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1)14. 미련의 끝 - 04
제도에서 다시금 에스텔 공작령으로 돌아오는 여행길은, 그리 화기애애하며 즐거움으로 가득 찬 여정임은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분명 제도로 떠날 당시만 하더라도, 이번 여정의 동행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나의 전속 시녀인 아리아와, 이번 사건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리스 밖에 존재하지 않았거늘, 대체 왜 에스텔 공작령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인원이 두 명이나 추가가 된 것일까.
나를 둘러싼 여자 넷이 같은 마차 안에 함께 동승하고 있으며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기 바쁜 이번 여정은, 나로 하여금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듯한 초조한 기분을 맛보게 하고 있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왜냐하면.
“뭐야, 내가 이 자리에 앉아있는 사실에 대해 불만이라도 있어?”
“...아니.”
“그런데 왜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봐? 아무리 봐도 불만이 가득한 눈빛인 것 같은데? 넌 항상 그래.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을 때마다 나를 그런 식으로 쳐다보더라. 내가 널 몇 년이나 봐왔는데, 그런 것 하나 모를 줄 알았던 것이니?”
뭐가 그리도 불만스러운지 여정 내내 나를 향해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바쁘던 비앙카와.
“...비앙카. 제발 아는 척 좀 하지 말아주실래요. 카인은 다른 사람을 향해 정말 불만을 품을 때는, 전체적인 표정부터가 미묘하게 달라지기 마련이랍니다. 물론 정말로 아주 미묘한 차이인지라, 그와 정말 오랜 시간을 함께하지 않은 사람은 잘 눈치 채지 못하는 요소이긴 하지요. 그래요, 지금 당신이 열심히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당신, 지금 말 다했어? 내가 뭐 어떻다고?”
마찬가지로 제도에서부터 쭉 침울한 기색을 유지해오다가도, 다른 여자의 입에서 나와 관련된 이야기만 나온다면 눈을 날카롭게 번뜩이는 아리엘과.
“...참으로 야만스러운 광경이로군. 모처럼의 여행길이거늘, 조금쯤은 다 같이 어울려 화목하게 지낼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란 말인가. 아무래도 그대들에게는 양보와 화합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 아닌가 싶네.”
“정말, 구구절절 올바른 말씀이 아닐 수 없네요. 황녀 저하께서 이상한 수작을 부려 카인을 강제로 제도로 불러들인 덕택에 저희가 이 마차에 함께 동승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소한 결점만 제한다면 말이지만요.”
이제는 다른 여자들의 아웅다웅을 즐기기라도 하듯 느긋한 태도로 나의 곁에 앉아 있는 아이리스와.
“.....”
아리엘과 마찬가지로 조용히 있긴 하지만, 비앙카처럼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뾰로통한 기색으로 나와 시선조차 맞추려고 하지 않는 아리아에 이르기까지.
그나마 비앙카와 아이리스는 평소처럼 다른 여자들과 아웅다웅하기만 할 뿐 평소와 별다를 바 없는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아리엘과 아리아는 말 그대로 저기압에 가까운 우중충한 표정을 지어보인 채, 마차 안의 분위기를 끝없이 무겁게 만드는 일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이리스는 저리도 미소를 짓고 있는데, 대체 어째서 아리엘과 아리아가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짚이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짚이는 구석이 너무도 많아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래, 대체 누구를 탓하겠는가. 전부 나의 업보에서 비롯된 결과임이 틀림없거늘. 아이리스와 함께했던, 밤의 테라스에서의 비밀스러운 일탈은 그 때 당시의 내게 짜릿한 감정을 선사해주긴 하였지만, 동시에 부끄러움과 쪽팔림을 안겨다 주기도 하였다.
인간이라면 쪽팔리지 않을 수가 없겠지. 유감스럽게도, 나는 내가 관계를 맺는 광경을 타인에게 들킴으로서 쾌감을 얻는다는 기괴한 성벽은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더불어, 황녀와 내가 뒹구는 광경을 목격한 사람이 사실은 내 전속 시녀였다는 환장할 것 같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한 노릇이고.
“.....”
