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상실에 걸린 마녀를 주워버렸다-153화 (153/201)

(EP.153)14. 미련의 끝 - 16

꿈을, 꾸었다.

육안으로는 도저히 확인할 수 없는 아주 가느다란 끈을 타고, 도저히 알 수 없었던 누군가의 기억을 엿본다.

이것은, 그녀의 기억이 아니다.

이것은 그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꿈이기도 하다.

이제는 아무것도 뒤바꿀 수 없는, 애달픈 이야기의 말로.

돌아오는 길을 찾을 수가 없는, 미련의 끝.

때는 바야흐로 봄의 끝자락. 그와 그녀의 최초의 만남은, 에스텔 공작가 후원에 위치한 자그마한 화단에서 비롯되었다.

비록 천 년에 달하는 역사와 전통을 지니긴 하였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4대 공작가의 말예(末裔)를 자칭할 수조차 없이 영락하고 쇠해버린 에스텔 공작가와, 대륙 전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부를 일구었지만 동시에 천한 장사치 출신이라 경시를 받는 세르나드 백작가 사이에 약혼이 성사되었다.

두 가문의 수장은 이번 약혼이 서로가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였기에 이번 약혼을 수락하였으며, 이에 따라 약혼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두 아이는 약혼자의 예로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스텔 공자. 사라 세르나드라고 합니다.”

무수한 꽃들이 흩날리는 화원의 한 가운데, 흡사 인형과도 같이 오밀조밀한 아름다움을 갖춘 여자아이가 그를 향해 살며시 인사를 올렸다.

어디선가 바람이 살며시 불어오는 것과 동시에, 여자아이의 금발이 바람에 살짝 나부낀다. 화원은 마치 그녀의 모습을 본뜬 듯, 일찍이 지녔던 싱그러움을 물씬하고 풍긴다. 여자아이는 그저 그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모든 이들의 찰나를 영원으로 만들만큼의 아름다움을 내포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카인은 그렇다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아.”

볼썽 사납게도 그는 여자아이의 외모를 넋을 놓고 바라보고 말았다.

단순히 여자아이, 그러니까 사라 세르나드가 아름다워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사라는, 웃고 있지 않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라는 그를 바라보며 싱긋하고 미소를 짓고 있기는 하였지만 카인이 보기에 그것은 자연스런 웃음이라 할 수 없었다.

...마치, 인형이 사람의 미소를 따라하면 저런 표정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생기가 보이지 않는 얼굴.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카인은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앞으로 자신의 약혼녀가 될 저 사라라고 하는 아이는, 자신을 향해 어떠한 감정도 품고 있지 않는 중이라고.

자신을 좋아하는 것도, 억지로 약혼을 하게 되어 기분 나빠 하는 것조차 아니었다. 그저, 가문이 시키니까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 자리에 나와 그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아마, 웃으라는 말을 들었기에 지금 내 앞에서 웃고 있는 것이 분명하겠지.

...왠지 모르게, 그것이 싫었다. 그녀는 어째서 웃고 있지 않는 것일까.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아도 저리 예쁜데, 만약 웃음을 짓는다면 얼마나 환한 웃음을 지어줄까.

비록 어린아이의 치기에서 비롯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먼 훗날 자신과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저 여자아이를 진심으로 미소 짓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의 약혼녀이며.

나는 난생 처음 마주한 그녀의 외모에 첫 눈에 반해버리고 말았으니까.

이러한 감정을 가슴 속 한 구석에 새겨 넣으며, 그는 호흡을 가지런히 하며 정교한 인형을 쏙 빼닮은 자신의 아름다운 약혼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카인, 카인 폰, 에스텔이라 합니다. 세르나드 영애.”

그것이 그의 첫사랑이었다.

돌이킬 수 없고, 잊어버릴 수도 없는, 가련한 비탄의 시작이었다.

시간이 흐른다.

그들이 약혼이라는 명목 하에 하나로 묶이게 된 이후.

카인 폰 에스텔과 사라 세르나드는 처음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였을 때보다는 훨씬 가까운 사이가 되고 말았다. 분명, 세월의 흐름 속에서 서로 간에 마음을 열게 된 것이 틀림없겠지.

둘은 때때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아침에는 무엇을 먹었는지, 최근 들어 어떤 기분 좋은 일이 있었는지, 어떠한 취미를 붙이게 되었는지-

아무래도 좋은 시시한 이야기를, 잔뜩하고 나누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이상의 관계로는 나아가지 못하였다. 아니, 나아갈 수가 없었다. 사라는, 그 이상으로 서로의 관계가 진전이 되는 것을 꺼려하고 있었다.

