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3)14. 미련의 끝 - 06
제도로 떠났던 카인이 다시금 에스텔 공작가에 돌아왔다.
카인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난 뒤, 에스텔 공작가의 어느 누구보다 가장 먼저 그에게 달려간 이는 다름 아닌 사라였다.
어딘가 모르게 두근거리는 마음을 고이 접어둔 채, 그 소식을 접한 사라가 가장 처음에 한 일은 바로 아주 얇고 고운 천으로 만든 여름용 외출복 한 벌을 옷장에서 조심스레 꺼내어 갈아입는 일이었다.
평상시에는 마치 상복(喪服)을 착용한 것 마냥 투박하고 소소하기 짝이 없는 검은색 관리복만을 입고 업무에만 열중하던 그녀였지만, 차마 카인 앞에서 만큼은 자신의 그러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과거, 그녀가 세르나드 백작가의 영애이던 시절, 그녀는 카인을 만나러 올 때 마다 언제나 자신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아름다운 드레스만을 골라 입은 채로 에스텔 공작가를 방문하곤 했었다.
설사 그럴 의도가 없더라도, 자신이 이런 투박한 복장을 걸친 채로 그를 만나러 간다면, 그는 자연스레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비교하고 말 것이다. 혹시 어쩌면 과거의 ‘사라 세르나드’는 아름다웠는데, 현재의 ‘사라’는 과거에 지녔던 외모가 전부 쇠하고 말았구나, 와 같은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상상만 해도 싫었다. 설사 자신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에 불과할지라도, 카인이 그런 생각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빨리 그를 보러 가고 싶음에도, 사라는 거울 앞에 선 채로 자신을 최대한 단정하게 꾸며 나갔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전체적인 옷차림을 한 차례 살펴본 후, 거울 속에 비춰지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지그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명심하도록 하자. 자신은 지금, 소공작께서 에스텔 공작가에 부재중인 동안 그의 전권을 위임받은 대리인으로서 처리한 일들에 대해 보고를 하러 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이렇게 스스로를 단정하게 꾸미는 것도, 자신의 상관이라고 할 수 있는 소공작을 만나기에 앞서 차려야 하는 기본적인 예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결코, 다른 생각은 하지 말도록 하자. 그 어떠한 상상도 하지 말도록 하자. 자신과 그는 더 이상 어떠한 관계도 아니며, 자신은 이미 그를 향한 모든 마음을 내려놓은 지 오래였으며.
결정적으로, 그의 곁에는 이미 미래를 함께하기로 약조한 여자들이 몇 명이나 존재하니까.
구질구질해지지는 말자, 사라.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고작해야 남자 하나 때문에 울고불고 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추해 보이는지.
아마 자신은 웃으면서 그를 보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 어느 때나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그리 생각을 하니 사라의 마음은 다소 편안해졌다. 그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그를 향한 고통이 끝을 맺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지금은 그것으로 족하다 생각하니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사라는 어느 새 그의 집무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고작해야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그가 저편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왠지 모르게 문을 여는 것이 망설여지기 시작했다. 문고리를 열어 방 안으로 들어간다는 간단한 행위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 잊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렇게 사라는 잠시 동안, 문고리에 손을 올린 채로 망설임을 표하고 말았으며.
“...누구지? 혹시 바깥에 누군가 있는 것인가?”
그것이 바로 결정적인 실책으로 이어졌다. 자신이 내고 있는 기척을 눈치 챈 것인지, 집무실 안에서 의문을 표하는 카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말았기에.
아, 망했다.
순간적으로 당황해버린 사라는 재빨리 문고리를 당기고 문을 열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혹시라도 자신이 문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죽어도 들키기 싫었다.
“소, 소공작님...!”
당황한 나머지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노크도 없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사라의 눈동자에 가장 먼저 들어온 인물은, 카인이 아니었다.
“실로 무례하군, 사라 세르나드.”
집무실에는 이미, 그녀보다 한 발 앞선 선객이 존재하고 있었기에.
“그대는 노크라는 개념을 배우지 못한 것이란 말인가? 에스텔 공작가의 관리를 자처하는 여자가, 소공작의 집무실에 함부로 출입을 하다니.”
제국의 황녀,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
현 제국의 유일한 황위 계승권자인 동시에, 그와 조만간 결혼을 치르기로 약조한 여인.
