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5)15. 설월화(雪月花) - 02
그리하여, 야심차게 기획되었던 한 밤 중의 달구경은 갑작스럽게 자리를 파하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애당초 한 때의 기분전환을 위해 모두와 함께 달구경을 나온 것이었다만, 이래서야 더 이상 이 자리를 유지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모두가 방금 전처럼 화기애애하게 도시락이나 나눠 먹으며 달구경을 할 기분이 아닌 듯 보이거니와, 무엇보다 모든 여인들을 조율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나부터가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카인. 자네의 기분은 충분히 이해하겠네만, 조금쯤은 진정을 해주면 좋겠군.”
아이리스조차 무언가 살짝 질린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그러한 말을 늘어놓았지만, 불행하게도 그녀의 말은 내 귀에 잘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다지 커다란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 어떠한 사람일지라도 냉정을 유지하고 침착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무언가, 굉장히 들뜬 기분이다. 싱숭생숭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흡사 구름 위쪽을 걷는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꿈과 같이 느껴지는 듯한 기묘한 기분.
그리고 매우 신기한 기분이기도 하였다. 현재 내 육체적 나이만 따져보자면 고작해야 이십대 초반에 지나지 않는데, 이토록 어린 나이에 누군가의 아빠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였으며.
...동시에, 겉으로 보자면 그저 아름다운 미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아이리스가 이제는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신기하게만 느껴진다.
그녀의 뱃속에, 나의 아이가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믿기지가 않는 사실이고.
“...카인, 뭘 그리 자꾸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인가. 할 말이 있으면 내 눈을 보고 똑바로 해주게나.”
“아뇨, 별 건 아니고...”
나는 아이리스의 힐난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달구경을 하기 위해 이곳에 올 때만 하더라도 저희 일행이 다섯 명이라 생각 했는데...”
“...다섯이라 생각했는데?”
“내려올 때는 여섯 명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 꽤나 신기하게 느껴져서 말입니다.”
나의 멍청하게까지 느껴지는 중얼거림에 아이리스는 재미있다는 듯 쿡쿡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그건 또 무슨 괴상한 헛소리란 말인가. 자네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오니 꼭 괴담 같지 않은가.”
“저는 이런 종류의 괴담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하는 바입니다만.”
나의 너스레에 아이리스는 한 순간 내 얼굴을 멍청히 바라보더니 이내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인다.
“오늘따라 혀가 꽤나 잘 돌아가는군. 평상시에는 그리 눈치 없고 답답하게 굴더니, 지금 보니 여인을 향해 번지르르한 말도 던질 줄 알았던 모양이야.”
“그보다, 눈앞의 위험을 조심하시는 것은 어떠하십니까. 저하.”
“뭐?”
퍼석-
아이리스에게서 당혹성이 흘러나오기에 앞서, 나는 아이리스가 향하고 있던 앞쪽 길에 툭하고 튀어나와있던 뾰족한 나뭇가지를 ‘흐르는 별’로 부숴버렸다.
“이제 홀몸이라 하실 수 없는 몸인데 정신을 똑바로 차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시 뱃속에 들어 있는 아기한테 무슨 피해라도 갔으면 어떻게 하려고.
“...허.”
아기와 산모, 둘 다 위험했을지도 모르는 긴박한 순간에 내가 자신을 구해주었음에도 나를 바라보는 아이리스의 표정은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군. 카인, 나는 아이를 가진 것인지 중환자가 된 것이 아니라네. 애당초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육신이 고작해야 나뭇가지 따위 때문에 해를 입을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뱃속의 아이가...”
나의 말에 아이리스는 침음성을 흘렸다.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인가. 이제 보니 자네는 애를 낳으면 안 되는 타입의 인간이었군. 벌써부터 이리 호들갑을 떨어대는데 나중에 아이가 세상에 나오기라도 하게 된다면 정말 가관도 아니겠군. 벌써부터 정신이 사나워질 것만 같으니 제발 입 좀 다물고 있게나.”
“.....”
아이리스의 그러한 말에 내가 조개 마냥 입을 다무니, 지금까지 줄곧 침묵을 지켜오던 비앙카가 갑자기 나의 옆구리를 쿡쿡하고 찔러온다. 사회적 약자를 비난하는 듯한 그녀의 눈초리에 어쩐지 가슴이 아파오는 것만 같다.