꼬였다. 여러 상황이 꼬이고 또 꼬인 끝에 이제는 쉽사리 감당하지도 못할 만큼 일이 커지고 말았다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대체 이 얽히고설킨 매듭을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원인 제공은 내 줏대 없는 아랫도리에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리스와 같은 여인이 내 품에 꼭하고 안겨 오는데 몸을 어물쩍 뒤로 빼는 것 또한 예의가 아니지 않겠는가?
나는 어디까지나 당시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내린 것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시의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후회가 있다면 순간의 유혹을 참아내지 못하고 야외에서 일을 저지른 덕에 결국 아리아에게 들키고 말았다는 점 그 자체라고 해야 할까.
좌우지간, 일이 여러모로 커지고 말았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어떤 여자도 버림받는 일 없이, 공평하게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을 뿐인데, 일이 어쩌다가 이 지경으로 흘러가 버리고 만 것일까-
...또한, 아리아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리엘과의 관계는 대체 어떻게 풀어나가면 좋단 말인가.
아무리 머릿속으로 고심을 해보아도, 그녀와의 관계를 진전시킬 방도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단순히 나의 애정과 관심을 바라기만 하던 비앙카나, 무인답게 검으로서 모든 것을 결판낸다는 단순 무식한 방법에 동의를 표해주던 아이리스 때와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저 감정의 교류만이 존재하였을 뿐, 나와 실제로 이어졌다고는 말하기 힘들었던 비앙카와 아이리스와는 달리, 아리엘은 나와 정말로 이어진 끝에 가정을 꾸린 전적이 있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회귀니 뭐니 그런 비현실적인 요소를 떼고 본다면, 아리엘이 현재 느끼는 감정은 상부(喪夫)한 여인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해답 또한 간단하다. 끝없이 흐르는 시간이, 언젠가는 그녀의 아픔을 무디게 만들어줄 것임이 분명하다. 세상 모든 감정이 그러하듯, 제 아무리 애타는 감정일지라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저절로 사그라드는 법이니.
...하지만, 그것은 너무 무책임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이미 다짐을 하지 않았던가. 더 이상 나를 둘러싼 여인들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고, 그녀들을 전부 책임지겠노라고. 그리고 그녀들을 전부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노라고.
그러니, 내가 아리엘을 위해 해줄 수 있는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아리엘.’
겉으로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지어 보이려 노력하고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침울한 기색이 풍겨져 나오는 아리엘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다시금 굳게 다짐을 하였다.
아무래도 조만간, 아리엘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나만이, 그녀의 아픔을 치유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것이 분명할 테니까.
****
“어머, 생각보다는 조금 늦은 도착이로군요. 어서 오세요, 카인. 에스텔 공작령에 돌아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랍니다.”
공작령의 본성에 들어가자마자 카인이 마주한 광경은, 흡사 이곳이 자신의 저택인 것 마냥 우아한 태도로 일행을 반기는 키리에의 모습이었다.
“...키리에? 여긴 대체 어떻게?”
카인이 그저 황당하고 혼란스럽다는 태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카인을 향하는 키리에의 미소가 더욱 짙어지고 말았다.
“이런, 꽤나 섭섭한 말을 하는군요. 카인, 아내 된 이로서 하나 뿐인 반려자의 곁에 오는 것이 그리도 잘못된 일이란 말인가요?”
“...아니, 반려자는 또 무슨...”
“어라? 설마 제 수명을 멋대로 사용해 놓고 이제와 발뺌을 할 생각은 아니시죠? 설마, 당신이 그렇게 몰염치하고 뻔뻔한 남자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답니다.”
“.....”
단순한 말 몇 마디로 카인을 간단하게 격침시킨 키리에를 향해, 기다렸다는 듯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온 여인이 있었다.
“오랜만이로군, 키리에 엘 데나리스. 비앙카 관련 일로 대수림에서 얼굴을 마주했던 이후, 이렇게 다시 만나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던가?”
“예, 상당히 오래간만에 다시 뵙게 되었군요. 황녀 저하. 저 또한, 저하를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무척이나 기쁘답니다.”
