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상실에 걸린 마녀를 주워버렸다-152화 (152/201)

(EP.152)14. 미련의 끝 - 15

“욱, 우욱-”

아이리스가 매스꺼움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헛구역질을 연신하는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며, 이 자리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기대, 불안, 초조, 환희, 그리고 절망-

무려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육신을 지니고 있는 아이리스이다. 고작해야 속이 메스껍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리 연신 헛구역질을 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모두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고 있었지만, 아이리스 정도 되는 여인이 어찌하여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 것인지 짚이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수개월 전, 제도에서 카인과 아이리스가 대체 무슨 짓을 했었는지 모르는 사람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러고 보니, 시간이 대체 어느 정도 지난 것이지?’

카인이 가만히 머릿속으로 셈을 헤아려보니, 테라스에서 그녀와 몸을 섞은 이후 얼추 삼 개월 정도쯤 지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햇수로만 따지자면 대략 백여일을 조금 넘는 시간. 시기로 보나, 기간으로 따져보나, 아무래도 카인은 자신의 추측이 올바르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틀림없었다. 아이리스는 지금, 입덧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

“.....”

“.....”

순간, 장내에는 그저 싸늘한 침묵만이 흐르고 말았다. 대체 어떠한 말을 해야 할지, 그리고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모두가 머뭇거리고 있던 사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아이리스를 향해 걸어 나온 여인은 다름 아닌.

“저하. 만약 괜찮으시다면, 제가 저하의 상태를 좀 관찰해보아도 괜찮을까요?”

아리엘이었다.

“...자네가 말인가?”

의외로, 아이리스가 아리엘을 향해 불쾌감을 나타낸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아이리스에게서 아리엘에게로 향하고 있는 감정은 오직 하나, 의아함뿐이었다.

“뭐, 내 몸 상태를 봐주는 것은 고맙지만 자네는 어디까지나 성직자가 아니던가? 내가 알기로 성직자들이 사용하는 신성력은 인체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회복력을 극한까지 높이는 방식인지라 정작 인체의 구조에 대해 상세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성직자는 굉장히 드물다고 알고 있네만.”

아이리스는 아리엘을 바라보며 어딘가 모르게 떨떠름한 목소리로 그리 말을 하였다.

사실, 아이리스가 품고 있는 의문은 타당하다고 밖에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현 시대에 있어 사람이 병에 걸리거나 혹은 부상을 입는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십중팔구는 신성력으로 치유가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만일 환자가 병에 걸렸다면 전신에 신성력을 흘려 넣으면 되는 일이고, 부상을 입었다면 부상당한 부위에 신성력을 집중시키면 되는 일이니까.

그러다 보니, 성직자들은 이 시대에 최고의 의사라고 할 수 있는 주제에 정작 인체의 구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의 모든 병을 치유하는 것이 가능하긴 하지만 정작 그 병이 어째서 발병한 것인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단 말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개인 사정상, 의학과 관련된 공부도 열심히 하였거든요.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서 저하의 몸에 이상이 생겼는지 아닌지 판가름할 정도는 된다고 자부한답니다.”

아리엘의 말에는 어떠한 거짓도 없다. 그녀는 과거,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성직자의 몸으로 의학을 열심히 공부한 전적이 있었으니까.

아리엘은 지상 최고의 신성력을 갖추고 있는 성직자인 동시에, 의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의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자네가 그리 자신하고 있다면야. 진료를 허하도록 하겠네.”

한 때 자신과 죽도록 사투를 벌였던 사이였음에도, 아이리스는 아리엘에게 선선히 진료를 허락한다.

...어쩌면, 자신이 정말로 카인의 아이를 임신을 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아이리스에게서는 아리엘에게 자신의 몸을 맡긴다는 사실에 대한 그 어떠한 머뭇거림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것은 제국의 황녀로서 가지고 있는 대범함일까, 아니면 카인이 뻔히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서 만큼은 아리엘이 어떠한 수도 쓰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속일까.

“...그럼, 잠시 무례를 범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리엘은 아이리스의 바로 앞에 무릎을 꿇고 살그머니 주저앉더니, 그녀의 아랫배에 손을 올리고 조심스럽게 신성력을 흘려 넣었다.

우웅-

아랫배에 손을 올리고 있는 아리엘의 손이 백광(白光)으로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상처를 치유하려는 목적의 신성력이 아니라, 신체의 내면을 투과해 그 흐름을 관조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 아리엘만의 독특한 신성력 운용법이었다.

“.....”

