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0)15. 설월화(雪月花) - 07
아리엘의 예상과는 달리, 카인 폰 에스텔이 원정대의 발목을 붙잡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존재는 굉장히 쓸모가 있었다.
무려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제국의 공작 중 한 명이라기에 굉장히 딱딱하며 피곤한 성격일 것이 분명하다는 예상과는 달리, 그는 귀족치고는 꽤나 소탈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많은 일을 도맡아 하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황녀로부터 검술 훈련을 받거나, 극한의 눈보라를 뚫는 여정 길에도 불평 한 마디 내뱉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래, 굳이 말하자면 카인 폰 에스텔과 아리엘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문제였다. 적어도 아리엘의 시선으로 바라보기에는 그리 보였다. 단적으로 평하자면, 이 원정대에서 정상인은 오직 아리엘 그녀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우선 제국의 황녀는 독단적이었다. 흡사 자신이 원정대의 리더라도 된 것 마냥 다른 사람에게 지시를 내리는데, 당연하지만 그들 중에서 황녀를 자신들의 리더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덕분에 황녀가 다른 여자들과 대화를 나눈다거나 한다면 마지막은 주변이 떠나갈 듯한 고음으로 끝을 맺기 마련이었다.
키리에 엘 데나리스는, 자신만 잘났다는 듯 다른 사람들을 아래로 깔아보는 듯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녀의 태도 속에는 아닌 척 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사람들의 신경을 거스르는 무언가가 분명히 내재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순진한 척, 단정한 척은 혼자서 다 하는 앞뒤가 다른 음험한 여자이기도 하였다.
비앙카 델 카스타나는, 인류 중에서도 가장 지고의 지혜를 담고 있다는 세간의 평판과는 달리 살짝 맛이 가버린 정신 나간 여자였다. 매사에 신경질적이고, 얼핏 보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들을 저지르기도 하며, 특정 인물을 눈앞에 두었을 때는 더더욱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가 많았다.
조금 상세하게 설명을 해보자면, 비앙카 델 카스타나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비교적 정상 같이 행동을 하는데 유독 카인 폰 에스텔을 눈앞에 둔 상태라면 마치 사람이 뒤바뀌기라도 한 것 마냥 굴어대고 있었다. 나름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던 아리엘의 눈에도 비앙카 델 카스타나가 대체 무슨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을 때가 많았다.
‘혹시 과거에 아는 사이였나?’
뭐, 둘이서 말을 편하게 놓는 모습을 보아하니 상당히 오랜 옛날부터 알고 지낸 사이가 맞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오랜 시간 알고 지내온 친구 사이에서 오고갈 법한 대화를 나누고 있기도 하였고. 비록 밸런스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비앙카 델 카스타나가 카인 폰 에스텔을 한없이 압도하고 있는 불평등한 상황이었지만 거기까지는 아리엘의 알 바가 아니었다.
아리엘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겨울의 마녀’를 토벌하고 이 세계에 닥쳐온 환란을 잠재우는 것이지, 비앙카 델 카스타나와 카인 폰 에스텔 사이의 관계를 양호하게 만들어주거나 혹은 그들의 심리 상담을 해주려는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혹여 저들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치닫는다면 관계 개선에 도움을 줄 생각은 있었지만, 거기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그 둘 사이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의 교류가 오고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렇게 시간은 쏜살과 같이 흘러갔고, 마녀를 토벌하기 위한 원정대 또한 시도 때도 없이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치며 북쪽의 에스텔 공작령을 향해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원정대의 일원들 사이의 관계는 빈말로도 좋다고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현재 북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쉽게 까먹을 정도의 머저리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비앙카? 잠깐 실례를 해도 괜찮을까요?”
아리엘은 비앙카와 결계 구축관련으로 나눌 이야기가 있어 그녀의 텐트를 찾아 갔는데, 마침 비앙카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는지 그녀의 흔적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또 카인이 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러 간 것일까.”
