아리엘 티에르라고 하는 여인은, 인류의 존속이 아니라 스스로의 행복을 선택하였다. 자신을 구성하고 있던 모든 것을 배반하면서, 여차하면 모든 인류를 배반할 각오를 하면서까지 스스로의 하찮은 감정을 앞세운 끝에 어느 한 남자와의 행복만을 추구하였다.
바로 이것이 그 결말이다. 결국 인류는 ‘겨울의 마녀’를 당해내지 못하였고, 그 결과 세상은 통째로 멸망해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이 오두막이 무사한 것은 아리엘이 자신의 권능을 전부 쥐어짜내어 설치했던 결계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지,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세 명의 가족 또한 전부 옛날 옛적에 죽어버리고 말았으리라.
하지만 지금에 와서 결계 따위,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모든 것은 이제 시간문제에 지나지 않다. 아리엘의 권능으로 유지되고 있던 이 결계는, 조만간 무너지고 만다. 인류의 끝에 남게 된 세 명의 가족 또한 곧 최후를 맞이하게 되리라.
이것이야말로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결말. 모든 것을 배반한 아리엘 티에르에게 내려진, 가장 잔혹한 처벌. 그녀가 가장 끝에 맞이하게 될, 절대적인 끝이었다.
“.....”
아리엘은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침대 위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그녀의 딸인 티아와, 그녀의 사랑하는 남편이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광경만이 비춰지고 있었다.
...허나, 이제와 아리엘 티에르에게 물러날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배반하고 등을 돌린 끝에, 지금 그녀의 손에 남아 있는 것은 고작해야 자신의 사랑하는 남편과 사랑하는 딸 밖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이제는 더 이상, 티아와 함께 바깥에 놀러 나갈 수는 없게 된 것 같군. 아쉽게 되었는걸.”
카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자신의 품에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딸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마치, 이제는 그것 밖에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은 사람과 같이 조용하고 쓸쓸한 기색으로 그러한 행동을 몇 번이고 반복하였다.
“...여보, 혹시 저를 원망하시나요. 그 날, 이런 미래가 닥쳐올 것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당신을 택하고 티아를 택한 제가 원망스러우신가요?”
아리엘의 물음에, 카인은 시선조차 돌리지 않으며 무뚝뚝하게 대답을 한다.
“그렇게 따지자면 나 또한 죄인이겠지. 나 역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당신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음에도 끝내 모든 것을 내버린 채 당신과 함께 도망을 쳐 왔으니까.”
카인의 팔이 아리엘의 몸을 끌어당기며, 아리엘은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고 그의 품에 받아들여진다. 지난 10년, 서로가 서로를 위해 충실한 삶을 살았던 두 남녀는, 굳이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아도 서로가 고하고자 하는 바를 너무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여보...”
그녀는 결국 흡사 참회라도 하듯 조용한 오열을 쏟아내고 말았다. 그녀의 차가운 손가락이, 카인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진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당신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아리엘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투명하여,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은 희미함을 담고 있었다.
“그 날, 당신께서는 어째서 저를 믿어주셨던 것인가요?”
“...무슨 말이지. 그건.”
카인의 의아함을 담은 질문에, 아리엘은 그저 살포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바로 그 날 말이에요. 여보.”
아리엘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변한다. 마치, 덧없는 꿈을 꾸기라도 하는 듯이.
“어느 날, 갑자기 당신 앞에 난생 처음 보는 여자가 이상한 말을 잔뜩 늘어놓았었죠. 자신은 미래에서 왔다느니, 사실 당신과 나는 알고 있던 사이였다느니, 미래가 ‘겨울의 마녀’로 인해 멸망할지도 모른다느니-”
“앞으로 일어나게 될 미래가, 자신에게는 일어나버린 과거라고 주장하는 미친 여자의 헛소리를, 당신은 어째서 믿어주셨던 것인가요?”
아리엘의 질문에, 카인은 살그머니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리엘은 아직 눈치 채지 못한 듯 하지만, 그녀가 유지하고 있던 결계에 미세하게나마 금이 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바깥에서 밀려들어오는 죽음의 기운이, 카인의 몸에 닿아 급속도로 그의 생기를 앗아가기 시작한다.
...아마도, 이것이 정말로 이번 생의 끝인 듯 하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그 날, 당신이 했던 말은 헛소리가 아니었잖아. 지금 이렇게 현실이 되어버리고 말았는걸.”
카인의 여상한 대답에, 아리엘은 자신의 고개를 살며시 좌우로 내젓는다.
“적어도, 10년 전에는 헛소리였죠. 말도 안 될 뿐더러 믿기지도 않는 이상한 소리에 지나지 않았죠.”
“.....”
“보통이라면 그런 이상한 소리, 무시해버리고 말았을 거에요. 적어도 그 자리에서 제 말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신뢰해주거나 하지는 않았겠죠. 오히려 제가 정상인지, 혹은 정신이 나간 여자인지에 대해서 먼저 따지고 보았겠죠.”
