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5)14. 미련의 끝 - 08
최근 들어, 아리엘은 카인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껄끄럽게 여겨지기만 했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그를 향한 거북한 마음이 솟아오르는 것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만큼 아리엘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가 처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그의 곁에 있는 여자들은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를 들어 그와 혼약을 맺기로 약조한 황녀라던가, 아이리스라던가.
- 그의 아이는, 내가 열 달 뒤에 낳을 예정이거든. 나는 그와의 사랑의 결실이 생겨서 좋고, 그대는 배가 아플 필요가 없으니 서로에게 아주 좋은 거래가 아닌가?
그 여자가 자신의 아랫배를 살살 문지르며 자랑스레 지껄이던 말을 떠올린다면 아직도 울화통이 터져 오른다. 황녀와 맞서 싸우던 당시, 그 여자의 아랫배를 집요하게 노리며 최대한 강하게 발길질을 하긴 했지만 정말 유감스럽게도 몸이 튼튼한 것 말고는 장점이 없는 여자인지라 그다지 피해를 입지 않은 것 같았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지막 순간, 손끝에 망설임이 들어가지만 않았더라면 그 여자의 하반신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었을 텐데-
사실, 자신 앞에서 감히 아이를 운운한 아이리스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다름 아닌 카인이었다. 애당초, 그가 그 여자의 유혹에 홀딱 넘어가지 않았더라면 아무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나쁜 놈.”
아리엘은 바닥에 나뒹굴던 돌멩이를 발로 차며 그리 중얼거렸다. 발끝에 힘이 조금 과도하게 들어간 나머지 돌멩이가 저편으로 튕겨나간 것이 아니라 둘로 쪼개져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았지만, 그런 사소한 장면 따위 아리엘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녀의 두 눈은, 둘로 쪼개져버린 돌멩이 따위가 아니라 과거의 아련한 언젠가를 비추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인기척이 드문 곳에 세워진 아기자기하고 그림과 같은 오두막. 평생 자신만을 사랑하게 주겠다며 호언장담하던 그의 모습이.
그와 함께한 과거의 10년, 자신은 참으로 행복했다. 일부로 인적이 드문 곳에 가서 살았기에 물질적으로는 행복한 시간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와 함께했던 시간 속에는 아리엘이 지금까지 꿈꿔왔던 모든 것이 깃들어 있었다.
헌데 10년 전으로 회귀를 하고 나니, 상황은 모조리 반전이 되어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곁에는 여자가 득실거리고 있었다. 아니, 득실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곁에는 이미 한 손으로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여자들이 넘쳐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제국의 공작이며, 설사 부인을 몇 명이나 거두어도 상관없는 지위에 올라 있는 남자였으니까.
...하지만,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해서 자신의 마음에 든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다.
사실 다른 여자들이 그에게 매달리는 모습을 보며 아주 살짝, 뿌듯함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오직 나 혼자만이 저 사람을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구나, 다른 여자들이 보기에도 저리 매달릴 만큼, 저 남자는 객관적으로 보아도 참 괜찮은 사람이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흡족함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카인이라는 남자 한 명을 두고서 다른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는 이 상황이 지독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과거, 자신의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의 어머니만을 바라봐주셨다. 과거, 자신이 알고 있던 ‘카인’은 다른 여자들 따위는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오직 자신만을 바라봐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째서, 다른 여자들과 그의 사랑을 나누어가져야만 하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단 말이다.
싫다. 정말로 싫다. 오직 자기 혼자서만 그의 마음을 독점하고 싶었다. 그의 자상함이, 오직 자신만이 향하였으면 한다. 그의 아련함을, 오직 자신만이 독점하였으면 한다.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것만 같은 그의 사랑을, 오직 자신만이 독점하였으면 한다.
...하지만, 이제는 무리일 것이다. 과거와 같이, 자신 혼자서만 그의 곁에 있는 유일한 여인으로 남게 되는 일 따위는 이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자신 뿐 만이 아니라 다른 여자들을 위한 공간이 생겨버리고 말았으니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남자는 정말 개자식임이 분명한 것 같았다. 평생 자신만을 사랑해주겠다며 귓가에 달콤한 말을 잔뜩 속삭일 때는 언제고, 정작 회귀를 하고 나서 첫 경험은 비앙카와 치러 버린 것도 모자라, 이제는 황녀와 혼인을 하겠다며 제국 전체에 떠들고 다니기까지 하다니.
모조리, 한 발 짝 뒤처지고 말았다. 그와 소중한 처음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다른 여자들에게 모조리 빼앗기고 말았다.
