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6)15. 설월화(雪月花) - 03
“그럼 카인, 오늘은 이만 밤이 많이 늦었으니 내일마저 이야기하도록 하죠. 카인의 말마따나 길 한복판에서 서로를 붙들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꽤나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으니까요. 적어도, 지체 높으신 후작가의 마법사 분이나 혹은 황녀님께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 되는군요.”
그리 말을 하며 키리에는 내 옆에 서 있는 아이리스나 비앙카를 향해 살짝 눈웃음을 지어 보인다.
“어차피 우리에게 남는 것은 시간 밖에 없으니까요. 고작해야 이 자리에서 이야기 몇 마디를 나누지 못했다고 해서 섭섭해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 되지 않나요?”
지금 이 순간 키리에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아이리스가 못 알아 들을 리가 없었기에 그녀의 고운 아미가 살짝하고 찌푸려지고 만다. 물론, 키리에 본인은 그 어떠한 의도도 가지지 않은 채 내뱉은 말에 불과하였으며.
그러한 사실은, 아이리스 있어 한층 더 질이 나쁜 이야기로 밖에 작용하지 않았다.
물론, 아이리스가 자신을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건 간에 키리에의 얼굴은 그저 여유롭기만 하다. 애당초, 하루살이가 자신에게 뭐라 중얼거린다 할지라도 진심으로 화를 내는 인간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눈 깜빡할 사이에 세월에 흐름에 이기지 못하고 추한 모습을 보이게 될 인간들을 어찌 두려워할 수가 있을까? 애당초 상대조차 되지 않는 게임에 불과하거늘.
뭐, 사실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상당히 즐거운 일이겠지만 오늘 밤은 이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아무리 최근 스스로의 삶이 무료하였다고는 하지만 하룻밤 사이에 너무 많은 즐거움이 생긴다면 훗날의 즐거움이 줄어들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키리에의 시선이 아이리스를 한 차례 살그머니 향하더니 이내 그녀를 향해 의미 모를 웃음을 지어 보인다. 흥미롭다. 이런 일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거늘.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정말로 흥미로운 일임이 분명하다. 역시, 세계수 곁을 떠나 에스텔 공작가에 당도한 보람이 충분하다-
“그럼, 내일 보도록 해요. 나의 정혼자, 카인 폰 에스텔. 부디, 우리에게 어제와 똑같은 내일이 찾아오기를 기원하며.”
실로 여유로움이 넘치는 그 말과 함께 키리에는 마치 무도회장에서나 선보일 법한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동작으로 나를 향해 살짝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하더니 이내 사뿐사뿐한 발걸음으로 우리에게서 눈 깜짝할 사이에 멀어져 갔다.
“...기분 나쁜 여자야. 예나 지금이나.”
키리에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뒤, 그녀에 대한 실로 솔직한 감상을 중얼거리는 이는 아니나 다를까 스스로의 삶 속에서 언제나 후퇴라고는 없는 직진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비앙카였다.
“아주 옛날부터 생각해온 건데, 엘프라는 것들은 죄다 정신이 나간 것들임이 틀림없는 거 같아. 음흉하고, 속내를 알 수가 없고, 언제나 웃는 낯으로 인간을 대하는 꼴이 마치 뱀과 같다 생각되지 않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또 다시 화가 아주 많이 난 것 같은 비앙카의 말을 나는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가볍게 흘려내었다. 애당초, 이 세상에 비앙카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 존재하기는 한 것일까 라는 사소한 의문이 들고 말았기에.
"그럼, 저희도 이제 그만 해산하도록 하죠. 방금 전 키리에의 말처럼, 밤이 늦은 것은 사실이니까요. "
내 말에 주위에 있던 여인들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한 말이지만, 늦은 밤이라고 해서 이 여자들을 자신들의 방까지 바래다줄 필요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애당초, 나보다 훨씬 강한 여자들인데 누가 누구를 바래다 준다는 말인가. 분수도 모르고.
지금 이 자리에서 나보다 명백히 약하다고 할 수 있는 여인은 오직 한 명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사라. 혹시 너만 괜찮다면..."
너와 내 방은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네 방 근처까지 내가 바래다주겠다, 라는 말을 하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은 순간-
탁-
“...사라?”
방금 전까지 멍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사라는, 자신을 향한 나의 손길을 탁하고 뿌리쳤다. 마치, 닿아서는 안 되는 것과 스스로의 손을 마주한 것 같은 거부감과 죄책감을 스스로의 얼굴에 가득 담아낸 채로.
“...아.”
