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8)14. 미련의 끝 - 11
사라가 카인의 집무실을 찾아간 것은, 그저 사소한 우연에서 비롯된 일에 지나지 않았다.
과거, 사라 세르나드는 세르나드 백작가의 하나 뿐인 ‘상품’으로서 길러진, 가축과 같은 신세에 불과한 여인에 지나지 않았다만.
그와는 별개로 그녀는 세르나드 백작가에 전승되는 여러 가지 ‘비밀’에 대한 지식을 전수받은 몸이기도 하였다.
세르나드 백작가에서 그저 쓰다 버릴 도구에 지나지 않는 그녀에게 여러 가지 지식을 전수한 이유는 아주 간단하였다.
백작가가 품고 있는 비밀이란 아주 비밀스럽고 은밀한 종류의 것인지라 타인에게 함부로 누설하기는 꽤나 곤란한 종류의 지식이었지만, 동시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고 무언가를 향해 ‘신앙심’을 품어야만 하는, 꽤나 모순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백작가에서는 엄연한 백작가의 직계라고 할 수 있는 사라에게 지식을 강제로 전수시켜 ‘신도’로 만들기는 하였지만, 동시에 언젠가 다른 곳으로 팔려나갈 그녀를 신뢰할 수는 없었기에 강제적으로 저주를 걸어 그녀의 입을 봉쇄해버리기에 이르렀다.
사라의 육신을 둘러싸고 있는 저주는 원체 지독한 종류의 것인지라, 마법에 의거한 방법으로는 도저히 해주(解呪)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현세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라 칭할 수 있는 아리아조차 별 다른 대책을 놓지 못하였을 정도이니.
...하지만 아리엘이 직접 나선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저주란 근본적으로 인간을 해하고 옭아매는 부정적인 삿된 힘. 천상에 거하시는 여신께서 지상의 아이들을 사랑하시기에 내려주신 성스러운 힘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신성력은 저주에 상극이라 할 수 있는 탁월한 효능을 자랑한다.
평범한 성직자가 사용하는 신성력조차 어지간한 저주 정도는 해주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인데, 하물며 지상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성직자라 할 수 있는 아리엘 정도가 된다면 두 말 할 나위도 존재하지 않겠지.
하지만 원체 질기고 독한 종류의 저주였던지라, 해주 과정에서 그녀의 몸에 피해를 줄 가능성이 존재하였기에 한 번에 저주를 제거하기보다는 여러 번에 걸쳐 차츰차츰 치료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 날 또한, 여느 때와 같이 사라가 아리엘의 치료를 받기로 했던 날들 중 하나였다.
그런데, 아리엘은 치료 시간이 임박하였음에도 진료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
혹시 아리엘에게 급한 일이 생긴 것은 아닌가 하여 진료실에서 사라는 얌전히 그녀를 기다려 보았지만.
약속한 시간에서 대략 10분 정도가 지났음에도 아리엘은 진료실에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척이나 의외인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사라가 비록 아리엘이라는 여자에 대해 알게 된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그녀의 성격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라 할 수 있었다.
아리엘 티에르라고 하는 여자는, 다른 것은 몰라도 시간 약속 하나는 병적으로 잘 지키는 여자였다. 사라가 전해 듣기로 아리엘은 과거 수도원에서 자라났다고 하였으니,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규칙적인 생활이나 시간 약속을 준수하는 버릇이 몸에 배여 있던 것이 틀림없겠지.
그런 아리엘이 약속 시간을 훌쩍 넘겼음에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고 있으니, 불쾌한 감정이 들기보다는 호기심이란 감정이 사라의 마음을 사로잡고 말았다.
그녀는 대체 무엇을 하느라 자신과의 약속마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 것일까? 사라가 알기로, 아리엘이 에스텔 공작가에서 친분이라고 할 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카인과 그녀의 여동생인 엘레나 정도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그녀가 지금 약속 시간을 훌쩍 넘겨서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이유도 둘 중 하나와 관련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여인으로서의 직감이 사라에게 정답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리엘은 지금, 엘레나와 함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녀는 분명, 카인을 만나느라 자신과의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 분명한 노릇이노라고.
‘...설마.’
왠지 모르게 초조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갑자기 시간이 지독할 정도로 느릿느릿하게 가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결국 버티지 못한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하고 일어나 카인의 집무실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그래, 지금 자신이 하는 행동은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에서 우러나온 행동임이 틀림없다. 자신은 그저 치료를 받기 위해 아리엘을 찾아나서는 것에 불과하다. 만약 카인의 집무실에 아리엘이 있다면 그녀의 행방을 발견할 수 있으니 좋고, 집무실에 그녀가 없다면 마음을 한결 놓을 수 있으니 그건 그것대로 안심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자신은 결코, 아리엘을 핑계 삼아 그를 엿보러 가는 것이 아니다. 절대로.
