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9)15. 설월화(雪月花) - 06
아주 오랜 옛날부터, 신의 뜻을 이어받아 하늘과 땅 사이를 이어주며, 하늘의 이치에 따라 인간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는 이들은 언제나 항상 존재해왔었기 마련이었다.
신화시대(神話時代), 인간과 신이 지상에 공존하였다고 일컬어지던 그 때 당시 신의 오른편에 앉아 그들의 의지를 모든 사람에게 널리 알리던 이를 일컬어 제사장이라 칭하였으며.
인간의 시대, 지상의 신들이 전부 천상으로 귀천(歸天)하게 된 이후 하늘에 대고 구제를 갈망하던 인간들을 한데 모아 그들이 나아가야 하는 길을 제시해주던 이들을 일컬어 신녀(神女)라 칭하였으며.
그로부터 헤아릴 수조차 없는 시간이 흐른 지금, 천상의 신들이 인간들에게 보내는 유일한 후의(厚意)라 할 수 있는 신성력을 제외한다면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여신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듣는 권리를 지닌 유일한 제사(祭司)를 일컬어.
성녀(聖女)라, 칭하게 되었다.
천상의 여신과 직접 소통할 권리를 지니며, 여신의 뜻을 떠받드는 대행자라고 일컬어지는, 지상 위의 가장 고귀한 신분의 여성이 바로 성녀 아리엘 티에르였지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성녀로서 간택이 된 이후 아리엘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이 고귀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었다. 아니, 스스로가 성녀에 걸맞는 여인이기는 한 것인지, 스스로조차 도저히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상에서 가장 강대한 신성력을 지니고 있으며, 물리와 마학(魔學)에 의거한 이론으로는 도저히 설명을 할 수가 없는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으며, 여신의 어여쁨을 받은 끝에 현세의 이치로는 구현이 불가능한 권능(權能)마저 하사 받은 성녀 아리엘 티에르는 사실-
여신을 신앙하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를 의심하고, 인정하지 않으며, 끝내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지옥이 있었다. 그리고 아픔이 있었다. 지옥 안에서, 그녀는 많은 죽음을 보았다. 그 속에는, 아리엘을 낳아준 아버지와 어머니 또한 포함이 되어 있었다.
전지전능하신 여신께서는, 어찌하여 그들의 죽음을 허하신 것이란 말인가. 대체 어찌하여, 인세에 이런 지옥이 펼쳐지는 것을 허락하신 것이란 말인가. 아리엘이 알고 있는 한,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상냥한 사람이었는데.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았는데. 대체 왜.
그러한 의문을 품은 아리엘에게 신학을 가르치던 스승은 이리 설명을 해주었다. 자고로 여신께서는, 자신께서 지상의 대행자로 삼은 아이를 담금질하시기 위해 그에 적합한 시련을 내리신 것이노라고. 대장장이가 명검을 벼려내기 위해 수없이 강철을 두드리듯, 인간 또한 자신을 둘러싼 시련 속에서 성장을 하게 되고 그 끝에 올바른 성인(聖人)으로 발돋움하게 되는 법이노라고. 모든 것은 인간 따위는 결코 판단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여신께서 정하신 섭리임이 분명하니 믿고 따라야만 한다고.
...하지만 아리엘은, 그러한 설명을 결코 납득할 수가 없었다.
스승은 이리 말하였다. 그들의 죽음은, 아리엘의 성장을 위한 여신의 섭리에 지나지 않다고. 그러니, 그들의 죽음을 애통해할지언정 가슴 속에 담아둘 필요까지는 없는 노릇이라고.
허나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모든 사람이 죽어버린 절대적인 지옥 속에서 아리엘은 유일하게 살아남아 버리고 말았다. 몸 안에 신성력을 내포하고 있었기에 면역력이 강했느니, 단순히 운이 좋았느니 하는 요소는 전부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단순히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희생으로 삼아 살아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 그것은 비유하자면 마치 의자 뺏기 놀이와 같았다. 모든 사람이 의자에 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엇을 어찌하더라도, 의자에 앉지 못하는 사람은 생겨버리기 마련이었다.
