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상실에 걸린 마녀를 주워버렸다-158화 (158/201)

(EP.158)15. 설월화(雪月花) - 05

“아무래도 내가 카인의 아이를 수태(受胎)하게 된 것 같네. 에스텔 공작.”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끝마친 후 에스텔 공작가의 구성원들이 후식을 즐기고 있는 자리에서 아이리스는 사전에 어떠한 예고도 없이 폭탄과도 같은 발언을 내뱉어 버리고 말았다.

“...예?”

황실 예법에 의거한 실로 우아한 자세로 홍차를 홀짝이며, 흡사 방금 전에 먹은 아침 메뉴가 무어냐고 묻는 듯한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의 그 발언에 에스텔 공작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눈이 전부 휘둥그레 변하고 말았다. 물론, 아이리스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으로 홍차를 느긋하게 음미하고 있는 중이었지만.

“...지금 무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까, 저하? 부디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에스텔 공작은 혹시 자신의 귀가 고장이 나버려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말을 더듬고 말았지만, 아이리스는 그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에스텔 공작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살짝하고 끄덕이며 아주 또박또박한 어조로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내 다시 한 번 말해주도록 하지. 지금 내 뱃속에 나와 카인의 아이가 잉태되었다는 말이었네. 기간으로 따지자면 얼추 3개월쯤 되었나. 이미 의사에게 확언을 받은 사항인지라 의심의 여지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군. 장차 에스텔 공작가를 이어나가게 될 새로운 후계자를 얻게 된 것을 축하하도록 하겠네. 공작.”

“...하.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하.”

아이를 가진 임산부 본인으로부터 직접 축하의 말을 듣게 된 에스텔 공작의 머릿속에 서서히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황녀의 말을 간단하게 요약해보자면 현재 그녀의 뱃속에는 아이가 자라나고 있다는 말인 것인가? 그것도 다름 아닌 카인의 아이가?

...그런데 아직 저 둘은 혼인을 하지 않은 상태에 놓여 있지 않았던가? 아직 제국의 법률상 저 둘은 부부 관계가 아닐지 언데, 카인이 황녀 저하를 임신시켰다는 말은 즉-

“...허, 참. 돌아버리겠군.”

에스텔 공작이 자신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카인이 앉아 있는 쪽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한 얼간이가 두 눈을 깜빡이며 멍청한 표정을 지은 채로 황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장면 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토록 눈치 없고, 쑥맥처럼 굴어대어 손주는커녕 장가는 제대로 갈 수 있을까 걱정을 끼치던 저 녀석이 지금 제국의 황녀를 덜컥하고 임신시켰다는 말인 것인가? 그것도 혼전임신으로?

'...대단하군. 폐하께서 혹여나 이 사실을 알게 되신다면 아주 난리도 아니겠어.'

안 그래도 자신의 하나 뿐인 딸을 끔찍하게도 아끼는 황제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카인을 통째로 갈아 마시려고 할지도 모른다. 헌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지금으로부터 삼 개월 전이라 함은 카인이 황녀와 함께 제도로 향하였을 무렵이 아니던가? 제도는 황제의 앞마당인 장소인 만큼 어디에서 무얼 하더라도 황제의 이목을 피하기는 힘들었을 터. 그렇다면 황제는 자신의 딸이 카인과 혼전에 침대 위에서 나뒹구는 것을 허락하였다는 의미란 말인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 사태에 에스텔 공작이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카인과 아이리스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방안의 모두 역시 이렇다 할 반응을 내비추지 못한 채 침묵을 지키고 말았다.

짝, 짝, 짝.

진심으로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다는 듯 활짝 미소를 짓고 있는 키리에의 박수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울리기 전까지는.

“이건 정말로 경사스런 소식이 아닐 수 없군요, 저하. 저는 이 자리에서 당신께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올리고 싶네요.”

그리 말을 하며 키리에는 아리엘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흥미롭기만 하다는 듯 키득키득하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키리에의 시선이 어떠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아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하고 움켜쥐고 말았지만, 아리엘의 그러한 행동조차 키리에에게 있어서는 그저 귀여운 애교로 밖에 비춰지지 않고 있었다.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니 고맙군, 키리에.”

“이런, 그리 응답을 해주시니 조금쯤은 섭섭하군요. 황녀 저하, 이래 뵈도 저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축하를 드리고 있는 중입니다만.”