마치 사파이어를 그대로 박아 넣은 듯한 아름다운 푸른 빛 눈동자 한 쌍이, 사라를 싸늘한 눈초리로 쏘아보고 있었다.
“.....”
지난 번에 공작가의 후원에서 서로 마주하였을 무렵부터 깨달은 사실이지만, 황녀는 사라를 싫어한다. 아니, 혐오하는 수준이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아주 많이.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황녀가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가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대체 어째서일까. 차라리 명확한 이유라도 알려준다면 자신을 향하는 황녀의 적의를 이해해보려고 노력이라도 해보겠건만.
하지만 정말로 모르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사라 세르나드’와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의 사이에는 그 어떠한 접점도 존재하지 않았었단 말이다. 좋고 싫고를 따지기 이전에, 애당초 얼굴을 마주했던 적조차 없거늘. 황녀는 어찌하여 자신을 이토록 싫어하는 것일까.
대체 왜. 무슨 이유로.
“그는 에스텔 공작가의 단 한 명 뿐인 소공작이다. 그런데 그의 허가도 없이 집무실의 문을 마음대로 열어젖히다니. 아무래도 너는 과거 그의 약혼자였던 시절을 쉽사리 잊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구나. 그렇게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할 생각이었다면, 대체 뭐하러 세르나드의 성을 버렸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군.”
사라를 향한 말 속에서 특히나 ‘세르나드’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황녀. 그것이 사라의 신경을 거스르려는 의도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성공적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다. 현재의 사라는, ‘세르나드’라는 성이 너무도 싫고 증오스럽게 여겨지기만 하고 있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전부 제 잘못입니다.”
하지만, 노크도 없이 그의 집무실에 무작정 들어온 자신의 잘못이 맞았으므로 사라가 할 수 있는 오직 그녀를 향해 머리를 숙이는 일 밖에 없었다.
“...저하, 그쯤 하시지요. 애당초 실수에서 벌어진 일이 아닙니까. 그만하면 사라도 저하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였을 것이라 믿습니다.”
두 여인 사이의, 아니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날카로운 신경전을 바라보면서도 카인은 황녀를 향해 그저 적당히 하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대체 무엇 때문에 사라를 저리 싫어하는 것이며, 아무 것도 아닌 일에도 이리 비아냥거리는 것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사라가 먼저 무례를 범한 것도 맞았기도 하고.
“...그래, 내가 잠시 너무 흥분했던 것 같군. 하지만 자네가 이해해주게나. 나는 말이지, 열녀비를 세울 정도는 바라지도 않지만 그렇다 해도 다른 남자에게 자신의 몸을 서슴없이 맡기는 여자 또한 그리 좋아하지 않거든. 특히, 그 여자가 자네와 관련된 여자라면 더더욱 그러하지. 자네도 알고 있지 않는가. 저 여자는 이미 투르니젠 소공작을 향해 꼬리를 흔든 전적이-”
“저하.”
카인의 언성이 높아졌다. 방금 전의 그 이야기는, 회귀 전의 이야기다. 이제는 시간의 저편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린 이야기를,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를 향해 늘어놓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카인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알겠네. 입을 다물도록 하지. 그러면 나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이야기가 전부 끝이 나면 부르도록 하게나.”
그러한 말을 남기며, 황녀는 문을 세차게 닫고 나갔다. 마지막 순간까지 사라를 향한 탐탁지 않은 눈빛만은 그대로 유지한 채로.
“미안하군, 사라. 내가 대신 사과하도록 하지.”
“...아니에요.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 소공작님.”
정말이었다. 애당초, 황녀가 자신을 싫어하고 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말에 딱히 상처를 받았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보다 사라의 머릿속에는, 황녀가 자신을 향해 던진 말과 관련된 의문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방금 전, 황녀의 그 말은 대체 무슨 의미였던 것일까. 과거, 자신이 카인으로부터 등을 돌린 것은 진실임이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남자와 함부로 몸을 가까이 한 적 또한 없다고 자부하고 있는 몸이건만.
황녀 또한, 그 때 자신이 투르니젠 소공작의 접근을 완곡히 거절하는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하였을 터. 그런데 어째서, 황녀는 자신을 향해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 대체 왜?