그것이, 아리엘은 순수하게 역겹게만 느껴졌다. 세상의 섭리를 관장한다는 여신께서 대체 어째서 이런 불합리함을 용인하시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스스로의 몸에 넘쳐흐르는 신성력도, 두 손에서 일어나는 기적도, 여신의 권능마저도, 그저 혐오스럽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 아리엘의 의문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녀의 몸에 내재되어 있던 신성력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기만 할 뿐이었다. 구슬땀을 흘려가며 배우고 익힌 체술(體術)은 그녀의 몸에 완전히 숙달이 된 끝에 감히 그녀와 합(合)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녀의 권위는 날이 갈수록 상승하여, 감히 교황이라고 할지라도 그녀에게 함부로 평대를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무력으로 보나, 권위에서 보나, 아리엘 티에르라고 하는 여인은 여신의 지상 대행자로서 불릴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그녀의 나이 스무 살. 그녀는 이미 공식적으로 성녀(聖女)로 선포되지만 않았을 뿐이지, 이미 법황국을 대표하는 성직자나 다름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리엘 티에르의 일상은 처음 법황국에 끌려왔을 때와 비교해서 어느 것 하나 나아진 면이 없었다. 그녀는 새벽같이 일어나 여전히 좁디좁은 독방과 같은 기도실에서 여신께 기도를 올렸으며, 자신이 익혀야겠다고 판단한 학문이라면 무엇이든 습득하고자 하였으며, 매일 같이 스스로의 무(武)를 갈고 닦는 것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것과 바꾸어, 아리엘 티에르는 모든 것에 무지하기만 하였다. 그녀는 맛있는 음식이 주는 즐거움도, 예술이 낳은 아름다움도, 불타는 사랑의 애절함도, 자기 자신을 위한 욕망도, 전부 알지 못하였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것에 흥미를 가지지 조차 않았다.
아리엘 티에르는 여신을 신앙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신이라는 존재에 의문을 가지고 그녀를 부정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런 아리엘이라고 해도, 한 가지 확실히 믿고 있는 것이 있었다. 여신이 성녀라는 존재를 점지하는 경우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빠른 시일 내에 이 세상에 환란이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여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온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지옥이 있었다. 많은 아픔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흘려나간 많은 눈물이 존재하였다.
그것이 혐오스러웠다.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그저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자기 자신이 흡사 오래된 거울처럼 비춰지고 있었다.
그러한 현실을 뒤바꾸고 싶었다. 자신과 같이 아파하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였다. 과거의 자신은 어느 누구도 구해내지 못했기에, 그것을 속죄하고자 세상 그 자체를 구하고자 하였다.
자신이 겪어야만 했던 지옥이, 세상에 또다시 되풀이 되는 것만은 원치 않았다.
그를 위해 아리엘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하였다. 어렸을 때는 강제로 누가 시켜서 했던 일들을, 이제는 어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행하고 있었다. 10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에 걸친 가혹한 훈육은, 아리엘에게 있어 어느새 일상으로 자리 잡고 말았다.
다행히 괴롭다거나, 힘들다거나 하는 감각은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상은, 그녀에게 있어 아주 당연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니까.
그렇게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러간다. 겉으로 보기에 아리엘의 외모는 단 한 점의 쇠함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런 그녀에게 있어서도 20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단련하고, 단련하고, 끊임없이 단련한 끝에 이제는 두드릴 것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아득하기만 했던 시간이 지난 끝에.
20년 전부터 예정이 되어 있었던, 거대한 환란이 찾아오고 말았다.
대륙 전체에 갑작스레 불어 닥치게 된 끝이 없는 겨울.
여신의 지상 대행자인 아리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단 하나의 계시.
[겨울을 부르는 재앙은, 다름 아닌 북쪽에 존재한다.]
여신의 신탁을 받은 아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리엘은 여신 따위는 전혀 믿고 있지 않았다. 하물며 여신이 내린 신탁 따위 조금도 신뢰하지 않는다. 천상에 틀어박힌 채로 흡사 적선이라도 하듯 신탁을 몇 마디 던져주는 여신에 대한 신앙 따위를 어찌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여신이 자신을 성녀로 점지하였기에 나서는 것이 아니다. 여신이 자신을 장기판의 말로 삼았기에 나서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구해내는 것이 성녀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하였기에 나서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아리엘 티에르는 어디까지나 본인의 의지로 이 세상을 구하려 하는 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스러져가는 아픔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자신과 같은 사람이 반복해서 나오는 것을 막아 내기 위하여.
...그리고 환란을 막아내는 것만이, 그녀가 살아가려고 하는 단 하나의 이유가 되어버렸기에.
그녀가 살아가고자 하는 다른 이유 따위는, 어느새 전부 잊어버리고 말았다.
****
북쪽의 끝, 에스텔 공작령에 불현 듯 나타나 끝없는 겨울을 불러온 통칭 ‘겨울의 마녀’를 잡기 위한 원정대의 구성원이 빠르게 결정이 났다.
현 시대에 있어 가장 강력한 대마법사라 일컬어지는 비앙카 델 카스타나.
