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3)15. 설월화(雪月花) - 10
그 날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화창하면서 햇살이 따스했던 어느 봄날이었다.
에스텔 공작가의 소공작, 카인 폰 에스텔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공작가 뒤편에 있는 후원에 걸터앉아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가하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와중이었다.
“...하암.”
참으로 심심하다는 듯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한가하다는 말이 마냥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와중이었다.
물론, 그가 지금 이리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소공작으로서 처리해야하는 모든 일을 오전에 끝내놓았기 때문이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한가로이 빈둥거리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모든 업무를 고작 오전 중에 전부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그가 처리해야 하는 업무량이 자그마하다는 의미가 될 터이니.
처리해야 할 업무량이 적다는 의미는 다른 관점으로 보자면 그가 에스텔 공작가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 또한 비교한 부족하다는 말이 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카인은 그런 권력에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에스텔 공작가의 후계자는 자신과 여동생인 엘레나 뿐.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차기 공작이 되는 것은 확정이 되어 있는 일이니 지금 이 순간이라도 여유롭고 느긋하게 행동을 하고자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그의 사고방식은 언제나 그 모양이었고, 그의 인생 또한 언제나 그러하였다.
하지만 조금 느긋하게 살아가는 것이 뭐 어떠하단 말인가? 어차피 그가 장차 상속받을 예정인 에스텔 공작령은 부유하기는커녕 제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빈곤한 처지에 놓여 있는 영지에 불과하며 대륙의 북쪽 끝에 위치한 촌동네에 불과하다보니 커다란 사건이나 사고가 발발할 가능성도 극히 희박하였다.
현재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문젯거리라고 해봐야 최근 들어 그와 약혼 관계에 놓여 있는 약혼녀와의 사이가 상당히 소원해졌다는 정도일까.
카인 폰 에스텔의 삶에 문제는 존재하지 않고, 그의 삶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순탄하고 평온하게 흘러가겠지. 아마, 이는 그가 공작위를 계승 받은 이후로도 쭉 그러할 것이다.
“...아. 카, 인-”
...그래, 여느 때처럼 화창하고 햇살이 따스했던 그 날.
“...진짜였어. 진짜로, 그가 살아있어.”
그저 멍하니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어느 한 남자를 향해.
그가 난생 처음 보는 어느 보랏빛 머리의 여인이 다가오지 않았더라면, 필시 그의 인생은 필시 그렇게 흘러 갔겠지.
“...그래. 이 시간대의 그는 아직, 살아 있어-”
그것은 흡사,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그 여인과 두 눈을 마주한 순간, 카인은 대지에 훈풍(薰風)이 불어온 것 같다는 착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찰나는 영원이 되어, 끝없이 싱그러운 눈동자가 그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었다.
보랏빛 머리의 여인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녀의 본질을 상징하는 듯한 새하얀 수도복이 바람이 흩날린다. 목에 걸고 있는 십자가 목걸이는 흡사 그녀에게 맞추어 제작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녀와 잘 어울렸다.
전체적으로 미루어볼 때, 보랏빛 머리의 여인은 아마도 법황국의 성직자임이 틀림없을 터.
카인의 기억이 틀림없다면, 눈앞의 여인과 그는 오늘 난생 처음 마주하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저런 여인과 한 번이라도 얼굴을 마주했더라면, 기억이 남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데, 대체 어찌하여.
“...아, 아아-”
저 여인은, 자신을 저리도 애절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그러면서도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저런 모순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향해 감사라도 하는 것처럼, 저리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일까.
“...카, 인-”
난생 처음 마주하는 자신의 이름을 어찌하여 알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저리도 애타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일까.
대체, 어찌하여. 대체 왜. 대체 무슨 이유로.
“.....”
심장이 두근거린다. 저 여인들 마주하고 있는 심장이, 전에 없을 만큼 큰 소리로 쿵쾅거린다. 나의 이성은 알지 못한다고 답하고 있는 저 여인을, 나의 본능은 저 여인을 익히 알고 있노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머리가 아프다. 스스로조차 혼란스럽게 그지없다. 저 여인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분명 나와는 일면식도 존재하지 않는 여인이, 어째서 내게 이리도 익숙한 것이란 말인가-
기억에는 없지만, 나는 동시에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얼굴도, 저 목소리도, 저 눈동자도, 저 자태도. 어느 것 하나 단 한 점의 변함도 없이, ‘그 때’의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저 여인이 지금 이 자리에서 나와 두 눈을 마주하고 있는 것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순수한 기적에서 비롯된 사실이라는 것을.
