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0)14. 미련의 끝 - 03
키리에의 말을 들은 에스텔 공작이 머리가 아픈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잠시 바깥에 나갔다 오겠다는 말만을 남긴 채 자리를 비운 뒤로, 넓직한 크기를 자랑하는 응접실 안에는 오직 사라와 키리에만이 존재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라는 현재,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우아한 자세로 차를 홀짝이고 있는 키리에를 황망한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현재 어떠한 눈초리로 키리에를 바라보고 있는지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현재, 방금 전 키리에가 내뱉었던 폭탄과도 같은 발언만이 가득 차 있는 중이었기에.
‘...카인의, 정혼자라고?’
정혼자. 낱말을 그대로 풀이해 본다면, 혼인하기로 결정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단어가 아니던가. 그러니까, 키리에의 말을 해석해 보자면 그녀는 장차 카인과 결혼을 할 것이라는 의미로 그러한 말을 내뱉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면부지의 타인을 향해 굳이 ‘정혼자’라는 단어를 사용할 리는 없으니까.
“.....”
사라의 눈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였다. 현재 자신의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금 정리를 해보자면, 그는 한 때 자신과 약혼을 맺기는 했었지만, 자신과 파혼을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카스타나 영애와의 약혼을 추진하였으며, 그 소문이 사그라들기도 전에 황녀와 혼인을 맺겠다는 사실을 제국 전체에 공표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지금, 에스텔 공작가에 그의 정혼자를 자칭하는 엘프가 한 명 나타나기까지 하였다. 자신은 과연, 일련의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저어, 키리에님. 한 가지만 뭘 좀 여쭈어 봐도 괜찮을까요?”
키리에만의 독특한 기적의 나이계산법에 의거하자면, 그녀는 현재 인간 나이로 스무 살이니 현재 사라와 동년배라고도 할 수 있는 나이였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에스텔 공작과 같이 저 여자를 향해 말을 편히 놓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키리에가 인간 나이로 환산하자면 스무 살이든 서른 살이건 간에, 실제 나이만 따지고 본다면 무려 이백 살을 훌쩍 넘은 산송장과 같은 존재가 아니던가?
하지만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에스텔 공작이 직접 손님으로서 예우하기로 한 여자를 향해 대놓고 무례를 범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절충방안으로서 사라가 택한 호칭은 바로 ‘키리에님’이었다. 사라는 키리에라는 저 엘프가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여인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예, 말씀하시지요. 무슨 일이신가요?”
한편, 키리에 또한 에스텔 공작이나 카인을 제외한 다른 인간들로부터 어린 아이 취급을 받고픈 생각은 추호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사라의 속내를 뻔히 짐작하고 있음에도 그녀의 발언을 순순히 받아 주었다. 애당초 다른 인간 따위가 자신을 향해 어떠한 생각을 품고 있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키리에님께서 카인, 아니 소공작님의 정혼자라는 말이, 정말로 사실인 것인가요?”
사라의 질문은, 키리에의 말을 불신해서 묻는 질문은 아니었으며 그 진위를 파악하고자 묻는 질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만 할 것 같은 참담한 심정에서 물어본 질문이었을 뿐.
난생 처음 엘프를 마주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사라 또한 어릴 적에 읽었던 동화책 속에 등장하는 엘프와 관련된 속설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동화책 속의 내용에 의거하자면, 자신 밖에 알지 못하는 추악한 욕심으로 가득 찬 인간들과는 달리 엘프들은 오직 순수하고 천진난만하기만 할 따름이며, 거짓이라는 개념을 알지 못하기에 오직 진실만을 추구하는, 지극히 선량한 종족이라 일컬어지고 있었다.
그런 자애롭고 순수한 엘프가, 뭐하러 자신에게 거짓을 말하겠는가. 거짓말이란, 진실을 숨김으로서 자신이 이득을 보고자 한 인간들이 발명해낸 추악한 산물에 지나지 않거늘.
“...흐응.”
물론, 오늘만 하더라도 이미 몇 번 정도 거짓을 입에 올린 전적이 있는 나쁜 엘프인 키리에는 그저 재미있다는 듯 사라의 얼굴을 힐끗하고 바라보았다. 저 여자가 대체 어떠한 의미에서 자신을 향해 저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인지, 그 속내가 아주 훤히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그녀가 현재 어떠한 생각을 품고 있는지 굳이 애써서 유추할 필요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키리에로부터 ‘정혼자’라는 단어가 나온 이후, 그녀는 안절부절한 기색을 감추고 있지 못하고 있었으며, 앞으로 키리에의 입에서 어떠한 말이 나올 것인지 조마조마한 기색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한 가지, 미리 말해두자면 키리에는 성격이 그다지 좋은 엘프라고는 할 수 없었다. 아니, 굳이 따져보자면 성격이 고약한 축에 속하는 여인임이 분명하겠지.
