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상실에 걸린 마녀를 주워버렸다-147화 (147/201)

(EP.147)14. 미련의 끝 - 10

쾅-!

아리엘은 문을 최대한 세차게 닫으며 집무실에서 빠져나왔다. 그것은 현재의 그녀가 참 많이도 화가 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명확한 증거이며, 동시에 문을 세차게 닫는 정도만이 현재의 그녀가 카인을 향해 부릴 수 있는 최대한도의 투정이기도 하였다.

짜증이 난다. 이래 뵈도 아리엘은 성직자답게 상당히 보수적인 성격인지라, 데이트 신청을 비롯한 여자를 리드하는 역할은 남자 쪽에서 해야 한다 믿고 있는 여인이기도 하였다. 그런 자신이 자존심이고 뭐고 전부 내려놓은 채 그를 유혹하기 위해 몸소 집무실까지 찾아갔건만, 정작 그는 벌건 대낮부터 다른 여인과 질펀한 정사(情事)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난 며칠간 아리엘은 그를 무슨 낯으로 봐야하는 것인지, 앞으로 그를 어떻게 대해야하는 것인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가슴을 졸이는 나날을 보내고 있을 동안, 그는 자신의 속내도 알지 못한 채 다른 여자와 혀를 섞고 배꼽을 맞대는 등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알고는 있다. 머릿속으로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는 상냥하며 자상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또한 자신에게 애걸하며 사랑을 구걸하는 여자들을 냉정하게 뿌리칠 정도로 냉혹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지 못한다.

자신과 그가 같은 지붕 아래에서 살아온 세월이 무려 10년이나 된다. 그의 사고방식 따위, 지금이라도 손에 잡힐 것만 같이 눈에 훤하게 비춰 보이고 있다. 아마 그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는 모든 여인들에게 동등하게 사랑을 베풀어줄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누구를 편애하지도, 누구를 소홀히 하지도 않으며 모든 여자들을 공평하게 사랑할 생각 따위를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오직 그것만이, 현재의 자신이 그녀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니, 이해는 할 수 있다. 자신 또한 그와 행복한 신혼 생활을 보낼 무렵, 그러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서로 간에 눈만 맞아도 키스를 하고, 낮이고 밤이고 가리지 않고 몸을 섞으며, 혹시 체력이 부족하다면 신성력을 사용해 회복을 해서라도 서로를 향해 품고 있는 열렬한 사랑을 확인하려 애를 쓰던, 그런 시절이 존재하였단 말이다.

아마 대낮부터 비앙카 델 카스타나와 그런 음탕한 짓을 하던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의 일임이 틀림없겠지. 원래 한창 때의 연인들은 그러하다. 사랑에 눈이 멀어, 나중에 돌이켜보면 얼굴을 붉힐 법한 쪽팔리는 일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곤 한다. 더욱이, 키리에의 말에 의거하면 비앙카 델 카스타나는 모든 시간 속에서 카인의 어여쁨을 단 한 번도 받지 못한 불쌍한 계집이라 하였다. 그러니, 지금 저 여자를 저리도 이뻐해주는 것은 그저 동정심에 지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감히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남자의 하나 뿐인 정실임을 자부하고 있는 자신이라면, 남편이 새로 들인 첩 하나 쯤을 애지중지 여기는 일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원래 사내들이란 그런 존재가 아니던가. 새로운 장난감 하나를 얻게 된다면 며칠간은 애지중지하며 가지고 놀다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흥미를 잃어버리는 것은 정해진 순리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부 자신의 착각이었나 보다.

‘...카인...’

그의 집무실에 발을 들여놓은 그 순간, 아리엘은 이 집무실에 자신 말고 다른 여자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고 말았다. 단순한 ‘여인의 직감’ 따위로 그러한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모른 척을 하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집무실에 들어선 순간, 밀폐 되어 있던 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던 ‘냄새’가 그녀의 후각을 자극하고 말았으니까.

끈적끈적하며, 어딘가 모르게 불쾌하게까지 여겨지는 그 냄새.

틀림없었다. 그것은 분명, 남녀 간의 은밀하고 끈적한 분위기에서 비롯된 음취(淫臭)임이 분명하였다.