당연한 말이지만, 키득거리며 그러한 말을 늘어놓고 있는 키리에로부터는 진정성 따위는 요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허나 어찌하겠는가. 본인이 진심이라고 말을 늘어놓고 있는데 거기에 가서 들이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문제는 비단 아이리스와 키리에 뿐만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여인들 사이에서 흐르는 미묘한 기류의 흐름을 읽어낸 에스텔 공작은 그저 신기하다는 눈초리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고 말았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내노라 할 만큼 아름다운 여인들이 대체 뭐가 아쉬워서 자신의 아들에게 저리 매달리는 것이란 말인가? 대체 어찌하여 자신 말고도 다른 경쟁자가 저리도 수두룩한 상태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카인에게 매달리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대체 왜? 무슨 이유로?

‘...설마 무슨 약점이라도 잡은 것인가?’

어찌 보면 자신의 아들이야말로 진정으로 난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카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에스텔 공작의 그러한 시선을 눈치 챈 카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투덜거리고 말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아주 뻔히도 들여다 보이는군요. 아버지께서는 어릴 적부터 제가 멍청한 짓을 저지를 때마다 그런 눈초리로 절 바라보곤 하셨죠.”

“그래, 말 한 번 잘했다. 세상의 어느 부모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란 녀석이 혼전에 여인을 덜컥 임신시켰다는 소식에 박수를 쳐준다는 말이더냐? 혹여 내가 너를 칭찬이라도 해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더냐?”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손주 앞입니다. 최대한 바르고 고운 말만 써주시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제가 여러 가지로 알아 보아하니 나쁜 말은 아이의 태교에 그리 좋지 않다더군요. 식물에게 물을 줄 때도 나쁜 말을 많이 하면 금방 시들시들해지기 마련인데 하물며 아이는 어떠한 영향을 받겠습니까?”

자신을 타이르는 듯한 카인의 조곤조곤한 말투에 에스텔 공작은 끝내 스스로의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이제 보니 에밀리가 너를 가졌을 때 내가 그녀 앞에서 나쁜 말을 아주 많이 했었던 모양이로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네가 이리 될 리가 없는 노릇이거늘.”

“...에스텔 공작. 그대만큼은 조금 진정을 되찾아줄 수는 있겠는가. 아직 그대에게 할 말이 몇 개 정도 남아 있으니 말일세.”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스스로의 이마를 한 차례 매만지던 아이리스는 자신의 아랫배를 한 차례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내 밤새 고민을 조금 해보았는데, 제도에 돌아가 아이를 출산하기보다는 이곳에서 아이를 낳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네.”

“...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이리스의 말에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에스텔 공작과 카인의 눈이 저절로 휘둥그레 변하고 말았다.

새삼스러운 말이긴 하지만,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라고 하는 여인은 제국에 단 하나 밖에 없는 황녀인 동시에 유력한 제위의 계승권자. 즉, 차기 황제가 될 것이 거의 확실시 된 신분의 여인이다.

제국에서 가장 존귀한 혈통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녀가 장차 출산하게 될 아이 또한 자연스레 황실의 일원으로 편입이 될 터.

그런데 지금, 아이리스는 자신의 아이를 황족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에스텔 공작가의 일원으로 만들겠노라고 선언을 한 것이었다. 제도가 아니라 에스텔 공작령에서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면, 그 아이는 명목상이나마 황실보다는 에스텔 공작가와 더 깊은 관련성을 가지게 될 테니까.

“...정녕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알게 되신다면 무척이나 진노하시게 될 텐데 말입니다.”

자신의 손주가 황실이 아닌 에스텔 공작가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무척이나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제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는 에스텔 공작은 걱정이 되는 눈초리로 아이리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손이 귀하기로 유명한 황실에서 과연 카인과 아이리스의 아이를 순순히 에스텔 공작가의 일원으로 놔둘 가능성은 아무리 살펴 보아도 희박하기 그지 없었기에.

“폐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일세, 에스텔 공작.”

아이리스는 일고의 망설임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말을 하였다.

“현재 나의 이름은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이긴 하지만, 조만간 아이리스 폰 에스텔이라는 이름으로 바뀔 예정이 아니던가. 나는 내가 낳게 될 아이가 황실의 일원이 아닌, 에스텔 공작가와 카인의 후계가 되기를 바란다네. 왜냐하면, 이 아이는 나와 카인 사이의 아이임이 분명하니 말일세.”

아이리스 폰 에스텔.

아이리스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을 듣자마자, 옆에 가만히 있던 아리엘은 심장이 그대로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 때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고 말았다-

- 아리엘 폰 에스텔. 그것이 제 새로운 이름이로군요.

- ...폰 에스텔이라고 해봐야, 더 이상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이름에 지나지 않지만.