그야 그럴 수밖에. 무려 천 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을 살아오며, 그녀는 이미 수많은 종류의 오욕(五慾)과 칠정(七情)을 남김없이 맛보고, 경험해 본 전적이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삶 속에서 모든 감정이 닳고 풍화가 되어버린 키리에의 흥미를 동하게 하는 대상은 오직 둘.
하나는 자신의 반려라고 할 수 있는 카인과 관련된 무언가, 다른 하나는 날 것 그대로인 인간의 감정 그 자체뿐이었기에.
불현 듯, 흥미가 생겨난다. 분명히 오늘 난생 처음 얼굴을 마주하는 사이이건만,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저 여자는, 대체 자신을 향해 어떠한 민낯을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말았다.
...그렇다면 어디, 우선은 아주 살짝만 건드려보도록 할까. 초반부터 거칠게 다룬다면, 쉬이 망가질 지도 모르는 노릇이니-
“예, 사실이에요. 카인과 저는, 저희들의 삶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모든 것을 함께 나누기로 맹세한 관계임이 틀림없답니다.”
키리에는 천사와 같이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은 상태로, 자신의 두 손을 꼭하고 마주 잡으며 꿈이라도 꾸는 것 같은 몽롱한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렸다. 그녀의 그러한 모습은, 한 점의 더러움조차 알지 못하는 처녀의 행색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게 정말인가요?”
“예, 물론. 제가 당신께 거짓을 말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 않나요?”
실제로, 키리에는 딱히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딱 한 가지, 방금 전 키리에가 들먹인 ‘맹세’라는 것이 남녀 사이의 단순한 약속 수준을 한참이나 뛰어넘은, 사실상 저주에 가까운 종류의 맹세라는 점만을 제외한다면 말이지만.
왜냐하면 연인이 서로의 귓가에 장난스레 속삭이는 사랑의 맹세 따위는 코웃음 치며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한 때 카인과 키리에가 나누었던 ‘끈’의 맹세는 설사 시간축이 거꾸로 뒤감기더라도 그 연결이 해제되지 않았을 정도로 지독한 부류의 맹세였으므로.
“...그렇, 군요.”
거짓이라고는 한 점 느껴지지 않는 키리에의 발언에, 사라는 절망으로 가득 찬 표정을 지어보이고 말았다. 하지만 절망은, 금세 카인을 향한 분노로 승화되기에 이르렀다.
대체 주위의 있는 여자가 몇 명이나 되는 것이란 말인가. 아리아에, 비앙카에, 황녀에, 아리엘에 이르기까지,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여자만 해도 무려 네 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저 엘프는 또 어느 틈에 꼬셨던 것이란 말인가.
키리에의 발언을 가만히 듣자하니, 그녀와 카인은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인 것이 분명하였다. 혹시 어쩌면, 카인은 과거 자신과 약혼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무렵부터 저 엘프와 혼인을 맺기로 약조를 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신에게 그러하듯, 저 엘프를 향해서도 사랑한다 속삭이던 것은 아니었을까-
“.....”
속이, 정말 뒤집히는 것 같았다. 이 나쁜 놈, 개만도 못한 난봉꾼 같은 놈. 나는 너 때문에 이렇게 아픈데, 너 때문에 이 만큼 아파하고 있는데, 너는 나 몰래 뒷구멍으로 여자나 꼬시고 있었다 이거지. 내 앞에서는 나만을 사랑하겠다고 속삭이던 와중에도, 다른 여자와 결혼할 계획이나 생각하고 있었다 이 말이지-
“...아하.”
한편, 사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키리에는 마침내 그녀의 얼굴을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노릇이겠지만, 카인과 키리에의 사이를 잇고 있는 ‘끈’은 일방통행적인 요소로 작동하고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카인이 키리에와 연결되어 있는 ‘끈’을 통해 그녀의 여러 기억을 훔쳐보며, 심지어는 수명마저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 있었듯, 키리에 또한 ‘끈’을 통해 카인의 기억을 엿보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싶지만 않았다만, 아내 된 이로서 그의 곁에 날벌레가 다가오지는 않는지 감시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었기에 그녀는 그의 기억을 여러 번 들여다보았으며.