신성력이 부드럽게 아이리스의 아랫배를 끌어안은 것과 동시에, 아리엘은 자신의 손끝에 ‘무언가’가 감지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리엘이 내뿜어낸 신성력의 파동에 반응하여, 그녀의 아랫배 안쪽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무언가를 감지해내는 것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꿈틀-

느껴진다. 자신을 간지럽히는 신성력의 파동이 재미있다는 듯, 아주 살짝 몸을 뒤척이는 무언가. 현재 아이리스의 아랫배, 그러니까 자궁 안쪽에는 신성력의 파동을 감지하고 꼬물거리는 무언가가 존재하는 상태였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녀의 자궁 속에는 현재 하나의 생명이 자리하고 있는 상태였단 말이다. 세간에서는, 여성의 자궁 속에 생명이 깃든 상태를 일컬어 무어라 불렀냐면-

‘...임, 신.’

순간, 아이리스의 배를 쓰다듬고 있던 아리엘의 손끝이 덜컥, 하고 멈추어 버리고 말았다.

아아, 그렇다. 결국 일어나고 말았다. 자신이 그토록 우려하고, 그토록 걱정했던 일이 일어나 버리고 만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가, 카인의 아이를 임신해버리고 말았다. 자신을 내버려두고, 자신보다 먼저 그의 아이를 임신해버리고 만 것이다.

...의심의 여지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자신의 손끝에 생명의 씨앗이 싹을 틔우는 듯한 이 감각을 느껴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과거 아리엘은 딱 한 번, 이것과 유사한 감각을 느껴본 경험이 있었다. 바로, 자신이 카인의 아이를 임신하였을 적의 이야기였다만.

이번에는,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의 아랫배에서 느껴지고 있는 감각이라는 것만이 과거와의 유일한 차이점일 뿐이었다.

“...아.”

아이리스의 아랫배를 만지고 있는 아리엘의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주변에 산소가 모자란 듯 여겨지는 바람에, 숨을 한 차례 헐떡이고 말았다.

그렇다. 자신은 실패했던 것이다. 그 날, 혹시라도 이런 불상사가 생겨날까봐 황녀의 아랫배를 최대한 열심히 가격하였건만, 자신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결국 황녀는 그의 아이를 가져버리는 것에 성공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 날 아리엘이 가했던 타격이 수정에 본의 아니게 도움을 주었다던가.

...하지만, 하지만 늦지 않았다. 아직은 늦지 않았다.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는 모르겠다만, 아이리스는 현재 자신에게 자궁의 위쪽을 무방비 상태로 허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더군다나 아이리스는 현재 스스로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보아하니 어렴풋하게는 짐작 정도는 하고 있는 듯 하지만, 확신을 가지고 있는 상태는 아니다.

그러니, 방법이 존재한다. 이 빌어먹을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해결 방안이 존재한단 말이다.

‘...죽이면 된다.’

그래, 죽이면 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리엘이라면 가능한 방법이다. 그녀가 지금 마음만 먹는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태아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만약, 침투경(浸透勁) 계열의 수법으로 아이리스의 자궁에 아주 살짝만 자극을 주더라도 아이는 곧바로 사산되고 말 것이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아이리스도 그 위력에 피를 토했을 지경인데, 고작해야 태아 따위가 견뎌낼리는 만무한 노릇이니.

...아니, 굳이 거추장스럽게 ‘폭력’을 쓸 필요까지도 없었다. 지금 아이리스의 아랫배에 흘려 넣고 있는 신성력을 태아를 향해 집중적으로 쏟아 넣는다면, 태아는 일순간 과다 보충된 영양과 활력으로 인해 자멸하게 될 것이다. 아리엘 또한 임신을 하였을 무렵, 자신의 신성력이 태아에게 해가 될까봐 전전긍긍하였던 기억이 있었으니.

아리엘의 손끝이 아주 살짝, 그러나 확실히 벌벌 떨리고 있었다. 온갖 매력적인 계획이 그녀의 머릿속을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각오는 어렵지만, 실행은 매우 쉽다. 만약, 지금 자신이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아이리스가 품고 있는 태아는 분명-

“.....”

그래, 그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여자는 오직 자신뿐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통틀어 그의 아이의 엄마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란 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리엘이라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하였다.

아주 간단한 일이고, 이 자리의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 손끝에 아주 살짝 힘을 주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아리엘 티에르. 너는 아이의 엄마가 아니었던가?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 자리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분명-

“...저하.”