그런 사라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인은 사라의 얼굴을 한 차례 걱정스러운 듯 쳐다보다니, 이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저번에 말했잖아. 단 둘이 있을 때는, 굳이 존대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순간, 카인의 달콤한 말에 사라의 가슴 속에 파문이 일고 말았다. 그것은, 너무도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반말을 해도 괜찮다니. 말하자면, 이것은 카인 쪽에서 먼저 그녀를 향해 더욱 친하게 지내자며 손길을 내민 것이나 다름이 없는 행위가 아니지 않은가.
만일 이 제안을 수락한다면 그녀와 카인의 사이는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자고로, 공통된 비밀만큼 두 남녀를 가깝게 만드는 것 또한 존재하지가 않으므로.
하지만-
“...죄송합니다. 저는 아직, 존대가 편한 것 같아요.”
오히려 그렇기에, 사라는 그의 제안을 수락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카인의 호의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인 끝에, 언젠가 그것을 당연한 권리라 여기게 될 지도 몰랐기에.
혹시라도 착각하는 일은 없도록 하자, 사라. 자신은 과거와 같이 에스텔 공작가에 놀러온 것이 아니다. 그에게 구원을 받고, 조금이나마 그의 힘이 되어주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그러니, 선을 넘을 생각은 없다. 아니, 넘어서는 아니 된다.
카인은 이제, 자신의 약혼자가 아니라 자신의 주군이었으므로.
그의 곁에는 이미,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여인들이 존재하므로.
이를 악물고 카인의 제안을 거절한 사라는, 자신이 품에 안고 있던 파일철을 그에게 건넸다.
그렇다. 자신은, 이렇게 그와 사무적이고 딱딱한 관계가 어울린다. 제발, 그의 앞에서만큼은 구차해지지 말도록 하자. 사라. 그의 앞에서만큼은, 언제나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이기로 결심하였으니까.
“...그래,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사라의 대답을 들은 카인은 약간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그녀에게서 파일철을 받아들고 이내 차근차근 종이를 넘겨간다.
팔랑-
방 안에는 곧, 종이를 넘기는 자그마한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카인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않은 채, 서류를 검토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대체 뭐라고, 사라는 서류를 검토하는 그의 모습을 뭐에 흘리기라도 한 것 마냥 물끄러미 바라보고 말았다.
이미 그녀의 존재 따위는 의식조차 하고 있지 않은 채, 일에만 열중하는 저 모습조차 멋져 보인다 생각된다면 이는 정말로 중증이 아닌 것일까-
순간, 그와 한 공간 안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계속되는 침묵이 낯설게만 느껴진 사라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어 그를 향해 말을 걸고 말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제도에서 돌아온 그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고 말았다.
“...저, 소공작님.”
“응? 왜?”
“저도, 소식 들었어요. 황녀 저하와의 결혼, 정말로 축하드려요.”
그렇다. 정말로 축하할 일이 아닐 수가 없는 소식이었다. 에스텔 소공작과 제국의 황녀의 결혼은, 어디를 보아도 손해 따위는 없는 완벽한 결합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그를 보자마자 결혼을 축하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를 보며 여유 있게 농담도 던질 수 있을 줄 알았다.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 아니냐며 키득거려보고 싶었고, 나 같은 못난 여자가 하나 떠나가고 그런 완벽한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으니 이득이 아니냐며 웃음을 지어보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것으로서 자신의 모든 미련을 떨쳐내 버릴 수 있을 줄 알았다.
...헌데 아니었나보다. 대체 어째서 일까. 그의 앞에서, 자신은 왜 아무런 농담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왜 멍청이 마냥,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 밖에 하지 못하는 것일까.
“사라.”
그 말에, 카인이 고개를 들어 사라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본다.
“네.”
사실은, 응이라고 하고 싶다. 과거에 우리 사이가 그랬던 것처럼.
“축하해줘서 고맙다. 사실 나도, 네 진심어린 축하를 받고 싶었어.”
그리 말을 하며 자신을 향해 웃어 보이는 카인.
“만약 내가 혼인을 하게 된다면, 부케는 네가 받아 줄래?”
“...부케, 요?”
“우리는 이제 친구 사이잖아. 그러니 부케만큼은 네가 받아주면 좋겠다.”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웃는 얼굴로 잔혹한 말을 던져오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사라 또한 살포시 미소를 마주 지어 보인다.
“...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라도 기꺼이.”
다 좋은데, 카인은 아직도 한 가지 사실만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남자와 여자사이에는, 결코 친구 관계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끔찍한 사실에 대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