“...당신을, 당신을 찾고 있었어요. 그 날, 내 앞에서 떠나간 당신을. 나를 대신해 스스로를 희생한 당신을. 이제는 더 이상, 나를 향해 웃어주지 못하게 된 당신을.”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낯선 여인은 나를 향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선다.
“이제는 볼 수 없다 생각했었어요. 이제는 전부 늦고 말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괜찮아요. 왜냐하면 이제는, 우리가 겪었던 일들은 전부 일어나지 않은 악몽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니까요.”
애처로움이 흘러넘치기 시작한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애처롭고, 너무도 눈부시게 빛나는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시선을 아주 살짝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줄곧, 말하고 싶었어요.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설사 어떤 일이 있더라도,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고 하더라도-”
“당신께 이 말만큼은 꼭 전하고 싶었어요.”
“미안해요, 카인. 정말로, 미안해요-”
그리 말을 하며 보랏빛 머리의 여인은, 자신의 품에 꼭하고 안겨온다. 난생 처음 본 여인이 자신의 품에 갑작스레 안긴다고 하는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
카인은 그저,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의 품에 안긴 보랏빛 머리의 여인을 조심스레 끌어안는다. 마치, 처음부터 그리 했어야 하는 것처럼 익숙한 감각이었다.
기억이 아니라, 그의 혼에 새겨진 무언가가 그녀의 존재를 떠올리고 있었다.
“당신의 앞에서 꼭 사과를 하고 싶었어요. 당신이 살아줘서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참회라도 하는 것 마냥 카인의 품에 안겨 무언가를 끊임없이 뇌까리던 그녀는, 이내 무언가 매달리는 눈을 한 채로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한다.
“...카인, 실은 당신께 할 말이 있어요.”
이제는 두 번 다시 손에서 놓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더욱더 꼭 하고 끌어안으며, 여인은 어딘가 슬픈 어조로 그를 향해 입을 열어 보인다.
“미친 여자의 헛소리라고 생각해도 좋고, 상상력이 풍부한 여자의 하소연이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주 잠깐이라도, 제게 시간을 할애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
이윽고 그 둘은, 많은 것을 이야기하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보랏빛 머리의 여인이 카인을 향해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늘어놓기만 하였고, 카인은 그저 여인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기만 하는 것에 가까웠다.
지금으로부터 10년 뒤, 어떠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
자신과 그가 어떠한 인연으로 서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는지.
자신과 그는, 대체 어떤 사이에 놓여있는 인연이었는지.
자신과 그가 처음 마주하였을 무렵, 자신은 그를 향해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와 자신이 함께 하는 시간 동안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가 어떠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는지.
그녀는 단 한 치의 가감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카인을 향해 늘어놓았다.
“.....”
그녀의 이야기는 무려 2시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한 번에 너무도 많은 말을 쉬지 않고 내뱉은 나머지, 아리엘의 목 끝 또한 살짝 갈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날 때까지, 카인은 끝까지 자신의 입을 열지 않았다.
...두근거린다. 그가 자신의 말을 신뢰해줄 것인지, 아니면 정신 나간 여자의 헛소리라고 여길 것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알고는 있다. 자신이 현재 늘어놓는 이야기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받아들이기 힘든 이상한 소리라는 것쯤은.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신뢰할지도 모른다는 기적을 꿈꾸고 말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도저히 손에 닿지 않을 어떤 기적이 일어나기를 가망하는 것은 너무도 추하였고, 그렇기에 너무도 인간다웠다.
“...그래서.”
아리엘의 모든 이야기를 들은 카인이 가장 먼저 내뱉은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아리엘은, 대체 무슨 목적으로 저를 찾아온 것입니까?”
“네? 저는 그야, 카인에게 사죄를 하고 싶어서...”
당황한 아리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카인은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제가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려면, 제가 눈치 채지 못하게 멀리서 관찰을 하였으면 되었을 것입니다. 제게 예의 ‘사과’를 하고 싶었다면, 편지를 작성하는 등의 방법도 존재하였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미래의 저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라면 방금 전에 하신 것과 같은 ‘회귀’라는 이야기를 제게 할 필요는 더더욱 없었을 것입니다. 방금 전에 하신 이야기가 진짜라면, 미래를 바꾸는 것 따위 손쉬운 일일 테니까요.”