첫 키스도, 첫 데이트도, 첫 약혼 발표도, 첫 관계도, 전부 다른 여자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뒤쳐진 셈이 아니던가. 이래서야 자신이 나중에 무엇을 해준다고 한들, 그는 심드렁해 할지도 모른다. 아니, 설사 그럴 의도가 없더라도 무의식적으로 자신과 다른 여자를 비교해버릴 지도 모른다. 만약 여자를 대하는 태도가 묘하게 익숙하다던가, 자신과 관계를 맺을 때 능숙함 같은 것을 선보인다면 아리엘은 정말로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첫 키스도, 첫 데이트도, 첫 약혼 발표도, 첫 관계도, 전부 다른 여자에게 빼앗겨버리고 말았지만, 그래도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아이를 가지는 것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어.”
그가 다른 여자를 사랑해도 괜찮다. 키스를 하더라도 괜찮다. 죽도록 마음에 들지 않긴 하지만, 설사 관계를 맺더라도 꾹 참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만큼은 안 된다. 아이를 가지는 일만큼은, 어느 누구에도 양보할 수 없었다.
그는 무조건, 자신과 먼저 아이를 가져야만 한다.
그는 무조건, 자신과 낳은 아이를 우선시 해줘야 한다.
그는 무조건, 자신과 낳은 아이를 사랑해줘야만 한다.
여기까지가, 아리엘이 카인에게 양보할 수 있는 최대한도의 선이었다.
그렇다면, 해답은 아주 간단하지 않는가.
“지금 당장 그와 함께 아이를 만들면 되겠네?”
아리엘은 키득거리며 자신이 내놓은 해답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보이고 말았다.
어차피 이미 한 번 경험해 본 일이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는 더욱 쉬운 일이 않겠는가.
아리엘의 가장 큰 장점은, 이런 일에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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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에스텔 공작령을 둘러싸고 있는 재정 상황은 급속도로 나아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도통 파악할 수는 없었다만, 최근 들어 에스텔 공작령 내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지가 늘어나기도 하였고, 카스타나 후작가에서 매달 들어오는 상납금이라던가 아이리스가 ‘혼수’라는 명목 하에 가지고 온 막대한 액수의 재화 등을 전부 합산해보니 공작가의 몇 년치 예산 정도는 가볍게 뛰어넘는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던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막대한 액수의 돈을 창고 안에다만 가만히 쳐 박아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이는 자연스레 예산 편성이라던가 사업 창출 등과 같은 업무량의 증가로 이어지게 되었다.
사실, 실질적인 업무 기획이나 처리는 재무관을 맡고 있는 사라의 몫이었으며 나는 그저 서류를 검토하거나 결재하는 역할만 떠맡고 있었음에도 내가 처리해야 하는 서류의 양이 문자 그대로 살인적이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양이었기에 매일 같이 눈코 뜰 새 없는 바쁜 나날이 이어지고 있던 와중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집무실에서 서류와 눈싸움을 벌이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할 무렵, 에스텔 공작가 내에서 한가롭기로 따지자면 가볍게 세 손가락 안에는 들 수 있을 것 같은 인물인 비앙카가 집무실의 문을 열고 어슬렁어슬렁 걸어 들어왔다.
“한가해?”
현재 내가 처한 꼬락서니를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뻔뻔스럽게 그러한 질문을 던지는 비앙카.
“아니, 전혀.”
“뭐야, 이럴 때는 빈말이라도 한가하다고 대답해야 하는 거 아니야?”
뭐가 그리 불만인지 비앙카는 나를 향해 입술을 삐죽였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와 한가로이 말씨름이나 할 시간은 없었다. 오늘까지 처리해야만 하는 서류가 잔뜩 놓여 있는 상황에서 그녀를 향해 정신을 쏟을 기색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미안하지만, 나 오늘은 진짜 엄청 바쁜데. 내일 마저 이야기하면 안 될까?”
“...너, 어제도 나한테 그 소리 한 거 알고는 있어? 네가 바쁜 건 이해하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잠깐의 시간을 투자하는 것마저도 아까워하면 안 되지. 난 이래 뵈도 네 예비 신부인 몸이라고.”
...저렇게까지 나온다면 이쪽에서는 할 말이 없긴 하다. 최근 들어 업무를 핑계로 하여 비앙카나 아이리스와 같은 여인들을 소홀히 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긴 하였으니.
“여하튼, 네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는데 말이지. 나는 네게 한 치의 가감도 없이 진실로서 답을 해줄 것이라 믿고 있어.”
“....나중에 물어보면 안 될까? 말했다시피 지금은 좀-”
“뭐, 네가 답하기 곤란한 질문까지는 아니고. 아주 간단한 질문인데 말이지.”
“.....”
아무래도 비앙카에게 있어 내 의견 따위는 고려사항에 들어가 있지 않았던 것 같았다.
비앙카는 뭐가 그리도 거창한 말을 하려는지 한 차례 목소리를 가다듬고, 나의 얼굴을 힐끔하고 쳐다보더니 이내 나를 향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 왔다.