순간,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사라에게로 쏠리고 말았다. 사라 본인조차 스스로가 이리 행동을 할지는 몰랐는지, 방금 전 나의 손길을 뿌리친 자신의 오른손을 멍하니 바라보고 말았다.
“...소, 소공작님...”
사라는 자신의 오른손을 멍청하게 쳐다보더니, 이내 왼손을 들어 오른손을 살그머니 감싸 안았다. 그녀의 오른손은, 아주 미약하지만 확실하게 벌벌 떨리고 있는 중이었다.
“전, 그러니까 저는... 그리고 이건, 그러니까-”
도저히 알아듣지 못할 말을 늘어놓던 사라가 나와 시선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 순간, 사라의 얼굴이 다시 한 번 뒤바뀌고 말았다.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에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꼴사납고 연약한 얼굴로. 그녀는 스스로의 두 눈을 질끈하고 감더니, 이내 고개를 황급히 아래로 내린다.
“...죄.”
사라가 스스로의 입술을 달싹거린다.
“...죄, ...죄, ...죄, 소-”
그녀는 흡사 고장 난 오르골처럼 필사적으로 같은 말을 반복하더니, 이내 한 차례 숨을 헐떡인다. 사라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에게는 그 말을 내뱉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고하는 것 마냥.
“...소, 공작님. 저는-”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사라는 스스로의 입술을 질끈하고 깨물더니, 이내 나에게서 등을 돌려 어딘가로 뛰어가 버리고 말았다.
...마지막 순간, 나는 그녀의 눈가에 맺혀 있는 무언가를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사라.”
나는 등을 보인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 하였지만, 이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스스로 나와 얼굴을 마주할 때까지, 결코 그녀에게 손을 뻗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대체, 왜...”
내가 망연한 표정으로 사라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그 때까지 줄곧 얌전히 있던 아리아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내게 이리 중얼거렸다.
“지독한 악몽이라도 꾸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아니라면, 조만간 악몽을 꿀 예정이라던가.”
****
...사라는, 지금 이 순간에도 똑똑히 기억해 낼 수 있다.
사라 세르나드라고 하는 여인은, 세르나드 백작가에서 만들어낸 하나에 도구에 불과한 인생을 살아오고 있었다.
에스텔 공작가의 소공작, 카인 폰 에스텔과 약혼을 맺은 것도.
카인 폰 에스텔과의 약혼을 파하자마자 그 뒤를 이어 투르니젠 소공작과의 약혼이 점지 되었던 것도.
때 마침 소공작이 투르니젠 공작가에 존재하지 않자, 목표를 바꾸어 데카라즈난 공작가로 파견이 된 것도 전부-
그녀의 의지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영역에서 일어난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가문의 누가 내렸는지도 알지 못하는 지시에 순응하여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였으니까.
...애당초, 스스로의 삶 속에서 그녀가 자유의지를 가졌던 적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었지만.
원치 않는 약혼, 원치 않는 결혼, 원치 않는 사랑-
그녀의 인생 속에서는 온통, 원치 않는 것들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점차 익숙해져갔다. 괴로움을 참는 것도, 원하지 않는 일을 스스로의 손으로 자행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모래성 같은 행복도, 전부 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수도 없이 상상을 해왔었다. 세르나드 백작가라고 하는 아주 높고 견고한 성에 갇혀 있는 자신을, 누군가가 구원해준다는 달콤한 상상을.
...허나, 상상은 언제나 상상으로 끝이 났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구원해주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아픔을 알아차려 주지 못했다. 스스로의 아픔은, 언제나 오롯이 자신만의 것이 될 뿐이었다.
그런데 데카라즈난 공작가에서, 그녀가 그간 줄곧 바래온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말았다.
누군가가, 정말로 자신의 아픔을 알아차려 주었다. 누군가가, 정말로 자신을 대신해 화를 내주었다. 누군가가, 그러한 자신을 구해주고 그녀를 옭아매고 있는 저주를 풀어주겠노라고 다짐하기까지 해주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끝내 자신을 구원해주었다.
그녀의 인생 속에서 악몽으로 군림해온 숙부를 죽이고, 언제나 그녀의 주위를 맴돌던 사냥개들을 모조리 해치우고, 세르나드 백작가 그 자체를 적으로 돌려가면서까지.
자신을 지키고, 감싸 안아 주겠다고 했던 남자가 있었다.
그의 그러한 모습에 난생 처음, 가슴이 거세게 두근거리고 말았다.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철없는 소망이 현실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감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렇기에,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가 자신의 편이 되어 자신을 구해주고, 나를 새장 안에서 꺼내주었던 것처럼.