“저하의 말씀이 백 번 옳아. 넌 제발 우리를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얌전히 있기나 해. 네가 옆에서 꼴값을 떨면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하니까. 아빠가 되었다니 기분이 좋은 건 이해하겠는데, 그걸 마냥 기뻐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쯤은 신경 써줘야 하지 않겠어?”
비앙카의 말을 얌전히 듣고 있자니, 아까 전부터 아무 말 없이 우리의 뒤를 따르던 아리엘이 무언가 몸을 꿈틀하고 움츠리는 광경이 나의 눈에 들어오고 말았다. 아무래도, 방금 전 아이리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던 말이 아리엘의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를 자극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하지만 나는 아리엘의 그러한 모습을 필사적으로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그녀와 함께 무언가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으니까.
“...고맙다, 비앙카.”
“뭐가?”
“...그냥. 오늘 따라 여러 가지로 많이 신경을 써줘서. 그러니까, 그...”
설마 네가 다른 여자들의 안위까지 챙겨줄 만큼 그리 상냥한 여자였다고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다, 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기에 내가 그저 우물쭈물 거리고만 있자, 비앙카는 그러한 나를 바라보며 피식하고 웃음을 지어 보인다.
“넌 내가 그리도 몰상식하고 성격 나쁜 여자인 줄로만 알았나보지?”
“.....”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런 줄 알았다. 내가 알고 있는 마법사란 인종들이란 원체 제정신인 인간이 극히 드물었으니까. 물론, 아리아는 예외 중의 예외라고 할 수 있었다.
“뭐, 네 생각이 맞긴 해. 나는 그리 좋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말이지, 이런 나라도 올바르다고 믿고 있는 것이 딱 하나 있어.”
“...그게 뭔데?”
“알고 있니, 카인? 이제 와서 네게 고백하는 것이다만, 나는 부모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몸이거든. 아니, 애당초 나에게 부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었지. 아직도 똑똑히 기억할 수 있어. 내가 세상에 태어나 버린 직후, 아등바등 거리는 나를 그저 싸늘하게만 바라보던 ‘아버지’라는 사람의 시선을. 당신이라는 사람을 향해 그토록 애정을, 온기를, 사랑을 갈구하였음에도 끝끝내 나를 외면하였던 그 사람의 얼굴을, 나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할 수 있어.”
“.....”
비앙카는, 스스로의 팔을 꽉 하며 붙잡으며 내 얼굴을 바라본다.
“아무도 나를 구해주지 않았고, 나를 사랑해주지 않았어. 나는 말이지, 그게 정말로 슬펐어. 나는 이렇게 괴로움을 쌓아 올리는 이야기를 자아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이런 비참한 끝을 맞이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고 말았어. 그래서 결심했지. 나는 두 번 다시, 나와 같은 괴로움을 겪는 아이가 없었으면 한다고.”
“그리고 다짐했어. 만약 내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 아이만큼은 나와 같은 아픔을 겪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과 희망으로서 그 아이를 감싸주겠노라고. 삶이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오직 아름다운 것만을 보여주겠노라고. 설사 나의 아이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오직 나만큼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의 편이 되어주겠노라고.”
생명이란 하나의 꽃과 같은 것. 삶의 길에 끝에서 다시 돌이켜 보자면 그 여정은 부질없는 것이었다고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여정 그 자체에 어떠한 의미도 존재하지 않을 리가 없다.
방금 전의 그 말은, 비앙카 델 카스타나라는 여자에게 있어 어떠한 의미를 담아내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니 나는 정말로 괜찮아. 세상의 모든 아이는 축복을 받으며 자라날 권리가 있으니까. 또한, 장차 저하가 낳게 될 아이는 엄연히 네 아이이기도 하잖아? 그러니 나 또한, 분명 그 아이를 애정으로 감싸 안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비앙카의 말에 나는 아주 자그마하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왠지 모르게, 비앙카에게 몹쓸 짓을 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고 말았다.
“...미안하다. 비앙카.”
나의 사과에, 비앙카는 진심으로 별 일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좌우로 내젓는다.
“뭐가 미안해. 너는 나한테 미안해 할 것 하나 없어. ...아, 생각해보니 미안해 할 게 하나 있긴 하네.”