- 그럴 리가 있나요.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죠. 왜냐하면 제 성과 당신의 성이 똑같게 되었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제게는 정말로 커다란 가치가 있는 것이랍니다.

-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티에르라는 성도 꽤나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 티에르는 성이 아니에요. 그것은 그저, 칭호에 지나지 않아요. 대대로 성녀에게만 주어지던 칭호이지만, 제게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칭호이기도 하죠. 그러니 저를 아리엘 폰 에스텔이라 불러주세요. 앞으로 평생 동안. 쭈욱.

- 앞으로 질리도록 듣게 살 이름인데,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닌가?

- ...평생이라. 정말로 평생, 그 이름을 가지고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리엘의 눈앞이 흐릿해지고 말았다. 부지불식간에 그녀를 덮친 아찔함에, 그만 몸을 비틀거리고 말았다.

- 걱정 하지 마, 아리엘 폰 에스텔.

어색하고 뻣뻣하지만, 동시에 그녀를 따스하게 감싸주던 그 때의 그를 떠올리고 말았다.

- 너를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불러줄 테니 말이야.

“...에, 엘레나.”

아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와 에스텔 공작가에서 가장 친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엘레나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엘레나를 찾아 손을 더듬더듬 거리고 말았다. 누구라도 좋으니, 지금 이 순간 자신의 편이 되어줄 아군이 곁에 있어주기만을 바라였다.

...하지만, 엘레나는 이미 아리엘의 곁에 존재하지 않았다.

“...시, 실례하겠습니다. 저하.”

엘레나는 이미 호기심 어린 얼굴을 한 채로, 아이리스의 앞에 서 있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엘레나.”

엘레나를 눈앞에 두고 있는 아이리스의 얼굴과 말투가, 마치 거짓말처럼 삽시간에 온화한 태도로 변화하고 말았다.

“...저,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하의 배를 한 번만 어루만져 보아도 괜찮을까요?”

자신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엘레나를 눈앞에 두고, 아이리스는 그녀가 귀엽다는 듯 피식하고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대라면 얼마든지.”

아이리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엘레나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아이리스의 아랫배에 스스로의 손을 가져간다. 아주 조심스럽고, 아주 부드러운 태도를 유지하며, 엘레나는 그녀의 배를 조심스레 문지른다.

“...신기하네요. 여기에 오라버니와 저하의 아이가 자라나고 있다니.”

“그리고 그대의 조카이기도 하지. 뱃속에 있는 아이도 고모가 자신을 매만져주었다는 사실을 알면 무척이나 기뻐할 것일세.”

“저, 정말인가요?”

“아, 그리고 엘레나 그대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네만.”

“부탁이라니요. 하명이라고 하세요, 저하.”

주먹을 꼭 쥐며 그리 답을 하는 엘레나의 모습에 아이리스는 흐뭇한 태도로 그녀를 바라본다.

“나를 아이리스라는 이름으로 불러줄 수 있겠나, 엘레나?”

아이리스의 그 말에, 엘레나는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며 손사래를 치고 말았다.

“제, 제가 어찌... 황녀 저하의 존함을 함부로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에요. 부디 말씀을 거두어주세요.”

“미안하지만, 나는 그대가 나를 이름으로 불러주기를 희망한다네.”

그리 말을 하며 아이리스는 엘레나의 손을 꽉 하고 붙잡았다.

“우리는 장차 한 가족이 될 사이가 아닌가? 그런데 같은 가족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면 과연 그것을 가족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이리스의 말에 엘레나는 감동을 받은 듯 눈을 초롱초롱 빛내자, 이를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카인은 자그마하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엘레나, 저하와 나는 아직 혼인을 치른 상태가 아니니 저하의 존함을 함부로 불러서는 아니 된단다. 저런 얕은 속임수에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된단다.”

“실례로군, 카인. 나는 어디까지나 선의에 의거하여 미래의 아가씨에게 한 가지 제안을 던진 것에 지나지 않네만.”

카인과 아이리스는 웃는 얼굴로 서로를 향해 농담을 던진다. 그것은 실로, 그림으로 그린 것만 같은 화목한 분위기임이 틀림없었다. 그러한 전체적인 광경을 흐뭇하게만 지켜보던 카인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며 급하게 자신의 뒤편을 돌아보고 말았다.

그들을 바라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비앙카.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아리아.

얼마 전부터 왠지 모르게 침울한 기색을 유지하고 있는 사라.

아까부터 의미 없이 싱글벙글 웃고만 있는 키리에.

그리고-

“...어?”

그 어디를 둘러보아도, 아리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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