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상실에 걸린 마녀를 주워버렸다-144화 (144/201)

(EP.144)14. 미련의 끝 - 07

세계수의 수호자이자, 무려 천 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대수림과 동족을 수호하는 사명을 짊어온 고귀한 엘프인 키리에 엘 데나리스는, 최근 들어 무척이나 한가하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겉으로만 보기에는 인세의 극치에 달한 아름다움과, 한낱 들풀조차 꺾지 못할 정도로 가련함을 겸비하고 있는 자애로운 엘프로 밖에 보이지 않지만, 실은 그녀가 어떠한 존재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카인이나 아이리스, 그리고 비앙카가 보기에는 살아 움직이는 폭탄이 에스텔 공작령을 걸어서 배회하는 것을 목격한 듯한 끔찍한 기분 밖에 들지 않았다.

키리에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 부대껴 온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키리에는, 근본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같은 원정대의 대원이었던 카인이나 비앙카와 같은 이들을 대하는 취급은 그나마 낫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그들을 특별하게 대하는 것일 뿐 키리에가 인간이라는 종(種)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 저는 인간을 싫어해요. 인간들이란 근본적으로 스스로가 자아낸 업(業)에 의해 자멸하는 생물. 본인 스스로만 자멸한다면 별 상관없지만, 그들의 어리석음은 세계 그 자체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너무도 많죠. 마치, 이번 경우처럼 말이에요.

- ...공작령 한가운데에 마녀가 출현한 것은 저희가 자초한 일이 아닙니다만.

-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과거 원정대에 속해 있을 무렵, 그녀는 대륙 전체에 겨울이 휘몰아친 근본적인 원인이 전부 ‘인간 탓’이라는 추측을 아무렇지도 않게 남발할 정도로 인간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와 더불어, 끝까지 스스로의 의견이 옳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꼰대 같은 면모도 존재하였다.

사실, 그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지. 키리에 엘 데나리스라는 엘프는 겉으로만 보기에는 싱그럽기 짝이 없는 풋풋한 외모를 자랑하는 여인이었지만, 그녀의 본질은 지금까지 수백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온, 걸어 다니는 역사책과 같은 존재임이 분명하였다.

그렇기에 걱정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키리에가 수백년을 살아온 늙은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녀의 겉모습에만 현혹이 되어 껄떡대는 멍청이가 하나 등장하기라도 한다면 그 날 에스텔 공작령에는 피바람이 휘몰아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의 걱정은 전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에스텔 공작령에 머물러 있는 동안 키리에는 마치 휴가라도 온 것 마냥 느긋한 태도로 공작령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만 할 따름이었으며.

인간을 길가의 돌멩이처럼 여기던 평상시의 행실과는 달리, 키리에는 특유의 향긋한 풀내음을 흩뿌리는 것과 동시에 입가에는 자애로운 미소만을 지어보이며 다른 사람들과 순순히 어울리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그녀는 에스텔 공작과 함께 차를 마실 때면 자신에 비하면 핏덩이라고 할 수 있는 공작을 향해 고개를 숙이거나 그에게 사근사근한 존댓말을 사용하는 등, 의외로 인세의 예의범절에 상세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혹은 공작령의 농경지를 방문하여 농민들의 농사일을 거들어주는 등의 자상한 모습을 연출하기까지 하였다.

놀랍게도, 키리에는 에스텔 공작령에 도움이 되어주고 있었다. 아니, 정말 커다란 도움이 되어주고 있었다.

키리에의 손길이 닿은 작물들은 설사 죽기 일보 직전의 작물일지라도 마치 마법처럼 되살아나 금방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였으며, 원래 건강했던 작물은 이전보다 훨신 월등한 생명력을 얻어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기에 이르렀다.

키리에가 한 번 쓰다듬어 준 감자가 며칠 지나지 않아 수박만한 크기로 성장했다는,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가 에스텔 공작령 전체를 떠돌아 다녔으며 카인 또한 그 농담 같은 이야기에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날 저녁 수박만한 감자가 진상되어 공작가의 저녁 테이블에 올라오기 직전까지의 이야기였지만.

좌우지간, 그렇게 키리에는 자신의 본성을 철저하게 감춘 채 에스텔 공작령의 모든 이들의 민심을 얻는 일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키리에가 에스텔 공작령 전체를 마치 자기 집 안방 드나들 듯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참으로 못마땅하게 여기는 여인이 한 명 존재하였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키리에의 천사 같은 외모에 눈이 돌아가 그녀가 하는 행동을 전혀 의심치 않을 테지만, 직접 대수림까지 찾아가 그녀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목격한 경험이 있는 아리아로서는, 심히 걱정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간을 그저 흥미로운 장난감과 같다 생각하고 있으며, 너무 오랜 세월을 산 끝에 머리가 맛이 가버린 저 엘프가 단순한 호의에서 말미암아 사람들을 도와주고 다닐 리는 결코 만무한 노릇이었으니.