그렇게 자기 합리화까지 훌륭하게 마친 사라는, 카인의 집무실을 향해 사뿐사뿐 걸어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집무실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때 마침, 집무실의 문은 아주 살짝이지만 확실하게 열려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열려 있는 문의 틈 사이로, 카인과 아리엘의 목소리가 자그마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역시, 아리엘은 자신의 추측대로 카인을 만나느라 자신의 치료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으음.’
사라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하고 삼키고 말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타인이 나누고 있는 대화를 몰래 엿듣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임이 분명하다. 평상시의 그녀였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의 귀를 틀어막았을 것이 분명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유혹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카인과 아리엘이 나누고 있는 대화의 내용 따위가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저 둘이 대체 어떤 사이이기에, 집무실 안에서 단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인가 호기심이 들었을 뿐이었다. 자세한 이야기까지는 전해 듣지 못하였지만, 아리엘 또한 카인을 향해 심상찮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므로.
“.....”
고심은 길었지만 판단은 찰나에 불과했다. 결정을 내린 그녀는, 혹시라도 들통 나는 일이 없도록 몸을 최대한 수그리며 열려 있는 문틈을 향해 귀를 쫑긋하고 세웠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은, 결코 나쁜 짓이 아니다. 자신은 그저, 카인과 아리엘이 어떠한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인지 확실히 알고 싶을 뿐이다. 그래, 그것 뿐이다.
...그렇게, 사라가 그들의 대화를 훔쳐 듣게 된 것은 그저 우연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 별 거 아니에요. 그냥, 저를 대하는 어투가 너무 타인처럼 느껴져서 그런 것이었어요. 예전처럼, 저를 향해 반말을 사용해주시면 안될까요.
- ...반말, 말씀이십니까?
- 네. 회귀 전, 제게 편하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말이에요.
저 둘의 대화를 얌전히 훔쳐 듣던 사라가 눈살을 찌푸리고 만 것은, 아마 이 때쯤이었던 것 같다.
회귀 전과 같이, 반말을 사용해달라고? 역시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저 둘은 과거, 서로 간에 반말을 사용하였을 만큼 엄청나게 친밀한 사이였던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회귀(回歸)라고? 회귀라는 건 대체 뭐지? 그건 대체 무슨 의미의 단어인 것이지? 과거 저 둘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었더라면, 그냥 ‘과거’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굳이 회귀라는 이상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지?
혼란에 빠진 사라가 대화의 아귀를 맞추기 위해 최대한 머리를 싸매고 있던 동안에도, 그녀와는 상관없이 저 둘의 대화는 계속 진행이 된다.
- 카인, 기억하고 계시나요. 아니, 당연히 기억하고 계시겠죠. 회귀 전, 저희가 함께 했던 그 시간들에 대하여.
- ...아리엘.
- 하지만 제가 당신을 존중하듯, 당신 또한 저를 존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당신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저는 이미 당신의 가족이며 당신의 아내이니까요.
카인과 아리엘이 서로를 향해 주고받는 그 대화에, 사라는 더더욱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리엘 티에르라고 하는 여인이, 그저 단순히 카인을 향해 마음을 품고 있던 수준이 아니라 이미 그의 가족이며 아내이기까지 하다고?
‘헛소리.’
아리엘의 그러한 말에 사라는 스스로의 입술을 꽉 깨물고 말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언제나 세계수 곁에 틀어박혀 있었기에 과거의 행적을 파악할 수 없던 키리에와는 달리, 겉으로 드러난 아리엘의 행적은 뚜렷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과거 제도의 연회장에서 카인과 처음 얼굴을 마주하였으며, 한 때 대륙 북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카인과 카스타나 후작 영애의 약혼식 이후 에스텔 공작가에 몸을 의탁하였을 따름이다.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남자와, 아리엘 티에르라고 하는 여인의 과거에는 그 어떠한 접점도 존재하지 않는단 말이다.
그런데 가족이란 것은 무슨 뜻이고, 아내라는 것은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설마 대륙 전체에 여신의 현신이라며 칭송 받는 성직자인 아리엘 티에르는, 고작해야 몇 달 전에 처음 얼굴을 마주한 사내를 ‘가족’이라 여길 정도로 정신이 나간 여자였다는 것일까?
그런데-
- .....
아리엘의 정신 나간 그 말에, 카인은 어떠한 반박도 하지 않는다. 마치, 아리엘이 내뱉고 있는 저 헛소리가 사실이라고 인정하기라도 하는 것 마냥.
