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9)14. 미련의 끝 - 02
때는 바야흐로 따스했던 봄이 끝나고, 산천초목을 뜨겁게 달구는 무더운 여름으로 넘어가려는 시기였다. 아직 본격적인 여름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태양은 뭐가 그리도 급했던 것인지 하늘의 저 높은 곳에 떠오른 채로 뜨거운 열기를 마음껏 발산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 그 무더운 열기에, 에스텔 공작령의 많은 사람들이 차라리 한여름에도 진눈깨비가 내리던 시절이 더 나았던 것은 아닐까 하며 철학적인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 공작령의 본성 앞 입구 쪽에 한 명의 손님이 나타났다.
사전에 어떠한 기별도, 연락도 없이 불쑥하고 나타난 그 손님은 수상쩍기가 말로 이를 수 없을 정도로 심상치 않은 인물임이 분명하였다. 적어도, 본성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문지기가 생각하기에는 그렇게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이토록 후덥지근한 열기가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는 대낮부터, 더위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얼굴 밑쪽까지 내려오는 후드를 푹하고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이 수상쩍지 않다면 이 세상에 수상한 사람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여기도 꽤나 오랜만에 와보네. 아니, 난생 처음 와본다, 라는 감상을 남겨야 하는 것일까.”
에스텔 공작가의 본성을 바라보며 감회가 새롭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수상한 손님의 모습에, 문지기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무엇에 놀랐냐면, 후드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그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아름답고 청아한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신을 향한 문지기의 감상 따위에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 수상쩍은 손님은 후드 바깥으로 유일하게 노출된 자신의 입가에 살포시 미소를 지어보이며 문지기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으음, 실례합니다. 혹시나 해서 묻는 질문이지만, 여기가 에스텔 공작가인 것이 확실하죠?”
그녀의 질문에, 문지기는 무언가에 흘린 듯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 그렇습니다. 에스텔 공작가에는 대체 어떻게 오신 것입니까?”
“열심히 걸어서요.”
당연하다는 듯 돌아온 그 대답에, 문지기는 자신도 모르게 그 수상쩍은 손님을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말았다.
“...그렇다면, 누구를 만나러 이곳에 오신 것입니까?”
“그야, 당연히 공작님을 만나 뵈러 왔죠. 집주인을 만나려는 이유 외의 용건으로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하려 드는 사람도 있나요?”
생각해보니 도둑고양이들이라면 주인이 부재중인 것을 더욱 선호하긴 하겠네요, 라며 키득거리는 손님을 바라보며, 문지기는 통상적인 수단으로는 눈앞의 수상쩍은 손님으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그동안 문지기로 일하며 쌓아온 연륜을 통해 쉽사리 눈치 챌 수 있었다. 저 손님은, 말이 통하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대체 무슨 용건으로 공작님을 만나러 오신 것입니까?”
“글쎄요. 다소 개인적인 용건인지라 아무 관련이 없는 타인에게 함부로 털어놓기가 좀 그렇군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렇게 입이 가벼운 여자가 아니랍니다.”
아니나 다를까, 상황 파악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답변이 돌아오고 말았다. 이래서야 저 정체불명의 손님과 하루 종일 선문답이나 나눠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그를 사로잡고 말았다.
“...공작님께서는 현재 안에 계십니다만, 그 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과는 함부로 만남을 가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 분을 뵈려는 용건을 말씀해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결단코 문을 열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상대가 여자인 것 같기에 헛소리 말고 꺼지라는 말을 조금 순화해서 내뱉으니, 그 말에 정체불명의 손님은 그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그런가요? 이거 조금은 섭섭하군요. 공작님과 저는 절대 남남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그리 말을 하며 정체불명의 손님은 자신이 걸치고 있던 후드를 위로 젖힌 그 순간-
다음 순간, 문지기는 ‘손님’의 얼굴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말았다.
얼굴을 드러낸 여인의 모습은, 그저 아름다웠다. 그것도, 무척이나.