그 속에서, 키리에는 사라의 모습을 몇 번 정도 목격한 경험이 있었다. 이제야 확실히 떠올릴 수 있었다. 눈앞의 여자가 어떠한 여자이며, 카인과 어떠한 관계로 얽혀 있는 여자였던 것인지.
“사라, 사라 세르나드. 이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맞나요?”
“...예? 그, 그걸 어떻게?”
키리에의 발언에, 사라는 깜짝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았다. 자신과 일면식도 없는 이 엘프가, 자신의 옛 이름은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기에.
사라의 그러한 반응을 보며, 키리에의 입에 걸쳐져 있는 미소는 더더욱 짙어지고 말았다.
재미있었다. 시간이 거꾸로 되돌려지며 자신이 알던 과거가 많이 뒤바뀌었음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건만, 설마 인간관계 그 자체에 변화가 생겼을 것이라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건만.
실로 흥미롭다. 과거,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다른 곳으로 팔려갔던 인형과도 같았던 여인이, 지금은 사랑에 빠진 소녀와 같은 눈길을 하고 있었다.
과거, 자신의 약혼자에게 일말을 애정을 갖지 못하였던 어느 여자는, 지금 이 순간에는 자신의 그러한 과거를 후회하며 그를 가슴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던 그 남자가, 이제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며 자신을 향해 다시는 시선을 주지 않을 것을 잘 알면서도, 그녀는 그를 마음 깊이 품고 있었다.
비틀리고 엇나간 끝에 이제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말로가 이곳에 있었다. 후회로 점철된 끝에 그 아픔에 짓눌려 있는 여인의 가련한 끝이 이곳에 존재하였다.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끝끝내 자신의 마음을 저버리지 못하는 멍청한 여인의 결말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단 말이다.
남자는 여인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지도 않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여인은 무언가에 홀린 듯 남자의 등만을 뒤쫓는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이어지지 않는다. 만에 하나라도 그들의 길이 겹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애당초 평행선상에 존재하고 있었기에.
실로 애처로운 관계가 아닐 수 없었으며, 그렇기에 재미있었고, 마음이 동하였다.
보고 싶었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이 이야기의 끝, 그 결말이 어떤 식의 최후를 맞이할지, 너무도 궁금해지기 시작하였다.
어떠한 간섭도 없이 객석에 앉아 이야기를 바라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지만, 때마침 이야기를 조금 더 흥미롭게 하기 위한 좋은 수단이 한 가지 떠오르고 말았다.
...만약, 저 여자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현재의 자신이 애가 닳도록 사랑하고 있는 그 남자를, 과거의 '사라 세르나드'는 뒤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인연을 끊었으며, 다른 남자와 가정을 꾸리기까지 하였다는 진실을 알게 된다면-
저 여자는 대체 어떠한 표정을 지어 보일까. 어떠한 통곡을 지어내 보일까. 그 끝에, 어떠한 형태의 눈물을 흘리고 말 것인가. 만일 그 눈물을 핥아서 맛을 본다면, 얼마나 감미로운 맛이 날지 상상만 해도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열이 오른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입술이 바싹하고 말라와, 자신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한 차례 할짝이고 말았다. 마치, 감미로운 미주(美酒)를 개봉하지 않은 채, 틈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향기만을 맡고 있는 듯한 애타는 기분이 든다.
순간적으로, 갈등을 하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바로 이 자리에서, 그녀에게 아주 자그맣게 진실의 일부를 속삭여줄까?
진실을 알게 된 저 여자가 맞이할 결말이 무엇일지, 실로 기대가 된다.
스스로도, 참 악취미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카인을 사랑하게 된 이유. 그것은 바로.
참으로 덧없고도 부질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끝끝내 부나방마냥 파멸을 향해 다가서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깊게 매료된 탓이었으니까.
그러니, 결정했다.
“사라, 만약에. 어디까지나 만약의, 정말로 만약의 영역의 일이긴 하지만.”
지금 당장 부수지는 않는다. 자신은 그저, 그녀를 향해 하나의 선택지만을 제시하여 줄 뿐.
“카인이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단어나, 말을 내뱉는 일이 있다면 제게 와보도록 하세요.”
간교하고, 요사로운 목소리를 사라의 귓가에 속삭여간다.
“결코 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으니. 당신에게 도움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어느새 소리 없는 웃음만이, 응접실 안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장난감이 하나 생기고 말았으니, 아무래도 카인이 도착할 때까지 결코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키리에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기쁘게 느껴지기만 할 따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