대체 어째서? 대체 무슨 이유로, 카인은 아리엘의 말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대체 왜?
“.....”
순간, 사라의 머릿속에 황녀가 그녀를 향해 내뱉었던 말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그녀는 분명, 자신을 눈앞에 두고서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 다른 남자에게 자신의 몸을 서슴없이 맡기는 여자 또한 그리 좋아하지 않거든. 특히, 그 여자가 자네와 관련된 여자라면 더더욱 그러하지. 자네도 알고 있지 않는가. 저 여자는 이미 투르니젠 소공작을 향해 꼬리를 흔든 전적이...
- 저하.
황녀가 자신을 그다지 탐탁지 않아 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째서, 황녀는 수많은 남자들 중 왜 하필이면 투르니젠 소공작과 자신을 얽어맨 것일까? 자신과 투르니젠 소공작 사이의 접점이라고는, 그저 에스텔 공작가에 함께 머물고 있다는 정도 밖에 되지 않는데?
회귀. 가족. 아내. 투르니젠 소공작. 아리엘. 황녀. 앞뒤가 도저히 맞지 않는 기이한 언행. 그리고-
파편화 되어 있던 정보들이 사라의 머릿속을 뛰어다니며 하나의 얼개를 짜 맞추기 시작한다.
카인과 아리엘, 그리고 황녀의 말로부터 유추해낼 수 있는 유력한 가능성은 세 가지.
우선 하나. 아리엘의 머리가 돌아버렸고, 카인은 그저 아리엘을 진정시키기 위해 어떠한 반박도 늘어놓지 않고 있다는 가능성.
다른 하나. ‘회귀’와 같은 키워드는 그저 자신과 같은 ‘외부인’을 앞에 두고서도 태연히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한 일종의 암호일 가능성.
...그리고 마지막 하나. 저들이 말하고 있는 회귀(回歸)라는 것이, 미래에서 과거로 되돌아왔다는 허무맹랑한 말이, 정말로 사실일 가능성.
‘...말도 안 돼.’
순간, 사라는 자신이 머릿속으로 도출해낸 가능성에 대해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말았다.
현 시대의 마학(魔學)에 따르면, 인간은 그 어떠한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시공간에 간섭을 할 수 없다. 예외적으로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마법사는 아주 일부나마 시공간을 다룰 수 있다 전해지지만, 그것마저도 아주 국소적인 영역을 제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목격한 경험이 있지 않던가.
카인의 전속 시녀를 자처하는 하얀 머리의 소녀, 아리아가 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이적(異蹟)을 행사하는 광경을.
아리아라는 소녀가 공간을 다루는 것이 가능하다면, 사실은 시간을 통째로 뒤로 되감는 말도 안 되는 일 또한 사실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현재의 사라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세계의 시간은 한 차례 통째로 뒤로 감긴 전적이 있으며.
카인을 비롯한 그의 주위의 여인들은 ‘모종의 원인’으로 인하여 기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이 들어도 허무맹랑한 미친 소리이긴 하지만, 이러한 가설이라면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이 납득 가능하긴 하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 카인과 아리엘이 실제로 결혼을 하여 부부 사이가 되었으며 모종의 이유로 회귀를 거쳐 과거로 돌아온 것이라면 저들의 대화가 납득이 가능하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 ‘사라 세르나드’가 카인을 져버리고 투르니젠 소공작과 무언가를 함께 하였기에, 황녀는 자신을 그토록 싫어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이 논리고 이유고 뭣도 없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는 사실은 누구보다 사라 자신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여인으로서의 본능은, 그 헛소리야 말로 이 상황을 꿰뚫는 단 하나의 '정답'임이 틀림없다고 그녀의 귓가에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었다.
설마, 정말로-
- 카인이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단어나, 말을 내뱉는 일이 있다면 제게 오도록 하세요. 제가 당신의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
과거, 키리에는 사라를 향해 이리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만일, 카인이 이해할 수 없는 단어나 말을 내뱉는다면, 자신을 찾아오도록 하라고.
혹시, 그 엘프는 사라가 머지않아 처하게 될 이 상황에 대해 미리 예견이라도 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키리에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한 답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자신을 향해 더없이 매혹적인 미소를 비추던 키리에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기에는 흡사 천사와 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사라의 눈으로 보기에는 더없이 불길하게만 느껴지는 그 엘프를 찾아가 현 상황을 둘러싼 진실을 알려 달라 애걸하는 것은 무척이나 꺼려지는 일이 아닐 수 없겠지.
부르르.
사라는 왠지 모르게 떨려오는 자신의 상체를 두 손으로 꽉 하고 붙잡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저들의 대화를 엿듣는 일 따위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후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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