카인의 앞에서 티를 내지는 않고 있지만, 사라 세르나드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자신이 처한 처지를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가문에서 공들여 빚어낸 상품. 자유 의지라고는 가지지 못한 정교한 인형.

카인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으며, 언젠가 자신과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금세 눈치 채었지만,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사라는 카인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사랑을 알지 못한다. 남자를 유혹하고, 휘어잡기 위한 기교라면 잔뜩 익힌 몸이지만, 정작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알고 있지 못한다. 지금 카인에게로 향하고 있는 자신의 감정이, 대체 무엇을 뜻하고 있는 것인지 사라는 알 수가 없었다. 아니,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두려웠다는 것이다. 애당초 그녀는 이 약혼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애당초 세르나드 백작가는 약혼이라는 명목 하에 '무언가'를 확인하려고 에스텔 공작가에 접근한 것일 뿐. 그들과 진정으로 혼인을 맺고자 사라를 이곳에 보내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와 함께 하는 이 시간이 언젠가 무의미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사라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 무의미하다.

만약 정말로 자신이 카인을 사랑하게 될 지라도, 필경은 어떠한 의미도 남기지 못한 채 모든 것은 산산이 흩어져버리게 되고 말 것이다. 파경(破鏡)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상태였으니까.

그러니 어떠한 감정도, 미련도 남겨서는 아니 된다. 사랑은, 더더욱 아니 될 말이다.

어느 누군가가 자신을 이 지옥에서 꺼내주지는 않은 한, 나는 도저히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 노릇이니.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며, 사라는 지그시 눈을 감고 말았다.

그렇게 사라 세르나드는 자신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가장 가련한 여인이라 생각했기에.

정작, 자신의 뒤편에서 자신만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하였다.

그래,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줄곧.

시간이 흐른다.

봄이 되고, 여름이 되고,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고-

그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어, 새로운 봄이 찾아오게 될 만큼.

긴 시간이, 흘렀다.

오랜 시간 동안 사라 세르나드는 카인 폰 에스텔을 바라보았고, 그 끝에 깨닫게 되었다.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남자는, 범재에 불과하다.

검술에 재능이 있는 것도, 마법에 재능이 있는 것도, 하다못해 뛰어난 두뇌를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닌.

어디에나 널려 있는, 평범하고 시시한 남자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만, 그가 그런 남자였다는 것을 납득하고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 뿐.

사라 세르나드는 카인 폰 에스텔에게 약간이지만 무언가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 같지만.

그가 자라나며, 그저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기대를 접어 버리고 말았다.

자신을 향해 왠지 모를 한숨을 내쉬는 사라를 바라보며 카인은 그저 안타까워하기만 하였다. 무엇을 안타까워했냐면.

나는 결국 너라는 여자를 진심으로 미소 짓게 하는데 실패하였다는 것이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만약 내가 재능이 있었더라면, 너의 눈길을 사로잡을 무언가가 있었더라면.

네 곁에 어울리는 남자가 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후회만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시간이 흐른다. 대지에 녹음이 트고, 무더운 열기가 지상을 내리 쬐며, 낙엽이 바스락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약혼식을 치른 이후, 사라 세르나드는 계절이 바뀔 때면 에스텔 공작가를 찾아와 카인과 담소를 나누곤 하였지만.

이번에는 계절이 세 번이나 바뀌었음에도 그녀는 에스텔 공작가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쯤에서 그는 깨닫고 말았다. 결국, 예정된 파국이 찾아오고 말았다는 것을.

익히 예상한 일이다. 미련은 없다. 아픔도 없다. 그러니, 아쉬움 따위 남지 않아야 정상이건만.

왠지 모르게, 자신의 두 손에 그녀를 향한 미련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나날이 희미해져만 가는 아련한 과거 속, 제대로 된 웃음을 짓지 못하는 인형과도 같은 소녀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보고 싶었다. 그녀를 향한 미련을 차마 떨쳐내지 못해, 이제는 닿지 않을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자신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게 편지를 작성하였다. 병세가 위중한 상태이며, 마지막으로 너를 한 번만 보고 싶으니, 부디 자신을 찾아 와달라고 하는 거짓으로 점철된 편지였다.

이 편지를 받는다면, 나는 네가 놀라서 내가 달려올 것이란 걸 알고 있다. 언제나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너는 보이는 것만큼 그리 싸늘하고 냉철한 여자는 아니니.