“너 말이야, 황녀 그 여자랑 진짜로 했어? 정말로 야외에서 그 짓을 했어?”
“.....”
비앙카의 질문은, 나의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은 무척이나 고상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하아, 정말 했구나. 살짝 긴가민가하기는 했었는데, 야외에서 그 여자와 나뒹굴었다는 말이 정말로 사실이었구나.”
그리 말을 하는 한숨을 내쉬는 비앙카의 얼굴은 의외로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무언가가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는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기만 할 뿐.
“...화라도 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담한 표정인데.”
나의 솔직한 감상에, 비앙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넌 내가 등신인줄 아니? 그 날 밤, 황녀가 입은 드레스가 그토록 구겨지고 흐트러져 있었는데 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눈치 채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라 생각하는데.”
그리 말을 하더니, 비앙카는 내 쪽으로 살며시 다가와 나의 귓가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나저나, 그런 쪽이 네 취향이었어? 그러니까 침대 위에서 하는 것보다는 옷을 입고 야외에서 하는 것을 더욱 선호하는 타입?”
“.....”
대체 왜 나는 벌건 대낮에 나의 집무실에서 비앙카와 이런 대화를 나누어야만 하는 것일까.
“...이런 음담패설은 제발 침대 위에서만 해주면 안 될까.”
“침대 위는 무슨. 너 요즘 나하고 안한지 엄청 오래 됐잖아. 거기다가 요즘 들어 낮이건 밤이건 그 놈의 서류만 붙들고 있으니 이런 대화를 나눌 시간이 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야?”
...비앙카의 말이 맞긴 하다. 굳이 말을 하자면, 비앙카에게 납치를 당했던 그 때 이후로는 관계를 맺은 적이 없긴 하였으니.
“내 입으로 말하긴 조금 그렇지만, 나도 한창 때의 여자야. 안 그래도 하나 밖에 없는 약혼자라는 남자가 상대해주지 않아 홀로 외롭게 독수공방이나 하고 있던 찰나에, 내 사랑스런 약혼자가 그 사이를 못 참고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었다고 하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더라고.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않아?”
...솔직히, 이것만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기는 하였다.
“뭐, 됐어. 네 옆에 여자가 넘치도록 많다는 것쯤은 진작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는걸. 그러니 누구를 탓하겠어. 나는 네가 황녀 그 여자와 나뒹굴었다고 탓하기 위해 너를 찾아온 것이 아니야. 나는 정말로 네 취향이 어떤지 알고 싶었던 것뿐인걸.”
그리 말을 하더니 비앙카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보이며 서류가 잔뜩 놓여 있는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그 바람에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서류가 몇 장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지만 그녀도 나도 그런 것 따위는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고 있었다.
비앙카의 적안이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대체 어떤 의도로 책상 위에 걸터앉아 있는 것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 벌건 대낮부터 나를 유혹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침대 위가 아니라 나의 집무실 한 가운데에서.
“내가 너 때문에 공부를 좀 해봤는데 말이지, 남자들은 단순히 침대 위에서 뒹구는 것보다 이런 일탈을 더 즐긴다 하더라고.”
“...일탈?”
“그래, 예를 들어 업무 용도로 밖에 이용하지 않는 집무실에서 업무 이외의 일을 한다던가...?”
그 말과 함께, 비앙카가 나를 향해 서서히 다가온다. 그녀의 향긋한 체향이 나의 코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어때? 가끔씩은, 일상에서 벗어난 일탈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그리 말을 하며 손으로 나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비앙카. 그녀의 손길에, 나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려고 하던 그 찰나-
똑똑.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카인,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어서 그러는데, 제게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것은 다름 아닌, 아리엘의 목소리였다.
“...어, 괘, 괜찮아.”
원체 당혹스러웠던 나머지, 아리엘의 말에 거절을 표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 동의를 표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들어가도록 할게요.”
끼익-
차마 말을 번복할 틈 사이도 없이 1초 뒤, 문이 열리며 여느 때와 같이 정갈한 복장을 갖춰 입은 아리엘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죄송해요. 한창 업무를 보느라 바쁘신 와중에, 개인적인 용무로 시간을 빼앗게 되어서 말이에요.”
그리 말을 하며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하고 숙여 보이는 아리엘이었지만, 매우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녀의 말에 동의를 표할 수가 없었다. 아니, 동의를 표할 정신이 존재하지 않았다.
“.....”
하필이면 비앙카가 아리엘의 눈을 피해 숨은 장소가, 다름 아닌 나의 책상 아래쪽이었으니까.
애당초, 아리엘의 눈을 피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는데도 굳이 책상 밑에 들어가 몸을 숨긴 이유가 눈에 훤히 들어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비앙카는 오늘 정말 작정하고 나를 찾아온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