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9)14. 미련의 끝 - 12
“그러고 보니, 에스텔 공작가에 머물게 된 이후 제대로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해 본 기억을 찾아볼 수가 없는 것 같군.”
“네?”
그로부터 며칠 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입가심으로 간단히 차를 홀짝이던 와중에 아이리스는 뜬금없이 내게 그러한 말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그건 또 무슨 이상한 소리이십니까, 저하.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현재 에스텔 공작가에서 저하보다 한가로운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것 같습니다만.”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아이리스의 그 말에 도저히 동의를 표할 수가 없었다. ‘예비 신부’라는 명함 하에 에스텔 공작가에 체류 중인 아이리스는, 최근 공작가에서 한가하기로 치자면 비앙카와 더불어 세 손가락 안에는 능히 들어갈 것 같은 인물이었으므로.
나도, 아리아도, 사라도 언제나 밤낮없이 서류를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거늘, 그런 내 옆에서 아무런 할 일도 없이 빈궁거리기만 하는 여자가 ‘제대로 쉬어 본 기억이 없다’와 같은 말을 늘어놓는다면 나는 대체 무슨 반응을 해야 하는 것일까.
...헌데, 놀랍게도 아이리스 또한 내게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자신만의 논리와 근거를 갖춘 상태에서 내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말하는 휴식이란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할 일 없이 무료하게 빈둥거리며 논다는 의미의 휴식이 아니라네. 자네도 잘 알다시피, 사람은 기계가 아니지. 기계는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動力)만 있다면 무한히 같은 일을 수행할 수 있지만, 사람의 정신력에는 한계점이 있기 마련이지. 때로는,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인 일처리를 위하여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모든 짐을 내려놓은 채 휴식을 취하는 것도 필요한 법이라네. 어디 내 말이 틀렸는가?”
“...하지만, 애당초 저하께서는 일 자체를 하시지 않는데 무슨 휴식이 필요하시다는 건지...”
내 말에 아이리스는 자신이 홀짝이고 있던 찻잔을 탁자 위에 살포시 내려놓더니 나를 지그시 노려보기 시작한다.
“...멍청하군. 휴식이 필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자네라네. 지금 나는, 자네가 마음 편히 휴식을 취했으면 하여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것이라네.”
“...네?”
내가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눈초리로 아이리스를 바라보자, 아이리스는 한숨을 푹하고 내리쉬며 자그마한 손거울 하나를 내게 내민다.
“더 이상은 구차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지.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 보게나.”
아이리스에게서 손거울을 받아들어 내 얼굴을 직시한 나는 그제야 아이리스가 내게 왜 이런 말을 한 것인지 깨닫고 말았다. 얼굴 전체에 겹겹이 쌓인 시각화된 피로, 안구 주위에 빨갛게 서 있는 핏줄, 눈 밑쪽까지 거무죽죽하게 내려온 다크 서클에 이르기까지. 이래서야 금방이라도 지쳐 쓰러질 것만 같은 중환자의 모습이 따로 없었다.
“이제야 자신이 어떠한 몰골을 하고 있는 것인지 눈치 챘는가? 비록 말은 하지 않았다만, 그간 자네는 너무 무리를 하였다네. 밤이고 낮이고 가리지 않고 하루 종일 집무실에 틀어박혀 서류만 바라보다니. 그것이 정녕 사람이 할 짓이란 말인가? 그래 가지고는 며칠도 지나지 않아 자네는 몸이 크게 축났을 것이라네.”
...확실히, 요즘 들어 잠도 제대로 자지 않은 채 업무에 집중을 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였다.
“...하지만, 제게는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그래서 뭐 어쩌라는 것인가? 그 업무라는 녀석들이 자네가 병석에 드러누울 지도 모르는 미래보다 더욱 값지고 귀하기라도 하다는 말인 것인가? 내 단언하도록 하지. 자네에게는 휴식이 필요해. 하루 정도는 업무고 뭐고 아무 것도 신경을 쓰지 않은 채 마음 편히 쉬는 날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라네.”
“...으음.”
아이리스의 말은 정론 중의 정론이었던지라 내가 딱히 어떠한 반박도 하지 못하고 있자, 그에 동의를 표하듯 아리엘 또한 나를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맞는 말이에요, 카인. 비록 제가 아침저녁으로 당신께 치유술을 걸어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체의 피로를 해소하는 것일 뿐. 당신의 정신적 피로까지는 어찌할 도리가 없답니다. 성직자이자 의사로서 당신께 권유하는 것인데, 당신은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만 해요.”
“.....”
에스텔 공작가에서 나의 건강을 돌봐주고 있는 전속의(專屬醫)라 할 수 있는 아리엘까지 내게 그러한 말을 하자 나 또한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의견에 동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객관적으로 바라봐도 나의 상태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가 어찌하면 좋을 것 같습니까?”
나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아리엘의 옆에 있던 비앙카는 나를 향해 빙긋하고 웃으며 말을 하였다. 참고로, 요 며칠 간 비앙카는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놀러 가자. 요 앞으로.”
