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0)14. 미련의 끝 - 13
그 날은, 달이 참으로 아름다운 밤이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별과 달만이 어두운 밤하늘을 가득 수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보름달은, 스스로가 내 비추는 빛을 통해 하늘 그 자체를 감싸 안는 듯한 천개(天蓋)의 형상을 띄고 있는 중이었다.
청초하면서도 새하얀 빛을 내뿜고 있는 월광(月光)이 수줍은 듯 밤을 어스름히 밝히고 있는 몽환적인 광경 속에서, 아리아와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구경을 하기로 약속한 뒷산의 중턱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가고 있었다.
“달구경하기에 좋은 날씨인 것 같아요, 카인님.”
“확실히 네 말 대로구나. 아리아.”
아리아의 말 대로였다. 현재는 초여름에 가까운 날씨였다만, 현재 기온은 여름답지 않게 약간의 쌀쌀함마저 느껴질 정도인지라 열대야로 인한 무더움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을 성 싶었다. 말 그대로, 이리 다함께 소풍을 나와 달구경을 하기에는 정말로 좋은 밤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카인님과 함께 단 둘이서 밤길을 걷는 것도 상당히 오래간만인 것 같아요.”
아리아는 나를 향해 귀엽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왠지 모르게 설레는 목소리로 내게 그리 말을 하자, 그제야 나는 이스타드에서의 축제 이후 아리아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동시에, 내가 얼마나 무심하고 한심한 인간인지에 대해서도 새삼스레 자각하고 말았다. 공작령의 업무를 처리하는 일도 중요하긴 하지만 내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쌓아가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거늘, 최근 들어 너무 일에만 집중을 하다 보니 그런 간단한 사실마저 망각해버리고 말았던 것 같다.
“급한 업무만 다 처리하고 나면, 다음번에는 단 둘이서만 어디 조용한 곳으로 놀러가 보는 것은 어떨까.”
백금을 녹여서 만든 듯한 아리아의 새하얀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그리 말을 하자, 아리아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이내 꽃이 만개한 듯한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언제든지 불러주기만 하세요.”
그런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를 나누며 산길을 걸어 올라가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산 중턱에 위치한 약속 장소에 도착하게 되었다.
“카인! 여기야, 여기!”
그곳에는 이미 우리보다 한참 전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비앙카와 아이리스, 그리고 아리엘이 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중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 늦은 것인가. 분명히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출발했던 것 같은데, 시간이 꽤나 지난 뒤에서 이리 어슬렁어슬렁 모습을 드러내다니.”
아이리스가 나를 타박하는 듯한 불평을 늘어놓자, 옆에 있던 아리엘은 눈살을 찌푸리며 아이리스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늦을 수도 있죠. 보아하니 아리아와 함께 주변을 산책 좀 하느라 시간이 걸린 모양인데, 저하께서 카인에게 그렇게 잔소리를 늘어놓아서야 그 이의 스트레스가 해소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쌓이지는 않을까 우려가 되기만 하네요.”
“호오, 그새 기운을 되찾았는가. 아침 무렵만 하더라도 시들어가는 잎사귀마냥 풀이 죽어있더니, 저녁 무렵이 되니 또다시 흰소리를 내뱉는 같잖은 입이 회복되었나보군.”
“...두 분 다, 제발 오늘만큼은 다투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만.”
오늘만큼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이곳에 놀러온 것이었지, 굳이 이곳에 와서까지 서로를 향해 으르렁 거리는 장면만은 보고 싶지가 않았다.
“그나저나 아버지께서 왜 비앙카에게 이 장소를 추천해주셨는지 알 것 같네요. 확실히, 달구경을 하기에는 굉장히 좋은 장소가 아닐 수가 없군요.”
사실 에스텔 공작가 뒤편에 있는 이 뒷산은 난생 처음 올라와 보는 장소였다만, 진작 한 번쯤 와보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될 정도로 수려한 경치를 자랑하는 장소임이 틀림없었다.
우리가 현재 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곳은 산 중턱에 나있는 절벽 근처였는데, 비록 주변이 다소 비좁기는 하지만 전망이 아주 좋아 에스텔 공작가의 본성을 구석구석까지 살펴볼 수 있는 장소였다.