착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야 그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그와 함께 살아온 기나긴 세월 동안, 그와 잠자리를 가진 것이 셀 수도 없을 정도인데 고작해야 공기 중에 떠도는 음취 하나를 헷갈릴 리가 있겠는가? 그것도 그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헷갈린다고?

...하지만 이 냄새는, 그녀가 익히 알고 있던 음란하고 끈적한 냄새와는 조금 달랐다. 왜냐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카인과 나뒹굴던 여자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이기 때문이겠지.

비록 지금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게 몸을 숨기고 있다지만, 그 여자의 정체가 누구인지는 쉬이 짐작이 가능하였다. 고고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아이리스나 키리에 같은 여자가 자신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길 리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 앞에서 남녀 간의 정사(情事) 장면을 과시한다면 모를까.

결정적으로, 그의 책상 바닥 밑쪽에 흡사 불타오는 듯한 붉은색 머리칼이 살짝 하고 튀어나와 있는 광경이 그녀의 두 눈에 들어왔었다.

정답은 이미 나와있는 것이 마찬가지였다. 비앙카 델 카스타나. 옛날부터 머리가 맛이 가 있다고 생각했던 그 정신 나간 마법사가, 그의 책상 밑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것이 분명했겠지.

“.....”

아리엘의 머릿속에서, 파편화되어 있던 모든 단서가 조립되어 하나의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남자의 책상 밑에 무릎을 꿇고 있던 어느 여인.

집무실을 가득 채우고 있던 음취.

자신과 대화를 하던 내내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참는 기색을 보이던 그의 얼굴.

여기에서 도출되는 정답은 오직 하나.

얼간이가 아닌 이상, 그 둘이 어떠한 일을 하고 있었는지 쉬이 유추해낼 수 있겠지.

발칙하게도 그 둘은, 벌건 대낮부터 어른의 유희를 자행하고 있던 것이다-

까득-!

아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의 엄지손톱을 잘근하고 씹어버리고 말았다.

그에게 언제 보일지 몰라 아침마다 단정하게 가꾸고 있던 손톱이었건만, 그 따위 사실은 이미 아리엘의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싸구려 창녀보다 못한 년 같으니. 벌건 대낮부터, 그런 상스러운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다니.

침을 꿀꺽하고 목구멍 뒤편으로 삼킨다. 하지만 고작해야 침 따위로, 이토록 애 타는 갈증을 멎게 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마, 카인이 원해서 한 일은 아닐 것이다. 애당초 그에게는 어떠한 잘못도 존재하지 않는다. 필시, 그 천박한 몸뚱이를 들이밀어 그를 유혹한 것은 붉은 머리의 마법사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적어도 아리엘은 그것이 진실이라 믿고 있었다.

카인이 그럴 리는 없다. 카인은 언제나 옳다. 카인은 언제나 상냥하다. 카인은 언제나 자상하다. 카인은 언제나 깨끗하다. 카인은, 여타에 널려 있는 쓰레기 같은 남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남자란 말이다.

...절대로 아니다. 카인은 대낮부터 다른 여자를 향해 손을 들이밀 남자는 결코 아니다. 그러니 나쁜 것은 오직 하나, 비앙카 델 카스타나 하나뿐이다.

전부, 전부 그 여자 탓이다. 자신이 크게 마음을 먹고 아이를 가지기 위해 그를 찾았건만, 끝내 관계를 맺겠다는 소리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뒤로 물러서게 된 것은 전부 그 여자 탓이다. 단 한 번도 그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변변찮은 반푼이 같은 여자라 생각해 그녀를 긍휼히 여겼던 지난날의 자신이 한심하게만 여겨진다. 이래서야, 누가 누구를 불쌍히 여겼는지 우습기만 한 노릇이 아니던가!

까드득-

버티다 못한 그녀의 엄지손톱이 부러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아무런 감흥도 없이, 이번에는 검지손톱을 깨문다.

깨물 수 있는 손톱은 아직 아홉 개나 남아 있었으니까.