“응?”
“내가 아버님께 여쭈어봤는데, 공작가 뒤편에 있는 산의 경치가 나름대로 아름답고 괜찮데. 저녁 무렵에는 달구경을 하기에도 운치가 그리 나쁘지 않다고 하고.”
그리 말을 하며 비앙카는 내 손을 꼭하고 붙잡아오며 나를 향해 살그머니 속삭여왔다.
“생각해봐. 그러고 보니 우리 둘 사이에서는 어디 가서 데이트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법한 이벤트가 딱히 존재하지 않았었잖아? 이번 기회에서 그런 추억을 하나 만드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데. 예를 들어 경치 좋은 곳에 앉아 있는 상태로 서로의 어깨를 마주하며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인다거나-”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비앙카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비앙카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아이리스가 그녀의 손을 찰싹하고 때려왔으므로.
“참으로 버르장머리가 없는 손이로군. 누구 마음대로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는 것이란 말인가? 찬물에도 엄연히 위아래가 존재하는 법이거늘, 내가 가만히 있는데 그의 손을 떡 주무르듯 매만지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이란 말인가. 벌써부터 좋지 않은 버릇을 잔뜩 익힌 못된 손이 아닐 수가 없군.”
“어라, 저희들 사이에 벌써부터 암묵적인 서열이 정해져 있었을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네요. 그런데 저하, 얼마 전에 카인 앞에서 그를 독점한다느니, 아니면 다른 여자들을 첩으로 삼는다는 것을 허용한다느니 그러한 말을 늘어놓다가 그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어떤 여자가 떠오르는 것은 대체 어찌된 영문일까요?”
“...나는 카인에게 두들겨 맞은 적이 없다만. 그대에게도 눈이 달려 있다면 깨달았을 사실이지만, 그 결투는 사실상 나의 승리나 다름이 없는 결투였다네. 다만, 아내 된 몸으로 남편을 이기려드는 모양새가 별로 좋아보이지는 않아서 내가 져주었을 뿐이지. 나 자신의 만족보다는, 가정의 평화를 더욱 중시한 내조의 결정체라고 해야 할까.”
“흐응, 그런 것 치고는 참 열심히 검을 휘두르시던데. 뭐, 제국의 유일한 계승권자이자 검술의 대가라고 하실 수 있는 저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것이 분명한 사실임이 틀림없겠죠. 아니,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리 믿어야만 하겠지요. 그렇지 않나요?”
“오늘따라 혀가 아주 가볍고 발랄한 것 같군. 내 비록 카인에게는 져주었지만, 비앙카 자네에게는 져줄 이유가 없다는 간단한 사실을 상기해주었으면 하는데.”
“저하도, 참. 농담 실력도 역시 수준급이시군요.”
아이리스와 비앙카가 서로를 향해 화기애애한 말을 늘어놓고 있는 사이, 나는 그들의 옆에 얌전히 앉아 있는 아리엘을 힐끗하고 바라보았다. 그 날 이후, 아리엘은 계속해서 침울하고 시무룩한 기색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아리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다 함께 소풍이라도 가는 것에 대하여.”
얼마 전, 아리엘이 자신에게 말을 놓아달라고는 하였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이 있는 곳에서는 여전히 그녀에게 반존대를 사용하고 있었다.
“괜찮은 것 같아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카인에게는 정신적인 휴식이 필요하던 찰나였으니까요. 이렇게 다 함께 노는 것 또한,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겠죠.”
그리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아리엘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살짝 덧붙였다.
“...어차피, 다 함께 당신을 공유해야 하는 것 또한 익숙해져야 하는 일일 테니 말이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까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아리엘의 마음속에서 그녀 나름대로 어떠한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사실만은 잘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들 중에서 휴식이 필요한 사람은 나 뿐 만이 아닌 것 같았다.
“좋습니다. 가죠, 소풍.”
“정말? 진짜로 가는 거 맞지?”
“그래. 네 말대로, 뒷산 중턱 즈음에 달구경하기 좋은 곳이 있으니까.”
그녀들의 말대로, 오늘 하루쯤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얌전히 휴식을 취하는 것 또한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다. 아이리스의 말마따나 업무에 열중하느라고 상당히 지쳐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그리고 그 때였다.
“아, 저는 불참하도록 할게요. 왜냐하면 저는 오늘 선약이 있거든요.”
빙그레 웃음을 지어보이며 불참 선언을 하는 키리에.
“선약 말씀이십니까?”
내가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그녀를 향해 반문을 하자, 키리에는 여전히 흐트러지지 않은 미소를 유지한 상태로 자신의 두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저 또한 카인과 재밌게 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긴 한데, 이럴 줄 모르고 다른 사람과 미리 약속을 잡아놓은 상태거든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저는 이쯤에서 빠지는 수밖에.”
“...만약 키리에가 원하신다면, 소풍은 내일로 미룰 수도 있습니다만.”