또한, 우리가 앉아 있는 곳 근처에는 마치 안개가 깔려 있는 것 마냥 나무가 사방을 빽빽하게 감싸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나무들이 하늘만큼은 가리고 있지 않아 고개를 조금만 들어 올리더라도 밤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달과 별을 감상하는 것에 어떠한 지장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다.
“자, 달구경도 좋지만 그보다는 먹는 것도 중요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카인, 여기에 앉아 보게나. 내 그대를 위해 열심히 도시락을 만들어보았으니.”
자신의 옆에 앉으라는 신호인 듯 손으로 바닥을 탁탁하고 두드리는 것과 동시에, 아이리스는 자리 곁에 놓여있던 바구니에서 아기자기한 도시락 하나를 꺼내들어 내게 내밀었다.
한 손으로 먹기 좋게 잘려 있는 샌드위치와 달걀말이, 그리고 싱그러운 나물무침으로 구성된 꽤나 먹음직스럽게 생긴 메뉴로 구성된 도시락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내가 직접 만든 도시락이라네.”
내게 으스대며 그리 말을 하고 있는 황녀의 양손가락에는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무인이 고작해야 부엌칼 따위에 상처를 입는 일이 가능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어쨌거나 평생 동안 주방에 출입하는 일 따위는 없었을 아이리스가 나를 위해 도시락을 만들어주었다고 하니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풉, 저하. 너무너무 귀엽고 깜찍한 도시락이 아닐 수 없네요.”
...아이리스가 내게 내민 도시락을 바라보며 상당히 띠꺼운 목소리로 비웃음을 흘리는 비앙카만 아니었다면 말이지만.
“나물무침, 달걀말이, 샌드위치...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바로 초심자도 부엌칼만 잡으면 금방 만들 수 있는, 개나 소나 따라할 수 있는 보잘 것 없는 메뉴라는 점이지.”
그리 말을 하며 비앙카는 얼굴이 구겨져 있는 아이리스를 향해 피식하고 승리의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이내 내게 바구니에서 돼지고기 튀김과 쌈말이, 그리고 사과 소스를 끼얹은 팬케이크를 꺼내들었다. 확실히, 아이리스가 만든 도시락에 비하면 손이 많이 가는 메뉴들로 구성된 화려한 도시락이 아닐 수 없었다.
“...저, 저는 아무 것도 준비해오지 않았는데요...”
아이리스와 비앙카가 만들어온 도시락을 바라보더니 이내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며 나를 바라보는 아리아.
“...흥, 한심하군. 아리아. 그대는 좋은 요리야 말로 좋은 아내를 판가름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척도라는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인가. 도시락을 아예 준비하지 못한 여자들이 있으니 아무래도 이번 승부는 나의 승리임이 아닐 수가 없군.”
그리고 그런 아리아를 바라보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아이리스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아리엘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멍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아, 사실 저도 약소하게나마 도시락을 싸왔는데 말이죠.”
그리 말을 하며 아리엘은 옆에 두고 있던 바구니로부터 음식을 하나둘 꺼내기 시작하였다. 단순한 샐러드부터 시작하여 감자 크로켓, 생선 조림, 그리고 후식으로 먹을 밀푀유와 와인에 이르기까지 아리엘의 바구니에서는 마치 마법인 것 마냥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
“.....”
“.....”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에 조개마냥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만 비앙카와 아이리스, 그리고 아리아.
“굉장하군요. 그 짧은 시간에 이토록 많은 요리를 준비하셨단 말입니까.”
나의 감탄 아닌 감탄에 아리엘은 다소곳한 태도로 웃음을 지어보이며 내게 답을 해주었다.
“요리가 취미라서요. 그리고 카인도 잘 아시다시피 사정상 가정에서 요리를 많이 하다 보니 자연스레 솜씨가 늘어난 면도 있는 것 같군요.”
아리엘의 그러한 대답에 아이리스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아리엘이 준비한 음식들을 한 차례 훑어보더니 이내 자신의 손에 들린 도시락을 멍청한 눈길로 쳐다보고 말았다.
“...뭐, 사실 요리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지. 공작가의 안주인쯤 된다면 직접 요리를 할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내 다음에 제도로 돌아갈 일이 생긴다면 황궁 출신의 요리사 한 명을 공작가로 직접 데려오도록 하지. 그것이 에스텔 공작가의 모두를 위한 길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드는군 그래.”