그렇다고 해서 카인이 저 엘프를 스스로의 손으로 밀어낼 리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지. 왜냐하면 저 엘프가 이미 동네방네 신나게 떠들고 다닌 것처럼, 그녀는 카인과 매우 가까운 사이에 놓여있는 여인이었으니까.

결국, 저 엘프가 대체 어떤 꿍꿍이속을 품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 하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적어도, 아리아의 판단에 의거하자면 그러하였다.

“...키리에님. 잠시 둘이서만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데, 혹시 시간이 괜찮으신가요?”

“당신의 부탁이라면, 얼마든지요.”

예상 외로, 키리에는 아리아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여 주었다.

자신이 마치 에스텔 공작가의 안주인이라도 되는 것 마냥, 아리아를 응접실로 안내하더니 이내 그녀 앞에 홍차를 내려놓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자니 왠지 모르게 무언가가 무척이나 아니꼽게만 여겨졌지만, 그럼에도 아리아는 끝까지 평정심을 잃지 않고자 노력하였다.

왜냐하면, 아직 본격적인 대화는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

“후후, 홍차 맛이 어떠신가요? 세계수 근처에서만 재배가 가능한, 일 년에 얼마 생산되지 않는 아주 귀한 찻잎인지라 다른 사람한테 꼭 대접을 해주고 싶었답니다. 아마, 당신께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으리라 믿어요.”

아리아를 바라보며 느긋한 어조로 중얼거리는 키리에를 가만히 바라보며, 아리아는 그녀를 향해 나지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차는 즐기지 않는 성격인지라. 그보다, 저는 당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우선시하고 싶군요.”

“그런가요? 조금은 아쉽네요. 저는 아리아 당신과 대화를 나누기 이전에 친분을 쌓고 싶었거든요. 조금 노골적으로 표현해 보자면, 당신과 조금 더 친밀한 사이가 되고 싶었답니다.”

“...친밀한 사이요? 그건 친구가 되자는 의미인가요?”

“친구라니요, 설마.”

키리에는 티 한 점 없는 밝은 웃음을 유지하며 대답을 하였다.

“저 같은 것이 어찌 감히 당신 같은 분과 친구가 될 수 있겠나요. 아리아, 당신 위에 설 수 있는 존재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듯, 당신 곁에 나란히 설 수 있는 이 또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답니다. 아, 카인은 예외로 하도록 하죠.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당신께서 그의 곁에 머물고 있는 이유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요.”

“.....”

“참으로 애처롭군요. 서로가 서로를 마주하고는 있지만, 손끝이 아슬아슬하게 교차하는 카인과 당신의 사이가, 제게는 무척이나 애처롭게만 느껴져요. 한 발짝, 한 발짝만 더 다가선다면 그를 가질 수 있을 텐데, 그나 당신이나 마지막 한 발짝만큼은 쉽사리 다가서지 못하고 있죠. 그야 그럴 수밖에요. 왜냐하면 당신은-”

“키리에.”

순간, 아리아의 입에서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말았다.

“적당히 하시죠. 저는 그런 말을 듣기 위해 당신과 마주앉아 있은 것은 아니니까요.”

“이런, 만일 제 발언이 기분이 나빴더라면 사과드리도록 하죠. 하지만 오해 마시길. 저는 그저 눈에 비추어지는 광경을 그대로 입에 담았을 뿐이랍니다? 당신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나이가 먹을수록 늘어가는 건 오지랖 밖에 없어서 말이죠.”

실로 여유로운 태도로 홍차를 홀짝이며 그런 말을 늘어놓는 키리에로부터는, 놀라울 정도로 진정성 따위는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잡소리는 거기까지만 하면 좋겠군요. 키리에, 당신도 방금 말했다시피, 저와 당신 사이는 그런 흰소리를 주고받을 만큼 친밀한 사이는 아니니까요.”

방금 전의 대화를 통해, 아리아는 새삼스레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역시, 저 여자는 정말 껄끄럽기 짝이 없는 여자임이 분명하다-

“키리에, 제가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은 오직 하나뿐이랍니다. 당신은 지금, 대체 무슨 속내를 가지고 그리 행동을 하는 것이지요?”

“속내라니요?”

키리에는 아리아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마치, 아리아의 말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인 것 마냥.

“당신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래요. 전에 대수림에서 마주하였을 때만 하더라도, 당신은 인세에 별다른 흥미를 비추지 않았잖아요. 또한, 당신은 인간을 상당히 싫어하기까지 하죠. 아마, 카인님이 아니었더라면 당신은 세계수의 곁을 영원히 떠나지 않았겠죠.”

“뭐, 틀린 말은 아니로군요.”

아리아의 그 말에, 키리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자신은 갑자기 인간에 대한 애정이 솟구쳐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굳이 이유를 대자면, 공작령을 돌아다니며 인간들을 도와주는 것도 절반쯤은 심심풀이에 불과한 여흥에 지나지 않았으니.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나머지 절반은 단순한 여흥이 아니라는 의미겠죠?”

“.....”