내 발언에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던 비앙카와 아이리스가 나를 휙 하고 돌아보았지만, 나는 그녀들의 따가운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키리에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후후, 괜찮아요. 저 하나 때문에 굳이 그런 무리를 할 필요는 없답니다. 그리고 카인도 잘 아시잖아요? 저와 카인이 함께할 나날이 앞으로도 끝없이 이어져나갈 텐데, 고작해야 이런 소풍 따위에 미련을 두지는 않을 것이란 걸 말이죠.”
“...흐음, 정론이로군.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 아니겠나. 키리에의 의견이 그렇다는데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줘야 하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키리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말을 덧붙여나가는 아이리스. 지금 아이리스의 속내가 훤하게 들여다 보이는 것 같은 이 기분은 단순한 나의 착각인 것일까.
...하기야, 키리에의 말처럼 고작해야 소풍에 불과하다. 앞으로도 그녀와 함께할 나날이 수없이 많을 텐데, 고작해야 소풍 따위에 미련을 두는 것도 멍청한 일임이 분명하겠지.
“...알겠습니다. 이거, 키리에를 혼자 놔두고 저희들끼리 놀러가는 것이 그리 마음 편한 일인 것만은 아닌 것 같군요.”
왠지 모르게 드는 미안한 마음에 내가 그리 중얼거리자 키리에는 나를 향해 참으로 싱그러운 웃음을 지어보이며 이리 중얼거렸다.
“이런, 그리 죄책감 같은 것은 가지지 않으셔도 정말로 괜찮답니다. 카인.”
그런데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나의 두 눈에는.
“방금도 말씀드렸다시피, 제게는 오늘 저와 함께하기로 약속한 ‘손님’이 계시니까요.”
키리에가, 전에 없을 정도로 무척이나 들떠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
그렇게 저녁에 달구경을 하기로 약속하고 모두가 떠나간 테이블 위.
그곳에는,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음에도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여인 둘이 존재하고 있었다.
한 명은 느긋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홍차를 홀짝이고 있는 키리에.
또 다른 한 명은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듯한 얼굴을 한 채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라.
“.....”
그들 사이에서는, 오직 숨이 막힐 것 같은 침묵만이 흘러넘치고 있는 와중이었다.
침묵을 먼저 깨버린 쪽은 다름 아닌 키리에였다.
“소풍, 정말 안 가도 되나요? 당신이 원한다면 하루 정도는 일정을 뒤로 미뤄줄 수도 있는데.”
키리에의 자비로움이 넘쳐흐르는 그 말에, 사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흔든다.
“...아니요. 차라리 더 잘 되었다고 생각해요. 공작가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만큼, 누군가 우리의 대화를 엿들을 가능성도 적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래요? 뭐, 당신의 뜻이 정 그렇다면야.”
전에 없을 상냥함과 자비로움을 내비추는 키리에를 향해, 사라는 떨리는 듯한 두 눈동자를 하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러면 저 또한, 당신께 한 가지 뭐 좀 여쭈어 봐도 괜찮을까요?”
“무엇을 말인가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키리에를 향해, 사라는 자신의 이를 꽉 하고 깨물며 그녀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키리에, 당신께서는 제가 묻고자 하는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을 알고 있다고 하셨죠. 제가 품고 있는 의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도출할 수 있다고 하셨죠.”
“뭐, 그렇죠.”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키리에를 바라보며, 사라는 마치 호소라도 하듯 고함을 내지르고 말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제게 그 자리에서 바로 진실을 말해주시지 않는 것이죠? ‘적당한 때와 장소를 지정하지 않는다면 입을 열지 않겠다’라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로 하셨던 말씀이신 것인가요?”
사라의 질문에 키리에는 그저 물끄러미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사라, 저 또한 당신에게 뭐 하나 물어보도록 하죠. 저들은 오늘, 달구경을 하기 위해 뒷산의 중턱까지 올라갈 예정이지요. 그런데 저들은 대체 왜 그리 미련한 행동을 하는 것일까요? 공작가 앞마당에서도 얼마든지 달구경을 할 수 있을 텐데, 굳이 힘을 들여가면서까지 산에 올라가려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요?”
키리에의 그 질문에, 사라는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눈을 깜빡이면서도 순순히 대답을 하였다.
“...그야, 아무 곳에서나 자리를 깔고 소풍을 즐기는 것은 그리 낭만적이지 못한 일이니까요. 조금이라도 더 경치가 좋고, 달빛이 잘 드리우며, 분위기를 살릴 수 있는 장소에서 소풍을 즐기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는 것이 틀림없으니까요.”
“맞아요, 사라. 정답이에요.”
짝짝, 하며 키리에는 사라를 향해 박수를 쳐 보인다.
“그리고 당신이 방금 전 내놓은 대답이, 제가 하고픈 말과 동일하답니다.”
“...네?”
키리에는 전에 없던 상냥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녀의 귓가에 아주 조심스럽게 이리 속삭일 뿐이었다.
“한낱 달을 구경하는 일에도 그리 많은 정성을 쏟아 붓는데, 하물며 세상에 다시없을 진미를 맛보는 일에는 그에 합당한 무대를 갖춰야만 하는 노릇이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