지금 당장, 집무실 안쪽으로 쳐들어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 그리고 성녀니 여신의 대리니 그 따위 아무 짝에 쓸데 없는 자존심은 전부 내팽겨 버린 채 그를 향해 싹싹 빌고 엎드려 매달리고 싶다. 당신이 지금 그 여자와 뒹굴어도 상관없고, 그 여자의 냄새를 전신에 잔뜩 묻히고 있어도 상관없으며.

...그 여자까지 포함해서 집무실에서 셋이서 나뒹굴어도 상관없다고 말을 했어야하는 것은 아닌가, 후회를 해버리고 말았다.

혹시 모를 가능성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설마, 설마 비앙카 그 여자가 이번 일을 계기로 하여 카인의 아이를 임신이라도 하는 것은 아닌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저번에 아이리스가 그녀를 향해 아이를 가지니 어쩌니 하며 엄포를 늘어놓았지만, 아이를 갖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님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고작해야 한두 번 관계를 가진다해서 아이를 가질 것 같았으면, 아이리스 또한 이미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였겠지.

...에이, 설마. 아니겠지.

그래, 아니다. 카인을 믿도록 하자. 방금 전, 카인은 약속했다. 자신이 아기를 가지기 전까지, 피임만큼은 신경을 쓰기로. 아니야, 혹시 몰라. 설사 피임을 한다 하더라도 사람 일이라는 것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일이니. 설사 신경을 쓴다 하더라도 거슬리는 문제가 있다. 비앙카 그 여자는 대마법사이다. 혹시 이상한 마법을 사용해 아기를 가지기 위해 어떤 간교한 수작을 부릴지 모르는 여자란 말이다. 물론 아리엘이 아는 한 인위적으로 임신을 하게끔 유도하는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임신을 하는 것에 그 정도까지 인위적인 요소가 개입이 된다면 그것은 신생아가 아니라 호문클루스나 키메라라고 부를 수준일 테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니 비앙카 그 여자는 제정신이 아니잖아. 또한, 다른 사람의 애정에 굶주려 있는 여자야. 누구보다 먼저 그의 아이를 가지기 위해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르는 여자란 말이지. 비앙카가 아니더라도 아이리스는 또 어때. 그 여자가 이미 임신이라는 말을 한 번 입에 담은 이상 그 여자의 행동 또한 예의주시해야겠지. 또 아리아는? 그리고 키리에는? 그런데 엘프와 인간 사이에 임신이 되던가? 아, 싫다. 정말로 싫다. 그의 주변에는 왜 이렇게 여자가 많은 것일까. 왜 이렇게 신경을 쓸 요소가 많은 것일까. 돌아가고 싶어. 아무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와 행복하기만 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그곳에서는 그저 카인과 행복한 세월을 보내기만 했는데, 오직 우리 가족 셋만 있었는데-

“...저기, 아리엘님? 아리엘님?”

“...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리엘의 눈앞에는 사라가 존재하고 있었다.

“괜찮으신가요? 어디 편찮으신 것은 아니시죠?”

아직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아리엘이 걱정되는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사라.

“...그, 당신은 대체 어째서 여기에?”

아무리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고 한들, 평범한 여인인 사라가 접근하는 것을 눈치조차 채지 못하다니.

“...아, 아리엘님께 예의 치료를 받을 시간인데 제게 와주시지 않으셔서요. 혹시나 해서 소공작님의 집무실 쪽으로 와보니, 집무실 안쪽에서 소공작님과 이야기를 나누시는 소리가 바깥쪽까지 들려서 그냥 조용히 대기를 하고 있었답니다.”

...그러니까, 사라의 말을 종합해보자면 그녀는 처음부터 집무실 바깥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다는 말인데.

어째서 집무실에서 나온 아리엘은, 처음부터 이곳에 서 있었다던 사라를 인지하지 못한 것일까.

“...저기, 그런데 아리엘님.”

“왜 그러시죠, 사라.”

아리엘이 사라를 향해 최대한 온화한 어조로 대답을 하자, 사라는 그녀의 두 손을 바라보며 걱정된다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손톱... 정말로 괜찮으신가요?”

“...네?”

사라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를 하지 못한 아리엘이 자신의 손톱들을 확인해 보니.

아리엘의 손톱들은 이미 거칠게 뜯겨져 나가 있는 상태였다.

...그것도, 열손가락의 손톱들이 전부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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