“그 이유가 뭐죠?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인간에 대해 일말의 애정조차 갖지 않은 당신의 숨은 의도에 대해 저는 묻지 않을 수가 없군요. 왜냐하면 저는, 카인님의 시녀이자 에스텔 공작령의 전속 마법사이니 말이에요.”

꼿꼿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리아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키리에는 피식하고 미소를 지어 보인다.

“방금 전의 그것은 저를 향한 명령인가요, 아니면 질문인가요? 만일 명령이라면, 순순히 대답하도록 하죠. 당신이라면 제게 명령을 내릴만한 자격이 있으니 말입니다.”

“...명령이요? 한낱 시녀에 지나지 않는 제가, 감히 키리에 당신에게 말인가요?”

아리아가 자신의 눈살을 찌푸리며 그리 묻자, 키리에는 그저 쿡쿡하고 웃기만 할 따름이었다.

“이런, 이제 와 아무 것도 모르는 척만은 하지 말아 주시길. 제가 설마 당신과 같은 분이 아직까지도 기억을 잃은 순진한 시녀로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믿을 것이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 아닐 수 없답니다.”

“.....”

“아무래도 부탁은 아닌 것 같으니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부터 하기로 할까요. 정말 유감스럽게도, 저는 정말로 순수한 호의에서 공작령의 인간들을 도와주고 있던 것이랍니다. 물론, 당신의 추측대로 다른 이유가 포함되어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기는 하지요.”

그리 말을 하고 있는 키리에의 입가의 미소가 더욱 짙어진다. 마치, 아리아를 마주한 그 순간부터 이 말을 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고 외치는 것 마냥.

“그거 아시나요, 아리아? 저도 이곳에 도착해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의 에스텔 공작령은 매우 부유하고 풍족한 땅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대체 어찌된 일인지, 천 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이 땅은 급속도로 지력에 메말라가고, 토지 그 자체가 척박하게 변화하였으며, 날씨 또한 짓궂기가 말로 다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고 하더군요. 마치, 누군가가 이 땅 위에 저주라도 내린 것처럼 말이죠.”

마치 변사마냥 과장된 어조로 말을 늘어놓는 키리에를 바라보면서도, 아리아는 차마 어떠한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참, 신기한 노릇이 아니지 않나요? 비록 천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지만, 한 때 대륙 전체에서 손꼽힐 정도로 부유했던 땅이 이렇게 급속도로 궁핍하게 변화하였다는 것이? 물론, 저는 우연이라고 믿고 있답니다. 아니, 우연이 아니면 곤란하죠. 그 말인 즉슨, 누군가 인위적으로 이 땅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의미일테니 말입니다.”

“.....”

“제가 인간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말을 들으니 측은지심이 드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더군요. 참으로 가엾지 않나요, 아리아? 만일 이 땅이 천 년 전과 같았더라면, 카인 또한 영지를 다스리느라고 이토록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더욱더 풍족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 고작 해야 돈 몇 푼 때문에, 그리 고생을 할 이유도 없었을 텐데.”

키리에의 목소리는 아주 나지막하였지만, 아리아의 귓가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응접실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당신께서도 아시다시피, 저와 그는 운명의 끈으로 묶여있는 반려 사이랍니다. 남편 된 이의 영지사정이 이리도 궁핍하다는데, 아내 된 이로서 가만히 손만 놓고 지켜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 아니지 않을까요? 적어도, 가만히 방관만 하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만.”

“...방관?”

아리아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떨려 나오고 말았다. 방관이라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위가, 방관이라고?

“예, 방관이요. 제 아무리 몰랐다고는 하지만,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눈앞에 있는데 잘못을 사과하지 않고 그 사람을 외면하는 행위를 일컬어, 우리는 방관이라고 한답니다. 만약 잘못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다가가 모든 죄를 고하고 사죄를 구해야 되지 않을까요?”

지금 이 순간, 키리에의 말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 것인지는 너무도 명백하였지만.

그럼에도, 아리아는 키리에의 말에 어떠한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방금 전 키리에의 말마따나 자신은 겁쟁이마냥, 카인에게 그 어떠한 진실도 털어놓기를 주저하고 있었으니까.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카인이 자신을 어떠한 눈초리로 바라볼지, 지금과 같이 자신을 대해줄지, 자신을 ‘시녀 아리아’가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대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이러지는 것 같았기에.

숨겼다. 모든 진실을 감추었다. 그의 곁에서만큼은,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보잘 것 없는 소녀, 아리아로 남고 싶었기에.

하지만-

그런 아리아의 걱정을 잘 알고 있다는 듯, 키리에는 미소를 지어 보인다.

“걱정하지 마시길. 저는 어디 가서 이러한 말을 흘리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니. 그러니 약속드리겠습니다. 방금 전의 그 이야기는, 오직 저희 둘만의 비밀로 남겨둘 것을 말입니다.”

그리 말을 하며, 키리에는 아리아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다.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정중하고 우아한 예를 갖춰 올리며.

“사계절 중 겨울을 관장하시는, 우리의 우둔한 어머니시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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