비앙카와 아리엘이 힘을 합쳐 이 근방에 구축해 놓은 결계를 제외한다면 사방팔방에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으니 비앙카가 자신의 텐트를 떠나 갈 곳은 오직 한 군데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최근 들어 카인은 이 원정대에 약소하게나마 힘이 되어주고 싶다며 남는 시간마다 황녀로부터 검술을 교습 받고 있는 와중이었는데, 비앙카 또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카인이 훈련을 받을 때마다 언제나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봐주고 있던 그 모습을, 아리엘은 손쉽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혹여나 카인이 다칠 때를 염려라도 한 것인지 언제나 그의 곁에 딱 달라붙어 회복 마법을 걸어주거나, 때로는 자진해서 그의 훈련에 도움을 주는 비앙카의 모습은 아리엘로 하여금 의아함을 가져다줄 때가 많았다.
입으로는 언제나 말을 퉁명스럽고 험악하게 하는 주제에, 하는 행동으로만 보자면 이제 막 혼인을 한 새댁 같이 굴어대는 비앙카의 이중적인 모습이 아리엘은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은 그러한 생각을 머릿속 한켠으로 흘려 넘기며, 아리엘은 텐트 중앙에 놓여 있던 소파에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이대로 얌전히 앉아있다 보면 비앙카가 언젠가 텐트로 돌아올 것이니, 그 때까지 이곳에 얌전히 앉아 비앙카를 기다릴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리엘은, 소파 앞쪽에 있는 탁자 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던 그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귀걸이?”
그것은, 붉은 홍옥(紅玉)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귀걸이 한 쌍이었다. 그리고 아리엘은 이 귀걸이가 어떠한 물건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억하지 못할 래야 그럴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왜냐하면 요 며칠 전, 저 귀걸이를 전날 묵었던 야영지에 깜빡하고 두고 왔다며 그토록 난리를 피운 전적이 존재하였으니까. 결국, 그 시끄러움에 이기지 못한 카인이 직접 야영지까지 달려가 저 귀걸이를 회수해오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다물었던 기억이 아리엘의 머릿속에는 아직까지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흐응.”
자신도 모르게 흥미가 동한 아리엘은 탁자 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던 귀걸이 한 짝을 들어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홍옥으로 만들어진 귀걸이는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과 적안(赤眼)을 지니고 있는 비앙카에게 참으로 잘 어울리는 귀걸이였지만, 귀걸이를 이리 저리 살펴보던 아리엘의 두 눈에 어느새 의아함이 깃들고 말았다.
‘...조잡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네. 길거리의 행상인에게서 구입한 귀걸이인가?’
보석 같은 것은 관심도 흥미도 없는 아리엘이지만, 이래 뵈어도 모든 성직자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는 법황국에서 20년 가까이 살아온 몸이었다. 보석이나 장신구의 가치 따위, 대충만 보아도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짐작이 가능하였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 귀걸이는 괜찮은 물건이긴 하지만 동시에 싸구려 장신구에 불과하였다.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후작가의 영애이자 인세에서 제일 가는 대마법사가 애지중지하는 귀걸이치고는 지나치게 싸구려인 물건이 아닐 수 없었단 말이다.
혹시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물건인 것일까. 대체 어떤 사연이 있기에 이런 애들 장난감 같은 물건을 애지중지하고 있는 것일까. 실로 오랜만에 동하는 호기심에 아리엘이 다시 한 번 귀걸이를 매만지고 있던 바로 그 때-
“...아리엘. 당신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그녀의 등 뒤에서, 은은한 살기를 담은 한 줄기 음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잘난 법황국에서도 남의 물건은 함부로 만지는 법이 아니라는 것은 가르쳐 주지 않았던 모양이지? 그것도 아니면, 쥐새끼마냥 남의 텐트에 몰래 들어와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몰래 염탐하는 취미라도 가지고 있던 것인가? 성녀님께서 가지고 계신 취미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고상한 취미가 아닐 수 없는데?”
아리엘이 살며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그곳에는 진심으로 화가 난 듯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갸르릉하며 숨을 내뱉고 있는 비앙카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리 내놔. 그건, 당신 같은 여자가 함부로 만져도 되는 물건이 아니니까.”
그리 말을 하며 비앙카는 아리엘이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귀걸이를 낚아채듯 빼앗아간다. 그리고 나서 비앙카는 혹시 귀걸이에 흠이라도 난 것은 아닐까하며 노심초사한 기색으로 이곳저곳을 살펴본다. 마치, 그 귀걸이가 단 1초라도 다른 사람의 손에 들렸다는 것이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 마냥.
