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상실에 걸린 마녀를 주워버렸다-164화 (164/201)

(EP.164)15. 설월화(雪月花) - 11

그리하여, 두 남녀는 도망쳤다.

지금까지 믿어오던 것, 스스로를 지탱해오던 모든 것, 그리고 앞으로 믿어나갈 모든 것을 전부 내팽긴 채로 어느 누구도 그들을 알지 못하는 곳으로 멀리멀리 도망쳤다.

남자는 장차 에스텔 공작가의 후계자로서 짊어지고 있던 모든 자존심을, 그와 결혼하기로 예정이 되어 있는 아름다운 약혼녀를, 그리고 장차 에스텔 공작으로서 누리게 될 모든 권세를.

여자는 성녀(聖女)로서의 자기 자신을, 지금까지 그녀가 보내온 모든 시간을, 눈앞에서 속절없이 죽어나가던 모든 사람들을 향한 끝없는 속죄를, 그들의 원념을 짊어진 채 살아온 지난 20년을 헌신짝처럼 배반하면서까지.

자신을 구성하던 모든 것을 외면한 채로, 그 둘은 아주 머나먼 곳으로 도망을 쳤다.

미래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미 파국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 무모함의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아주 잘 알면서도.

남자는, 여인의 손을 꼭하고 붙잡아 주었다. 우리에게 남겨진 결말이 파멸뿐이라면 그 파멸이 다가올 때까지 당신과 함께 하겠노라고, 앞으로 여인이 수없이 범하게 될 죄조차 함께 나누어 가지겠다며, 여인을 살며시 끌어안아 주었다.

바로 이것이 그 결말이다. 스스로를 배신하고, 스스로를 믿어온 모든 것을 배신하고, 많은 목숨을 희생으로 삼은 끝에 얻어낸 행복이 바로 그 결말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자아내고자 하였던 희망과 사랑의 이야기다.

****

“...허어, 괜찮겠소이까? 정말로?”

대륙의 남쪽에 위치한 어느 자그마한 시골 마을. 그리고 그 마을에서도 외곽이라고 할 수 있는 장소에 지어져 있는 다 허물어져 가는 낡은 오두막.

말이 좋아 오두막이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 그 폐허를 구매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한 쌍의 남녀를 바라보며 마을의 촌장은 자신도 모르게 반문을 던지고 말았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구려. 오두막이야 어찌어찌 수리를 거쳐 사람이 살법한 공간으로 만든다고 해도 이 근방은 돌아다니는 사람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무법지대란 말이오. 인기척이 드문 곳에서 산다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보여도 속사정을 파헤쳐보면 불편한 일이 한 두 개가 아닐 것이외다. 그러니, 이 오두막을 구매하시는 건 다시 한 번 재고해보시는 것이 어떠시오?”

촌장 또한 어지간하면 이런 악성 재고를 돈 받고 팔아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얼씨구나 절을 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구매를 승낙하였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조금 아닌 것 같았다.

이 오두막, 아니 한 때 오두막이라고 불렸던 이것은 저들에게 돈을 주고 팔아넘기기는커녕 오히려 저들이 돈을 받고 살아주는 것이 올바르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처참한 상태이기만 했단 말이다.

...결정적으로, 촌장의 눈앞에 있는 두 남녀는 아무리 보아도 범상치 않은 내력을 지닌 사람이 분명해 보였다.

남자 쪽은 말투와 행동 하나 하나에 기품이 묻어나오고 있었으며 사람을 대하는 것이 무척이나 익숙해보였다. 또한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최소한 기사, 혹은 귀족 출신으로 추측이 되었으며.

‘...허어.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생길 수가 있단 말인가.’

여자 쪽은, 촌장이 60년 넘게 살면서도 처음 마주하는 놀라울 정도의 미인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제국의 황녀가 그리도 아름답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촌장이 보기에 눈앞의 여인 또한 황녀에 비해 아름다움이 그리 떨어지지 않을 듯 싶었다. 그 정도로, 보랏빛 머리의 여인은 그저 무심하게 아름답기만 할 뿐이었다.

저런 사람들에게 이런 쓰레기를 돈 주고 팔아넘기다가는 나중에 무슨 탈이 날지도 모르는 일이니 촌장은 끝까지 두 남녀의 구매 의사를 철회시키기 위해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였지만.