갑자기 아까와는 전혀 다른 말을 내뱉는 아이리스.
“그럼 모두 앉아서 식사들 하시는 게 어떨까요. 모두가 드셔도 괜찮을 만큼 음식을 넉넉히 준비했으니 말이에요.”
그리하여 원래 목적인 달구경을 하기 보다는 서로가 만들어온 음식을 함께 나누어먹는 음식 판이 벌어지고 말았다. 뭐, 지금 이 자리가 소풍 분위기로 변질이 된다면 또 어떠한가. 어차피 잠시나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즐겁게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이곳에 놀러온 것에 지나지 않는데.
그리 생각을 하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아리엘이 만든 밀푀유 하나를 들어 입 안에 넣어보았다. 놀랍게도, 맛있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허. 정말로 아리엘이 직접 만든 것이란 말입니까? 제도의 연회장에서 먹었던 디저트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요?”
나의 감탄을 금치 못하는 칭찬에, 비앙카나 아이리스 또한 궁금함을 감출 수 없다는 듯 밀푀유 하나를 집어 들더니 자신의 입에 쏙하고 집어넣고 말았다. 그리고 1초 뒤, 그녀들은 스스로의 얼굴에 감탄과 분함이 혼재되어 있는 복잡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말았다.
“...카인.”
“예, 저하.”
“...오늘 내가 도시락을 싸왔다는 사실은 머릿속에서 부디 잊어줄 수 있겠는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그러한 말을 하는 아이리스는 상상 이상으로 귀엽게 보이기만 하였다. 언제나 근엄하고 딱딱한 표정만을 지어보이는 그녀에게, 이러한 면모가 있을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었기에.
“괜찮습니다. 저하께서 정성들여 싸오신 도시락이 아닙니까. 그런 귀한 도시락을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서 이리 주시지요.”
내가 웃으면서 그리 말을 하니 그제야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태도로 내게 도시락을 내미는 아이리스. 그리고 뒤이어 비앙카 또한 마음을 좀 편하게 먹은 듯 자신이 싸온 음식을 아리엘이 싸온 음식 옆에 풀어 헤친다.
그리하여, 모두가 준비해온 음식을 모두가 다함께 나누어먹으며 밤하늘에 떠올라 있는 달과 별을 구경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형성이 되었다.
밤하늘을 밝게 드리우고 있는 아름다운 달빛을 눈앞에 두고 있는 탓인지, 여인들 사이에서는 여느 때와 같은 치열한 설전이 아니라 평범하기 이를 데가 없는 대화만이 오고가고 있는 중이었다. 뭐, 아직까지 서로를 향해 탐탁지 않은 감정이 다소 남아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그거대로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생각한다.
비록, ‘지금의 나’가 자의에 의해서 시작한 사랑은 아니었으며, 주변의 여인들이 회귀 전의 기억을 토대로 멋대로 요구한 사랑이기는 하였지만 최종적으로 저들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내가 한 약속은 아니다만, 언젠가의 내가 저 여인들을 행복하게 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지금의 나에게도 저들을 행복하게 해줘야 하는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이 어찌하였건 간에, 현재의 나 또한 저 여자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니까.
다들 자신이 주역이었던 세계에서 찾아왔던지라 서로를 탐탁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다소 삐걱거리는 면모도 존재할 테지만 그것은 전부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 생각한다.
내가 생각해낸 아이디어는 아니었다만, 이렇게 모두가 다 함께 모여 앉아 소풍 분위기를 내보는 것은 괜찮은 방안이었던 것 같으니 다음에 또 다시 시간을 내서 소풍을 와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그런데, 그 때였다.
“욱-”
모두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 아이리스가 갑자기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드시지 못하는 음식을 입에 대시기라도 하신 것입니까?”
“...아니, 그렇지 않다네. 나도 잘 모르겠는데, 갑자기 속에서 무언가가 울렁거리고, 메슥거리는 기운이, 우욱-”
그리 말을 하며 헛구역질을 반복하는 아이리스.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말았다. 지금 아이리스가, 어째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자신도 모르게 아리엘이 앉아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는 상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