아이리스의 아랫배를 꾹하며 살포시 누른 것을 마지막으로, 아리엘은 그녀에게서 손을 떼어 놓을 수 있었다. 결정은 한 순간이었다. 자신이 한 아이의 어머니인 이상, 자신이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애당초 하나밖에 없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고 말았다.

“무슨 일인가, 아리엘. 설마 좋지 않은 일이란 말인가?”

걱정이 되는 듯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져오는 아이리스의 푸른색 눈동자를 말없이 마주하며, 아리엘은 고개를 좌우로 한 차례 내젓는다.

“...아이, 아이를.”

“...아이?”

아리엘은, 스스로의 입으로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 아니,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저하께서는 아이를, 가지신 듯 합니다. 방금 전의 그것은, 입덧임이 틀림없다 생각해요.”

...결국, 아리엘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였다. 자신도 엄마였다. 자신도 한 때, 배를 아파가며 나았던 아이가 있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애지중지하였던 아이가 있었다.

고작해야 스스로의 알량한 이기심 때문에, 이제 막 자라나려는 생명을 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모를 가능성을 없애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하나의 완성된 생명을 죽이는 일은 결코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이 아이는, 카인의 아이기도 하였다.

비록, 배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카인의 아이를 자신의 손으로 어떻게 하는 것은 아리엘에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 또한, 여자이기 이전에 한 아이의 엄마였으니까.

“...임신?”

아리엘의 말에 아주 잠깐, 아이리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임신. 카인과 나의, 아기.”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스스로의 아랫배 위쪽에 손을 살그머니 올려놓더니 이내 아주 조심스레 배를 쓰다듬었다. 한 차례, 두 차례, 세 차례. 아이리스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조심스러운 손동작으로, 스스로의 아랫배를 아주 살며시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세상에 다시 없을, 보물을 쓰다듬듯이.

“...카인.”

아이리스는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깨어져나갈 듯한 목소리를 한 채로, 조심스레 카인의 이름을 부른다.

“...예, 저하.”

“이리로, 와보게나. 빨리 와보게나. 어서.”

카인이 아이리스를 향해 엉거주춤한 자세로 살며시 다가서니, 아이리스는 그의 오른손을 강제로 붙잡더니 이내 자신의 아랫배 위쪽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아.”

“...느껴지는가? 아이가 생겼다 하는군. 자네와 나의 사랑의 결실이, 바로 이곳에서 자라나고 있다는 말일세.”

...느껴지고 있었다. 사실 느껴질 리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무언가가 확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자신이 손을 맞대고 있는 이곳에서, 생명의 고동이 두근거리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따뜻하군.”

자신의 몸속에서 하나의 생명이 잉태된다는 기분. 그것은 실로, 말로 형언할 수가 없는 신비한 감정임이 분명하였다.

그것이, 사랑하는 이와의 아이라면 더더욱.

“참으로 신기한 기분이로군. 내가 엄마가 되다니. 원래 같았으면 10년 뒤까지도 남자를 알지 못하는 몸이었을 텐데, 이렇게 어린 나이에 내가 엄마가 되어버리다니.”

그리 말을 하며, 아이리스는 실로 기쁘다는 듯 환하게 웃음을 짓고 말았다.

“카인, 부디 나와 한 가지 약속을 나누어줄 수 있겠는가.”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카인의 질문에, 아이리스는 아주 작고 그리고 아련한 듯한 목소리로 살며시 입을 연다.

“사랑해주게나. 나와 그대와의 이 아이를, 아주 많이 사랑해주게나. 내가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가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이 아이를 사랑해주게나. 오직 바보처럼, 이 아이를 헌신적으로 사랑해주도록 하게나.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 뿐 이니.”

그리 말하더니 아이리스는 카인의 귓가에 아주 자그마하게 속삭인다.

“고마워, 카인. 나를 엄마로 만들어 줘서.”

카인과 아이리스는 자신들의 손을 겹쳐 그녀의 아랫배에 살포시 올려놓는다.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은 아주 많이 행복할 것이 분명하다. 자신도 한 때, 지금의 아이리스가 그렇듯 아주 많이 행복하였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일이니.

...그러면 나는?

카인, 지금 나는 대체 너를 보며 어떠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 것일까. 그 여자를 보며, 나는 어떠한 말을 자아내야만 하는 것일까.

나 또한, 한 때 네 아내였으며.

그 아이의, 엄마였는데.

아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의 늘씬한 아랫배를 조심스레 만져보았지만.

당연하게도, 그녀는 그 안에서 어떠한 생명의 자취도 찾을 수 없었다.

그 사실이 아리엘은 못내 슬프기만 하였다.

...그것도, 아주 많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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