“괜찮아요. 저는 오히려 더 마음에 드는걸요. 그리고 저희 둘 또한 나름대로 무력은 갖추고 있으니 치안은 별 걱정이 없을 것이라 생각해요.”

끝끝내, 촌장은 그 둘의 의견을 철회시키는 일에 실패해버리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둘의 말에 감히 반대의견을 내세울 수가 없었다는 것이 올바른 말이겠지만.

“...어쩔 수 없구려. 만일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마을로 내려오시구려. 내 그대들이라면 언제든지 편의를 봐줄 생각이오니.”

그리 말을 하며 촌장은 오두막을 수리할 자재도구와 목판만을 놔두고 마을로 다시 내려갔다. 그렇게 다 허물어져가는 오두막의 앞에는, 카인과 아리엘을 제한 그 어떤 사람의 인기척도 찾아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아리엘.”

“네? 왜 그러세요, 카인?”

북쪽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에스텔 공작령에서 대륙의 남쪽으로 내려오는 여정 속에서 카인은 아리엘을 향해 말을 편히 놓게 되었다. 아리엘은 여전히 존댓말이 편하다며 그에게 끝까지 말을 놓지 않았지만.

“정말로 괜찮겠어? 솔직히 말해서, 제 아무리 우리가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다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에서 너를 재우는 건 조금...”

“뭐에요, 이제 와 자신이 없어진 거 에요? 어릴 적부터 손재주 하나는 기가 막히다고 아버님께 칭찬을 많이 들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 당신이라면 오두막 하나 수리 하는 것쯤은 문제가 없지 않을까요?”

아리엘이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태평스럽게 말을 늘어놓자 카인은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내가 손재주가 좋은 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이건 오두막을 수리하는 수준이 아니라 재건축을 하는 수준인걸. 이 오두막을 사람이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수준으로 만들기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을 걸릴 텐데.”

“상관없어요. 정 안되면 결계를 쳐서 야외에서 노숙이라도 하죠 뭐.”

겉으로 보기에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혀보지 않았을 것처럼 생겼지만, 실은 ‘겨울의 마녀’를 토벌하기 위한 원정 기간 동안 노숙을 지겹도록 경험해본 아리엘은 길바닥에서 자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감성의 소유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당신의 손길이 닿은 오두막이라니, 그건 그거 나름대로 정말 가슴이 두근거리는군요.”

아리엘은 어딘가 모르게 몽롱한 눈빛으로 다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을 바라본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카인은 아리엘의 '낭만'을 전혀 이해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내 입장에서는 그냥 마을에 지어져 있는 집 하나를 통째로 구매하는 편이 더 손이 덜 가는 방법인데 말이지.”

팔자에도 없던 목수 노릇을 해야만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카인은 그리 가볍게 투덜거렸지만 정말로 다른 사람들처럼 마을로 내려가 함께 어울려 살 수가 없다는 것은 카인이 더욱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엄연한 도망자의 신분이었으며, 혹시 모를 추격자가 그들의 뒤를 쫓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어야만 했으니까.

“급하게 도망쳐 오느라 너와 변변찮은 결혼식도 치루지 못했는데,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너를 이런 작고 초라한 집에서 너를 재워야만 하다니...”

자그마한 숲의 한복판에 지어져 있는 오두막 주위의 풍경은 흡사 그림처럼 아름답긴 했지만, 그에 반비례하여 앞으로 그들이 지내게 될 보금자리인 오두막은 너무도 조촐하고 허름하기만 할 뿐이었다.

카인이 생각하기에 아리엘 티에르라고 하는 여인은 이런 대우를 받으며 살아갈 여인이 아니었다. 여신께서 직접 점지하신 신의 대리인이자, 지상에서 가장 고귀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여자가 바로 아리엘이 아니던가? 어지간한 귀족들조차 아리엘 앞에서 감히 고개를 쳐들지 못할 텐데, 그런 그녀가 이런 허름한 오두막에 몸을 뉘이고 살아가야만 하다니.

“...음, 사실 전 괜찮은데 말이죠.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집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응?”

“집이 작으면 작을수록, 당신이라는 사람과 더 가까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당신의 체온을, 당신의 흔적을 좀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으니까요.”