“.....”
비앙카의 그러한 모습에, 아리엘은 자연스레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고 애지중지하는 귀걸이를, 비앙카는 어째서 전에 머물렀던 야영지에 ‘깜빡하고’ 놔두고 왔던 것일까. 또한, 다른 사람의 손에 귀걸이가 들리는 것에 저리 발작을 일으키는 주제에 어찌하여 카인의 손에 귀걸이가 들렸던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조잡하게 만들어진 싸구려 귀걸이를 애지중지 하는 비앙카 델 카스타나.
다른 사람이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은 용납하지 못하지만, 오직 카인만은 손을 대는 것이 허락 된 귀걸이.
입으로는 퉁명스럽고 쌀쌀맞게 굴어대지만, 카인의 곁을 졸졸 따라다니며 그에게 도움을 주곤 하는 모순적인 모습.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일련의 단서를 관통하는 정답은 오직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실로 오랜만에 치솟는 '흥미'에, 아리엘은 비앙카를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비앙카.”
“왜.”
다행히 귀걸이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는지 아까보다는 한결 나은 목소리로 대답을 하는 비앙카.
“혹시 저에게 할 말이 있지는 않나요? 그것도 아니면, 하고 싶은 말이라던가.”
“...뭐?”
아리엘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지 스스로의 미간을 살짝하고 찌푸리는 비앙카.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는 거지? 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으니까 어서 이곳에서 나가기나 해. 나는 내 물건을 함부로 만지는 도둑고양이하고는 그리 상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까.”
“그런가요? 저는 당신이 그 귀걸이와 관련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당신이 정 그렇다면, 여기서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는 수밖에 없겠네요.”
비앙카를 향한 의미심장한 말과는 달리 아리엘은 너무도 쉽게 뒤로 물러섰다. 아리엘은 여전히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유지한 채로 앉아 있던 소파에서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아, 참고로 이곳에서 나간다면 곧바로 카인의 텐트를 찾아가 볼 생각이랍니다.”
“...뭐라고?”
예상했던 대로 비앙카는 아리엘이 카인이라는 이름을 입에 담자마자 크게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비앙카는 아리엘에게 약점을 모조리 노출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감이기는 한데, 어쩐지 카인이라면 당신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귀걸이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뭐, 기억을 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지만 하루 종일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있는다면 답이 도출될 가능성도 있지 않겠어요?”
“...아리엘, 너...”
아리엘의 느긋한 어투의 말에, 비앙카는 스스로의 어금니를 뿌드득 갈고 말았다. 아리엘의 저 말은, 카인을 직접 찾아가 이 사실을 털어 놓기 전에 비앙카의 입으로 모든 것을 실토해내라는 협박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 여자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이 자리에서 사생결단이라도 내고 싶었지만.
“.....”
유감스럽게도, ‘겨울의 마녀’를 토벌하기 위해서는 저 여자의 힘이 필수적이었다. 아군의 방어와 회복을 담당하는 성직자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적에게 달려든다면 그것은 개죽음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원정대의 다른 여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허약한 신체를 가지고 있는 그는, 아리엘의 도움이 없다면 금방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결국, 비앙카가 선택한 길은 바로.
“...거기에, 도로 앉아. 당신이 원하는 것을 전부 말해줄 테니, 제발 카인에게만큼은 입을 닥치고 있어줘.”
상황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수긍이었다. 저 여자를 없애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저 여자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입을 틀어막기라도 해야 했으므로.
“걱정하지 마시길. 약속드리겠습니다. 당신이 모든 것을 제게 말씀해주신다면, 저 역시 당신이 지닌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노라고. 원래 타인의 고해성사를 들어주는 것이 성직자의 본분 중 하나거든요.”
능청스레 그리 말을 하는 아리엘을 사납게 노려보며, 비앙카는 체념이라도 한 듯 한숨을 깊게 내쉬며 이야기보따리를 하나둘 풀어 헤치기 시작하였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전, 처음으로 마주한 소년과 소녀.