세계수의 수호자이자 신기에 다른 궁술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키리에 엘 데나리스.
제국의 황녀인 동시에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검사 중 한 명인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
그리고...
“처음 뵙겠습니다, 성녀님. 카인 폰 에스텔이라고 합니다.”
그녀를 향해 예의바르게 꾸벅하고 고개를 숙여 보이고 있는 어느 한 남자를, 아리엘은 아무 말 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카인 폰 에스텔, 모르는 이름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그는 바로 최근 몇 주간 제도를 뜨겁게 달군 화제의 주인공이었던지라 그간 황궁의 구중심처에 틀어박혀 기도만 올리고 있던 아리엘마저도 그 이름을 들어본 굉장한 유명인이었던 것이다.
가만히 듣자하니, 에스텔 공작은 자신의 영지에서 마녀가 배출 되었음에도 목숨 걸고 마녀를 처단하기는커녕 겨울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가문의 모든 구성원들과 함께 제도로 부리나케 달려왔다고 하던가.
...뭐, 거기까지는 이해해줄 수 있다. 세상사람 누구나 제 한 목숨은 아까워하는 법이고, 눈앞에 있는 남자가 꼭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야할 필요성은 없다고 생각하였기에. 아니, 애당초 저 남자가 설사 제 목숨을 바친다 할지라도 과연 ‘겨울의 마녀’에게 티끌만한 상처라도 입혔을 지부터가 의문이었지만.
하지만, 이 남자가 원정대의 일원 중 한 명으로 낙점이 되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오랜 시간 검을 잡아온 것인지 손에 약간이지만 굳은살이 배겨 있으며, 전체적으로 볼 때 나쁘지 않은 신체조건을 지니고 있긴 했지만.
카인 폰 에스텔은, 인류의 존망을 결정지을지도 모르는 이 원정에 참여하기에 수준미달이었다. 좋게 쳐줘서 짐꾼이었고, 나쁘게 보자면 그저 짐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머리가 아파온다. 아마, 이런 실력을 가지고 원정대에 포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뒷구멍에서 오고갔을 더러운 뒷거래 덕분이겠지. ‘겨울의 마녀’를 토벌하는 것은 장난을 치러 가는 것이 아니다. 대륙의 운명을 결정지을지도 모르는 결전의 순간에, 고작해야 짐덩이 하나를 데리고 가서 무엇을 어쩌라는 것이란 말인가?
그런데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사실은, 그녀를 제한 다른 사람들은 카인 폰 에스텔이 합류하는 것에 별다른 반대 의견을 표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국의 황녀는 그저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비앙카 델 카스타나는 어딘가 아련한 표정을 지어보였으며, 키리에 엘 데나리스는 재미있다는 듯 살포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무려 3대 1. 다른 사람들이 어떠한 반대 의견을 표하지 않는데 계속해서 안 된다고 우기는 것 또한 웃기는 일인지라, 결국 아리엘 또한 수긍을 해버리고 말았다.
...뭐, 사실 크게 상관은 없는 일이다. 설사 이제와 짐덩이 하나가 늘었다고 한들 아리엘 티에르가 행해야 하는 일은 변하지 않으니까.
또한 정말로 저 남자가 원정에 거치적거린다면,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듣자하니 북쪽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거센 눈보라가 끊임없이 휘몰아치고 갈 길을 잃은 맹수와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배회를 한다던가.
저 남자가 정말 재수가 없어서, 극도의 추위에 몸이 얼어붙어버리거나 혹은 예상치 못한 습격을 받아 죽어버리는 등의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인위적으로 일어나게 하는 방법도 여러 개 있고.
‘예기치 못한 사고’가 일어난다면, 아리엘은 카인 폰 에스텔의 시신을 붙들고 눈물을 흘려줄 자신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정말로 죽기라도 한다면 아리엘이라는 여자는 결국 자신과 같은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어버리고 말았다는 의미가 될 것이니.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의자에 앉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그저, 불행하게도 이번에 그 의자에 앉지 못하게 된 것이 카인이라는 남자가 된 것일 뿐. 그래, 과거의 아리엘의 부모님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모든 사람을 구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걸리적거리는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혹여나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면.
차라리, 그를 여신의 곁으로 보내버리는 편이 세상을 위한 길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아리엘은 이 세상을 구해내야만 하는 성녀이니까. 천상에 거하시는 여신의 의지를 대행하는 지상대리인이니까.
여신께서도, 그녀의 결단을 이해해주실 것이라 믿는다.
원하지 않았음에도 그녀를 강제로 성녀로 만들어버린 여신이시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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