아리엘은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카인의 손을 살그머니 붙잡는다. 마주 잡은 손을 통해, 서로가 서로의 체온을 절실히 느끼고 만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리엘은 그저 싱긋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카인은 왠지 모르게 목덜미가 새빨갛게 변하고 말았다.

“물론 자그마한 크기의 집인 만큼 많은 불편함이 있겠지만, 원래 신혼이라는 건 그런 법이잖아요? 뭐든지 부족하고, 뭐든지 풍족하지 않지만 서로가 서로를 향한 배려로서 모든 것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시기. 그러니 어쩌겠어요? 돈이 부족한 남편을 위해서라도 마음씨 넓은 아내인 제가 참아야죠.”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기분만큼은 정말로 좋은 듯, 아리엘은 전에 없었을 정도로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거기다가 카인, 당신은 제게 반지를 선물해 주기까지 했잖아요. 비록 결혼식은 치르지 못했지만, 대신 나와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내게 반지를 선물해주기까지 했잖아요. 그것만으로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아리엘은 다른 한 손으로 카인의 손등을 조용히 쓰다듬는다.

“카인, 남녀가 결혼식을 왜 하는지 아시나요?”

“...글쎄.”

“그건 말이죠, 남녀 간에 이루어지는 암묵적인 약속 때문이랍니다.”

"약속?"

“예. 남녀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질 때면, 남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데려와 그들을 공증인으로 내세워 하나의 약속을 맺곤 하죠. 이 생애,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겠노라고. 이 세상이 끝나는 그 날까지 당신만을 바라보겠노라고. 설령 이 몸이 흩어져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이 자리에는 영원불멸한 그 때의 약속이 남아 있었노라고-”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영원한 사랑 따위, 그야말로 꿈과 같은 이야기에 불과하죠. 흩날리는 꽃잎과 같이 부질없고, 하늘에 떠 있는 구름마냥 덧없는 무언가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하지만 말이죠.”

아리엘은 어딘가 아련한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야는 그의 얼굴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비추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는 생각을 끝내 지울 수가 없었어요. 정말 우습죠?”

“.....”

카인은 결국, 그녀를 앞에 두고서 어떠한 표정도 지어보일 수 없었다.

“그런 지켜지지 못할 약속을 하며, 남녀는 반지를 교환하죠. 그 날 나누었던 맹세를 조금이라도 잊지 않기 위해. 그 날 함께 했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되살리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지금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그러니, 그것으로 충분해요. 넓은 집 따위 처음부터 바란 적도 없었고, 호화로운 결혼식 따위 원하지도 않았어요. 저는 그저 당신이 제 곁에 있어주고, 저를 사랑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니까요.”

아리엘은 자신의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자그마한 반지를 바라보며 웃음을 짓는다. 그 반지야말로 아리엘 티에르라고 하는 여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배반하면서까지 얻어낸 행복의 조각이 분명할 터.

“그러니, 카인. 지금 이 자리에서 결혼식 대신 저와 한 가지 약속을 나눠줘요. 비록 이 자리에 증인으로 내세울 사람은 없지만, 그 대신 하늘과 땅에 대고 다짐을 해줘요.”

“우리,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 주도록 해요. 때로는 화를 내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다투는 일이 있을지라도-”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주고, 서로가 서로를 똑바로 바라봐주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게 된 것만은 결코 후회하지 말도록 해요.”

끝내 지켜지지 못할 미래의 이야기를 입에 담는 아리엘을 바라보며, 카인 또한 그녀의 손을 살며시 붙잡아 주었다. 아니, 붙잡아 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배신하고, 자기 자신마저 배신한 채 오직 카인 폰 에스텔을 향한 사랑을 택한 아리엘 티에르에게 있어, 카인은 세상의 모든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카인마저 그녀의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그녀가 의지할 곳이라고는 단 한 군데도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러니 카인 폰 에스텔만이라도 세상에 단 하나 뿐인 그녀의 편이 되어주어야만 했다. 설령 그것이 위선이라고 할지라도, 오직 그것만이 파멸로 치닫고 있는 아리엘을 향한 단 하나의 자비가 되어줄 터이니.

“...그래, 약속할게. 시간이 얼마나 흐르더라도, 앞으로 우리에게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나는 결코 네 손을 놓지 않을게. 오직 네게만 성심을 다하고, 성의를 다하도록 할게.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부부니까.”

그 날, 카인과 아리엘은 서로를 향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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