모두에게 경원시 당하고 괴물 취급 받던 한 소녀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준 어느 한 소년.
흡사 숲과 같이 드넓은 정원에서, 난생 처음 사귀게 된 ‘친구’와 함께 뛰어 논 아련한 추억.
훗날 어른이 되면, 반드시 함께 하자며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하였던 그와의 마지막 날.
...그리고, 그 날 소년이 자신에게 준 한 쌍의 귀걸이.
어린 아이의 용돈으로 구매한 싸구려이지만, 그가 자신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며 자신에게 선물해준 단 하나의 선물.
그렇게 비앙카는 스스로의 가슴이 뜨겁게 들뜬 것처럼, 아리엘에게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그저 우습기만 하였다.
현세에서 가장 강력한 대마법사 중 한 명이자, 설사 황제의 면전이라고 할지라도 당당함을 잃지 않을 저 여자가 고작해야 남자 하나 때문에 저리 끙끙 앓고, 그의 면전에 서기만 한다면 평소의 냉철함은 어디에 갔는지 얼간이가 되어버리고 만다는 사실이 너무도 우스웠다.
...하지만 어느새, 비앙카가 늘어놓고 있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그녀에게 공감을 해버리고 있는 자기 자신이 존재하였다.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비앙카의 말에 의하자면, 비앙카는 무려 20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말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째서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그런 단순한 행위를 행하지 못하는 것이란 말인가. 대체 어째서 그의 앞에만 서면 스스로의 속내와는 전혀 다른 말을 내뱉어 버리고 마는 것인가. 너무도 답답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대마법사이면 뭐하는가. 자신의 마음 하나 솔직하게 털어놓지도 못하는 한심한 여자에 불과한데.
“차라리 제가 간접적으로 그에게 말을 해줄까요? 비앙카 당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노라고?”
참으로 우스운 일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본인이 직접 말을 하는 것보다 타인의 입으로 전해 듣는 것이 걸맞는 일도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아리엘의 제안에, 비앙카는 고개를 살며시 좌우로 내젓는다.
“카인은 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아니, 싫어한다고 하는 편이 더욱 올바른 표현이겠네. 우리 둘이 인간적으로 서로의 마음에 다가가기 이전에, 그의 마음에는 선입견이 가득하니 당신이 설사 어떤 말을 하더라도 순순히 들어먹지는 않을 걸.”
아리엘은 비앙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에스텔 공작가와 카스타나 후작가의 뿌리 깊은 반목. 비앙카는 지금 카인이 자신을 카스타나 후작가의 후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신뢰를 가지지 않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하면, 그의 오해가 풀리도록 솔직히 설명을 하면 되는 노릇이잖아요? 어째서 그리 겁쟁이마냥 움츠러들고 있는 것이지요?”
아리엘의 말에, 비앙카는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의 두 눈을 사납게 번뜩인다.
“그래. 그가 만약 나를 이해해주고, 그 결과 나를 사랑해준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은 있을 수 없지.”
“...하지만, 그가 만약 나를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면? 만약,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만약, 그가 이미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서 나를 받아줄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렇게 된다면, 비앙카 델 카스타나라는 여자는 더 이상 그의 곁에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가 그녀를 거부한 바로 그 순간, 비앙카에게 있어서는 이 세계에 남아 있을 장소가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닐 수 없기에.
“그러니 내게는 이런 방법 밖에 없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릇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이런 식으로라도 그의 곁에 있고 싶고,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고 싶은걸.”
어딘가 모르게 처량하게까지 느껴지는 비앙카의 그 말에, 아리엘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것은 지옥이나 다름이 없어요. 하나 뿐인 실패를 두려워하여, 앞을 향해 한 걸음 내딛지 못하는 당신은 평생토록 카인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괴로워하고 아파하겠죠. 정녕 그러한 결말이, 당신이 바라던 결말이란 말인가요.”
“...그래, 상관없어.”
비앙카는 자신의 손 안에 들린 귀걸이를 아주 조심스레 매만지며 이리 중얼거렸다.
“오직 나 혼자만 존재하는 천국 따위보다, 멀리서나마 그의 모습이 비춰지는 지옥이 훨씬 더 좋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