나 또한, 약소하게나마 너라는 사람의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품게 된 소망이 어처구니 없는 소망이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그녀는 스스로의 마음을 포기하였다. 아니, 포기하였다고 생각했다.
비록 네 곁에서는 서는 것이 허락되지 못할 지라도, 멀리서나마 네가 행복한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싶었다.
분명 사라 세르나드에게는, 어떠한 종류의 특별한 힘도 갖추어져 있지 않다. 그의 주위에 있는 다른 여인들처럼, 어떠한 형태로든 그의 힘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그에게 막대한 민폐만을 끼쳐온 몸이었다.
하지만 설사 자신에게 그런 특별한 힘이 없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형태로든 그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랄 나위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곁에서 그를 보좌하며 그를 도와나간다면, 언젠가 자신이 받은 이 은혜를 보답하는 길이 되어줄 것이라 굳게 믿음을 가져 왔었지만-
이제는 전부, 모든 것이 자신의 어처구니가 없는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사라 세르나드가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남자에게, 얼마나 잔혹하게 굴어 왔고.
세상 어느 누구보다 세르나드 백작가를 혐오한다고 생각해왔던 주제에, 실은 사람을 가치로서 판단하는 그들의 시야를 세상 어느 누구보다 훌륭하게 답습하고 있었으며.
그가 쓸모없다는 사실이 판명 되자마자, 아무런 망설임조차 없이 다른 남자와 혼인을 선택한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역겨워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사라 세르나드가 카인의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가 그저 어리석은 자의 기만에 지나지 않으며.
그의 힘이 되어준다며 굳게 믿음을 품어왔던 이 마음의 정체가 실은 거짓으로 점철된 이야기에 불과했다는 것이, 너무도 싫었다-
- 이제 황녀님께서 너를 그토록 싫어했던 이유를 알 수 있겠니? 그 여자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만큼 타인에게도 엄격하기 그지없지. 그 여자가 바라보기에, 너는 그저 화대(花代)를 받고자 하는 여자로만 비춰졌을걸. 한 번 그의 곁을 떠나갔던 주제에, 다시금 그의 애정을 받고자 자비를 애걸하는 네 꼴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야.
키리에의 말은 날카롭지만, 분명한 사실이었던지라 그녀의 심장을 차갑게 움켜쥐고 말았다.
- 흔히들 말하지, 부모의 잘못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잘못에 지나지 않다고. 아이에게까지 부모의 잘못을 전가시키는 것은 잘못된 일임이 틀림없다고.
- 그런데 말이지, 이미 지나가버린 미래 속에서 벌어진 본인의 잘못은 도대체 누가 책임을 져야하는 것일까.
- 맞아. 너는 억울하겠지. 네게는 그 어떠한 기억도 존재하지 않고,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네가 저지른 일로 인한 피해자가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이잖아? 그래도 너는, 끝까지 스스로의 무죄를 주장할 수 있을까?
...가슴이 아프다. 키리에의 말 때문이 아니라, 그 말에 도저히 반박을 할 수가 없는 자기 자신의 추한 모습이 사라의 마음을 찢어놓고 있었다.
자신은 과거 그토록 그의 마음을 부숴버렸는데.
자신은 또다시 그에게 징징거리는 소리를 해서, 끝내 그의 도움을 받아 행복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저 슬프기만 했다.
나라는 여자를 가까이서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아플 것이 틀림없을 텐데도,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어주는 네 모습이 나는-
- 많이 아프니? 너무 많이 아파, 이제는 모든 것에서 눈을 돌리고 싶어졌니? 만약 도망치고 싶다면, 네게 줄 수 있는 선물이 하나 있는데 말이지.
그리 말을 하며, 키리에는 사라에게 나뭇가지를 하나 내밀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나뭇가지. 여타 나뭇가지처럼 끝부분이 뭉툭한 것이 아니라 뾰족하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라면 특이한 점이었다.
-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깎아 만든 단검이란다. 그걸 스스로의 심장에 꽂아 넣는다면, 아프지 않게 죽을 수 있어. 그것이 바로 내가 네게 베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란다.
그리 말을 하며 키리에는 스스로의 심장에 무언가를 꽂아넣는 시늉을 한다.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음을 짓는 키리에의 모습은 지극히 성스러워, 어떠한 삿된 의도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만 한다.
- 아, 참고로 사용하고나면 내게 돌려주는 거 잊지 말고. 원래 남에게 빌린 물건은 다 쓰면 반납하는 것이 예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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