다만, 진실을 알게 된다면 너는 무척이나 화를 내겠지. 내가 너를 속였다는 사실에 대해 불쾌해하겠지.

...그래도, 나는 거짓을 읊으면서까지 너를 붙잡고 싶었다. 너와의 인연을 유지하고 싶었다.

미안하다. 사라, 나는-

결국 너를, 웃게 해주지 못했다.

시간이 흐른다. 봄이 되고, 가을이 되고, 여름이 되었다.

에스텔 공작가에, 한 장의 편지가 전달되었다. 내용을 굳이 확인하지는 않았다. 그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이를 받아들이고, 책상 서랍 속에 편지를 얌전히 넣어두기만 하였다.

에스텔 공작 또한 카인을 향해 별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의 표정을 보더니, 그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일 뿐.

그렇게,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카인 폰 에스텔의 약혼이 끝이 났고.

그의 첫사랑 또한, 역시 끝을 맺었다. 끝을 맺었다 생각했다.

시간이 흐른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마음의 아픔 또한 서서히 잊혀져간다. 가슴을 때리는 허무감에 때때로 슬퍼하는 일이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가슴에 남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기에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봄이 되었다.

겨울이 되었다.

봄이 되었고, 또 다시 겨울이 되었다.

어느 날, 에스텔 공작가에 정중한 청첩장이 한 통 보내져왔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투르니젠 공작가.

용건은 투르니젠 공작가의 소공작, 루시안 폰 투르니젠의 혼인.

그리고 루시안 폰 투르니젠의 혼인 상대는 다름 아닌-

“.....”

청첩장에 적힌 그 이름을 마주한 순간, 가슴이 덜컥하고 내려앉고 말았다.

익히 예상한 일이다. 그러니 마음 아파 할 일은 없었다.

원래 귀족들의 삶이란 그러하다. 약혼을 했다가도 아무렇지도 않게 파혼을 하며.

원치 않는 상대와 결혼을 하기도 하고, 또 이혼을 하기도 한다.

스스로의 이름값과 명예는 오직 가문의 것. 가문의 이름 앞에서, 개인의 가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파혼장을 받았을 때, 그는 이미 이러한 결말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라.”

그는 끝끝내, 후원에서 마주한 어린 소녀의 잔상을 지우지 못하였다.

봄이 되었다.

5월. 제국에 내노라하는 귀족들이 너희의 결혼식에 참여한 한 가운데. 그는 신랑과 신부를 먼 거리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결혼식장에 참여는 하였지만, 나는 도저히 네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볼 자신이 없었기에.

가장 뒷부분에 앉아, 네가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을 올리는 마지막 장면만을 마주하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반지를 끼워주며, 천천히 서로의 얼굴을 가까이하는 그 장면을-

결국, 두 눈을 질끈하고 감고 말았다. 차마, 나의 눈에 그 장면을 담을 수가 없었기에.

그제야 깨달았다. 다 아물었다고 생각하던 상처는, 사실 아물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고통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었다는 사실을.

...그래, 이것으로 된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결말이다.

천 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영락하고 쇠한 끝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에스텔 공작가에 오기 보다는, 4대 공작가라는 위엄에 걸맞는 부와 명예를 지니고 있으며,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검사인 투르니젠 소공작과 혼인을 하는 것이 네게는 더 걸맞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네게 있어, 더 행복한 길일지도 모른다.

낙엽이 한 장, 팔랑하고 떨어졌다.

낙엽이 밟히는 소리에, 바스락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무래도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켜왔던 미련과 아픔과.

사랑을, 보내줘야만 할 것 같았다.

네게 사랑이 떠났기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미련이 남았기에 널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널 웃게 해주지 못했지만, 그는 너라는 여자에게 미소를 되찾아줄지도 모르니까.

모두가 한 쌍의 남녀를 축복하는 결혼식장 속.

그 안에서 오직 한 남자만이 쓸쓸하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마지막 잎새가 팔랑, 하고 떨어진다.

무엇이 떨어진지는 알 수 없었다만, 마음속을 지탱하고 있던 무언가가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깨닫고 말았다.

봄이 되었다.

봄이,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세상은 봄이었지만, 그의 세상만큼은 오직 겨울일 뿐이었고.

그녀가 떠난 이후, 그의 곁에는 이제 어느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외톨이가 되었다. 아니, 외톨이를 자처하였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세상이 겨울로 뒤덮여 버리기 전까지.

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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