검은색 눈동자가, 당혹으로 물들어가는 아리엘의 표정을 눈에 담아낸다.
“당신은 대체, 무슨 목적으로 제게 미래에 일어날 일을 이야기하신 것이란 말입니까?”
카인의 그 말에, 아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의 말이 옳다. 자신은 대체 왜, 회귀를 하자마자 이곳으로 허겁지겁 달려온 것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자신의 죄를 참회라도 하듯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이란 말인가?
그에게 사죄를 하기 위해? 앞으로 필연적으로 닥쳐 올 그의 죽음을 막기 위해?
아니다. 전부 아니다. 자신의 행동은, 너무도 이성적이지 않았으며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정말로 자신이 그의 죽음을 막고자 하였으면, ‘겨울의 마녀’가 나타난 뒤 원정대가 꾸려지기 직전, 그가 원정대에 합류하지 못하게 손을 쓰면 된다. 이전에는 사전에 그 사실을 알지 못해 손을 쓰지 못한 것이지, 힘이 모자라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이 아니니까.
그가 끝내 원정대에 합류하게 되더라도 방법은 많다. 그의 죽음은 전투의 최후의 순간, ‘겨울의 마녀’의 무차별적 공격에 의거한 것이었으니 그 공격만을 제대로 방비하면 된다. 몰랐다면 모를까, 적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뻔히 알고 있는데 공격을 허용할 정도로 얼간이는 아니니까.
그런데 왜? 굳이 북쪽 끝에 위치한 에스텔 공작가까지 허겁지겁 달려와, 카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은 대체 어째서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저는... 저는...”
그에게 정곡을 찔리고서야 깨닫고 말았다. 자신이 지금 이곳에 왜 있는 것인지. 현재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지. 전부.
이러한 순간이 되고서야, 아리엘은 스스로가 가슴 깊이 품어온 소망을 깨닫게 된 것이다.
답은 처음부터 이미, 전부 결정되어 있었다.
그가 자기 대신 ‘겨울의 마녀’의 공격을 막고 스스로를 희생하였을 때부터, 언제부턴가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뒤쫓던 그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비앙카 델 카스타나가 남몰래 품어온 수줍은 고백을 들었을 무렵부터.
전부, 결정되어 있던 일인지도 모르겠다.
“.....”
모든 사람이 죽어나간 지옥이 있었다. 바닥에 추하게 나뒹굴 정도의 아픔을 호소하는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러한 지옥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한 하나의 약속이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은 성녀가 되었다. 세상을 덮쳐올 환란을 자신의 손으로 끝내고, 많은 사람들을 아픔에서 구해내고자 하는 빛이 되어주고 싶었다. 자신이 겪어야만 했던 슬픔을, 부디 자신의 손으로 끝낼 수 있었으면 한다고 바라였다.
스스로의 마음에 대고, 질문을 던진다.
지금까지 자신이 믿어왔던 것, 그리고 믿어갈 것을 전부 배신한 채.
정녕 네가,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삶을 선택할 수 있냐고.
“...저는, 당신과-”
자신을 배신하고, 앞으로 수없이 죽어나갈 목숨을 희생으로 삼을 수 있냐는 그 질문에, 아리엘은-
“...도망치고 싶어요. 당신과, 오직 단 둘이서 도망을 치고 싶어요.”
지금까지의 자신을 지탱하고 있던 것을 외면한 채, 세상 그 자체의 구원이 아닌 한 남자와의 행복을 택하였다.
“세상이 끝나기 직전까지라도 좋으니, 우리를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어요. 제게 행복을 주세요. 제게 사랑을 주세요. 사랑해요, 정말로 사랑해요. 카인...”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애달픈 신음성을 흘리며, 아리엘은 그를 향해 간절히 매달린다.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 억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아리엘은 머리 한 구석이 고장 난 사람처럼 그에게 매달린다. 아니, 어쩌면 그가 자신 앞에서 죽었던 그 때 자신의 머리는 이미 고장 나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아리엘.”
그를 향해 매달리는 아리엘을, 카인은 아주 잠깐 두 눈에 담았다. 그의 눈이 지그시 감기고 말았다. 그리고-
“...그래요. 도망칩시다.”
“...네?”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말이, 그의 입에서 새어나오고 말았다.
“가요. 떠납시다. 세상 어느 누구도 우리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쳐요, 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