“의심, 궤변, 불확실, 미심쩍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정상적인 판단 능력이에요. 사람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않죠. 왜냐하면 의심스러우니까. 이 사람이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알지 못하니까.”
“...하지만 당신은 달랐어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 말을 믿어주고, 제 이야기를 신뢰해주고,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모든 것을 내버린 끝에 저와 함께 도망을 쳐주기까지 했어요. 당신께서는 어째서, 제게 그리 믿음을 주셨던 것인가요. 대체 왜-”
아리엘의 그 질문에, 카인은 말없이 아리엘을 끌어안고 있는 팔에 힘을 더하고 말았다. 오직 그것만이, 지금의 자신과 또 다시 이별을 겪게 될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으니까.
“...다급해 보였으니까.”
“네?”
“내 얼굴을 바라보고, 내 이름을 부르고, 자신이 지니고 있던 모든 비밀을 내게 털어놓는 당신의 얼굴과 몸짓이 너무나도-”
안쓰럽고, 애처롭고,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이 보여서.
나는 당신이라는 여자를 도저히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유는 그저, 그것뿐이었다.
“...제가 만약, 정말로 미친 여자였다면요? 당신은 그저, 정신 나간 헛소리에 휘말려 인생을 낭비한 꼴이 되고 말았을 텐데요?”
“그건 그것대로 괜찮은 결말이었겠지.”
아리엘의 몸에서 손을 놓은 그는 침대 위에 잠들어 있는 티아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 준다.
“당신과 같은 아내와, 티아 같은 딸과 함께할 수 있던 인생이라면 나쁘다고 말할 수가 있나.”
아리엘과 두 눈을 마주하고 있는 그의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존재하지 않았다.
“장담할 수 있어. 적어도 이번 생에서만큼은, 세상 그 어떠한 것보다도 당신과 함께 했던 시간이 가장 값지고 귀한 것이었다는 것을.”
“...아아...”
아리엘의 눈동자 속에는 물기가 가득해, 결국에는 눈물이 넘쳐 흘러버리고 말았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리고 말았다.
행복하다. 너무도 행복하다. 만일 이것이 꿈이라면 평생 지금 이 순간을 반복해서 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너무도 행복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실은 얼마 전, 꿈을 꿨어요. 아득히 먼 미래의 꿈을. 언젠가의 제가 당신의 뜻에 반하고, 당신의 앞을 가로막는 그런 나쁜 꿈을...”
“.....”
“많은 것을 말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 딱 한 가지만, 한 가지만 저와 약속해주실 수 있나요. 과거의 당신이 그러하셨듯,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믿어주시고 신뢰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카인은 어떠한 대답도 없이, 나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 언제라도 저라는 여자를 믿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제가 당신을 배반하였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끝까지 저라는 여자를 신뢰해주시고 제가 하는 행동에 딱 한 번이라도 괜찮으니 믿음을 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녀의 말에, 카인은 조용하게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래. 약속할게.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난 당신이라는 사람을 신뢰하도록 할게.”
...카인의 대답에 비로소, 아리엘은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의 기억을 볼 언젠가의 당신 또한, 나의 말을 신뢰해줄 것을 알고 있었기에-
콰지직-
아리엘이 마지막 힘을 다해 쳐놓은 결계가 서서히 부서지기 시작한다. 아니, 결계가 부서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 그 자체가 통째로 부서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과거 키리에가 가르쳐준 바에 따르면, 세상을 구성하는 네 명의 여신 중 한 명이 정말로 ‘죽어’버렸기에 일어나는 현상임이 틀림없겠지.
“그런 표정을 짓지 마. 우리는 곧,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여보.”
아리엘은 끝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울먹이고 말았다.
“약속할게. 이번 생, 당신과 내가 이렇게 만남을 가지고 사랑을 하게 된 끝에 티아를 가지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나는 내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는 않아. 그러니 당신의 말처럼 다음 생이라는 것이 정말로 있다면...”
“그 때에는 내가 당신을 더욱 많이 사랑해줄게. 그 날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당신과 사랑에 빠지고 너와 함께 가정을 꾸려나갈게. 그리고 티아 또한, 다시 만나도록 하게 해줄게.”
그 순간, 오두막을 지탱하고 있던 결계가 유리처럼 부서지고 말았다. 오두막 바깥에 있던 거센 어둠이 휘몰아친다. 아리엘의 눈앞에 있던 사랑하는 남편과 딸이,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에 순식간에 집어 삼켜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으로서 모든 것이 끝나고 말았다. 그녀의 손은 허무하게 어둠을 가르고 말았다. 그녀의 의식 또한 빠르게, 어둠 속으로 침잠해버리고 말았다.
...마지막 순간, 그녀는 남편이 자신을 향해 안녕, 이라며 미소를 짓는 장면을 본 것만 같았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말았다. 남편도 사랑하는 딸도, 그들과 함께했던 추억도, 전부 다-
꿈을 꿨다.
그립고도 아득하며, 이제는 도저히 되돌릴 방도가 없는-
멀고, 먼 꿈을 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