“그게 뭔데?”
“분명 첫 경험은 나하고 한 것 같은데 정작 첫 임신은 황녀님께서 먼저 하셨잖아. 카인, 황녀님께는 너무 많이 힘을 준 거 아니야? 아니면 나와 할 때는 일부로 힘을 빼고 했다던가?”
그리 말을 하며 비앙카는 마법을 사용해 내 머릿속에 직접 메시지를 전달한다.
- 나는 정말로 괜찮으니까, 우리 황녀님이나 잘 보살펴드려. 원래 여자가 임신했을 때 조금이라도 소홀히 대한다면, 훗날 부메랑처럼 몇 배로 되돌아오게 되기 마련이니까.
겉으로 보기에, 비앙카의 모습은 여느 때와 같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히려 나를 향해 아이리스를 신경 쓰라고 조언을 해주기도 할 만큼 신중한 모습까지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없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다른 여자가 먼저 임신하였다고 하는, 금방이라도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한 기가 막힌 상황이다. 비앙카는 그저, 나를 향해 배려를 해주고 있는 것이다.
새삼스레 깨닫고 말았다. 나의 주위에는, 나도 깨닫지 못한 사이에 이토록 애정이 넘쳐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비록, 내게 있어 과분하다 못해 압사할지도 모르는 무거운 사랑이라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기는 하였지만.
그렇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산에서 내려오니, 에스텔 공작가의 후원 한 가운데에 키리에와 사라가 서로를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광경이 나의 눈에 들어오고 말았다.
“...선약이 있다더니. 사라 세르나드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던 것인가. 참으로 별 일이 아닐 수 없군.”
그 둘을 쳐다보며 신기한 듯 중얼거리는 아이리스의 혼잣말에, 나 또한 내심 동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사라와 키리에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조합이 아니던가. 그런데 저 둘이 따로 약속을 잡고 이야기를 나눌 만큼 친한 사이였다고는 전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어라, 카인이 아닌가요? 이제 달구경을 끝내고 돌아오시는 길인건가요?”
그제야 우리를 발견했는지, 키리에가 내 쪽을 바라보며 활짝하고 미소를 지어 보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늘의 키리에는 어쩐 일로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 보이는 것처럼 보인다.
“예, 뭐. 모두와 재미있게 잘 놀다온 것 같습니다.”
“재미있으셨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그냥 모두와 함께 달구경이나 갈 것을 그랬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조금 일찍 내려오신 것 같은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것인가요?”
키리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리 질문을 던지자, 나는 쓴웃음을 던지며 질문을 무마하였다.
“나중에 차차 설명을 해드리죠. 길거리에서 키리에를 붙잡고 할 이야기는 아닌 듯 싶으니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마주하는 사람마다 상황을 설명하려 한다면 오늘 밤을 새는 것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차라리, 내일 모든 사람을 모아놓고 한 번에 설명을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키리에. 키레에야말로 사라와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입니까?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십니다만...”
나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키리에는 방금 전보다 더욱 활기찬 미소를 지으며 이리 답을 하였다.
“그냥, 여자들끼리의 조금 비밀스런 대화를 좀 나누었죠. 원래 비밀이 있는 여자가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기 마련이잖아요? 굳이 여자에게서 그런 것을 캐내려고 하는 남자는 멋이 없기 마련이랍니다.”
“...흐음.”
키리에의 대답에 나는 반사적으로 사라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사라 또한 평소보다 얼굴이 약간 창백한 것과 이상한 나뭇가지 하나를 손에 들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별 다른 일이 없어 보였기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무래도, 키리에의 말은 전부 사실인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다행이로군요. 덕분에 마음을 한결 놓았습니다. 키리에는 인간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단 둘이서 이야기를 나눌 만한 친구도 사귀게 된 것 같군요.”
“...친구요? 그녀가, 제 친구요?”
나의 말에 키리에는 무언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자신의 고개를 아주 약간 갸웃거리더니, 이내 지금까지 없던 아름다운 미소를 활짝 머금으며 내게 이리 말을 하였다.
“맞아요, 카인. 당신의 말이 옳아요. 사라는, 정말로 저의 절친한 친구임이 틀림없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