당신의 독점욕과 아집 탓에, 카인이 단시간에 멋진 남자로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까. 이번만큼은, 당신이라는 여자를 좋게 봐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설사 당신이 카인과 부끄러운 줄도 모르게 야외에서 추잡하게 뒹굴었다고 해도 말이지-
하지만 키리에의 이러한 감정과는 상반되는 태도로, 아이리스는 자신의 눈썹을 꿈틀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저번에 나와 마주하였을 때만 하더라도, 그대는 분명 내게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자신은 카인을 다른 여자에게 잠시 ‘대여’해줄 수도 있다 생각한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그의 곁에 어떠한 여자가 붙어 있건 별로 상관하고픈 생각은 없다, 라고 말이지.”
“예, 분명히 그랬었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키리에. 그 때 아이리스를 향해 밝혔던 그 생각은, 지금까지도 변화가 없다. 다른 여자가 어떠한 발버둥을 치건 간에, 마지막 순간에 카인은 자신 옆에 있을 것이 분명하니까. 그러니 그가 다른 여자와 잠시 놀아나건 말건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전부 한 때의 즐거움으로 끝을 맺게 될 텐데.
“그렇다면, 이제 와 에스텔 공작가를 방문한 이유는 대체 무엇이지. 그대의 말대로 우리에게 카인을 ‘대여’해 준 것이라면, 얌전히 세계수 옆에서 우리가 늙어죽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노릇이 아니었나?”
아이리스의 그러한 질문에, 키리에는 그저 오묘한 미소만을 지어보일 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않는다. 그저-
“글쎄요. 적어도 저하와 같이 카인을 가운데 두고서 추하게 아웅다웅하려고 이곳을 방문한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미리 밝혀두고 싶군요.”
“...뭐라고?”
아이리스가 자신을 어떠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건 간에, 키리에의 시선은 아이리스의 뒤편에 서있던 여인들을 향하고 있었다. 비앙카 델 카스타나, 아리아, 그리고 아리엘 티에르-
“...흐응.”
아리엘과 두 눈을 마주하자마자, 키리에는 아주 흡족한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말았다. 나름대로 감춘다고 애를 쓰고는 있었지만, 키리에는 아리엘의 두 눈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어떠한 아픔에 대해 순식간에 파악해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보지 못한 사이에 아리엘의 심중에 변화를 줄 만한 어떠한 일이 발생했던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좋다. 그것도 아주 좋다. 전에 아리엘과 마주하였을 때만 하더라도, 그녀는 여신을 향한 자신의 신앙심을 무기로 삼아 모든 번민을 떨쳐낼 수 있었다. 키리에의 제안을, ‘옳지 못한 것’이라 단정 짓고 키리에의 말을 단칼에 거절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현재의 아리엘 따위, 마치 깨어지기 직전의 유리 조각마냥 불안정하고 위태하기만 할 따름이다. 물론, 먼 훗날에 성녀라고 불리게 될 여자인 만큼 그 정신력이 호락호락하지는 않겠다만, 키리에가 보기에는 그것도 시간문제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비앙카나 아이리스와 같은 여자에게 있어서는, 과거는 그저 과거일 뿐이다.
과거에 그들은 카인과 마주하였으며, 사랑에 빠졌고,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그의 곁에 머무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에게 과거는 한낱 추억에 불과하다. 그녀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와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임이 분명할 테지.
...하지만 아리엘은 다르다. 아리엘이 원하는 것은 현재의 행복이 아니라, 과거의 행복했었던 추억 그 자체이다. 그녀의 시야는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결코 되돌아오지 않을 과거만을 향하고 있는 중이었단 말이다.
그러니 장담할 수 있었다. 설사 자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더라도 저 여자는 곧, 무너진다.
더 이상 아이리스와 할 말은 없다는 듯, 키리에는 말없이 그녀를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아리엘의 옆을 살그머니 스쳐 지나가면서, 키리에는 그녀의 귓가에 아주 자그마하게, 이리 속삭인다. 무언가가 너무도 기대되는 듯한, 약간의 흥분을 담은 야릇한 목소리로서.
“전에 당신께 던졌던 제안, 다시 듣고 싶으면 언제든지 저를 찾아와도 괜찮답니다?”
너 또한 내게 아주 재미있는 광경을 보여줄 것 같은 예감이 들고 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