문지기는 지금까지 에스텔 공작가에 거하며 많은 미인을 보아왔었다. 소공작의 전속 시녀인 아리아부터 시작해, 약혼과 혼인을 약속한 관계라는 소문이 파다한 비앙카와 황녀, 그리고 차기 성녀라 불리우는 아리엘에 이르기까지, 에스텔 공작가에 거하는 여인들 중 아름답지 아니한 여인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여인은 그들과는 무언가가 달랐다. 단순하게 아름답다, 라는 단어만으로는 도저히 그녀의 외모를 표현할 수 없었다. 우열이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무언가가, 다른 여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특별한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향기로운 숲의 풀내음이 이곳을 가득 메운다. 싱그럽고 온화한 두 녹색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녀는-
“...귀, 귀가...?”
그녀의 귀는 아주 길고, 뾰족하였다.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손님이, 결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더없이 확실한 증표였다.
순간, 문지기의 머릿속에 그가 어릴 적에 읽었던 동화책의 한 구절이 떠오르고 말았다. 세계수가 존재하는 대수림에 모여 살기에 인간 세상에는 그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으며, 종족의 모든 구성원들이 인간과는 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다 일컬어지는 반요정(半妖精) 종족의 이름은 분명히-
“엘프?”
이미 넋이 반쯤 나간 듯한 문지기의 중얼거림에, 그의 앞에 서 있던 엘프, 키리에 엘 데나리스는 그저 재미있다는 듯 킥킥하고 웃음을 지어보이며 자신의 입을 열어 보인다.
“자, 그러면 이제 순순히 공작님을 불러주실 수 있겠나요? 대략 백여년 만에 현세에 나온 유일한 엘프라면 공작님을 만나 뵐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되는데요?”
무척이나 아름답고 싱그러운 미소가 문지기를 향한다. 더 이상, 그 어떠한 반론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사가 듬뿍 담긴, 지극히 싸늘한 미소에 문지기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에스텔 공작가의 한가운데 위치한 응접실.
“...으음. 홍차의 맛이 아주 깔끔하군요. 찻잔의 온도부터 시작해, 깊고 조화로운 향기의 블랜딩까지. 이것은 분명 일류의 손길이 닿은 깔끔한 솜씨임이 분명한 것 같네요.”
“...가, 감사합니다.”
어딘가의 귀족 영애라고 해도 쉽사리 믿을 수 있을 만큼 완벽한 예법을 표하고 있는 상태로 홍차를 홀짝이고 있는 키리에를 바라보며, 홍차를 타온 장본인이라 할 수 있는 사라는 자신을 향한 칭찬에 고개를 꾸벅하고 숙이고 말았다.
마침 예산과 관련된 문제로 에스텔 공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이 자리에 함께 끌려나온 그녀는, 동화책 속에서 등장하는 종족인 엘프를 신기하다는 듯 힐끔힐끔 훔쳐보고 있는 중이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대수림 바깥으로 출입을 하지 않는다는 종족인 엘프가 왜 인간 세상에 나온 것이며, 대체 왜 에스텔 공작가를 방문한 것인지 궁금하지 않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말임이 분명한 노릇이겠지.
에스텔 공작과 사라가 자신을 어떠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건 간에 정작 키리에 본인은 이곳이 마치 자기 집인 것 마냥 편안한 기색으로 소파에 걸터앉아 홍차를 홀짝이기만 할 따름이었지만.
...뭐, 사실 미래에 몇 번 정도 와 본 친숙한 장소였기에 익숙한 면모도 없지 않아 있었고.
그렇게 어딘가의 공주님인 것 마냥 우아한 태도로 차를 마시는 키리에를 멍하니 바라보던 에스텔 공작은,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온 듯 두어 번 헛기침을 내뱉더니 이내 공작가의 주인다운 근엄한 태도로 키리에를 향해 입을 열었다.
“흠흠, 비록 누추한 곳이긴 하지만 에스텔 공작가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겠소. 엘프 키리에여. 나는 이곳의 주인인 에스텔 공작이라오. 그대가 이곳에 체류하는 동안, 에스텔 공작가는 그대를 우리의 손님으로 인정할 것이며, 그대를 진심으로 환대할 것을 약속드리는 바라오.”
“감사합니다, 공작님. 저 또한 푸르른 숲의 나있는 모든 이파리들이 저물어들 때까지, 공작님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환대를 잊지 않을 것이라 굳게 맹세 드리는 바랍니다.”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키리에가 공손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로 그리 대답을 하자, 에스텔 공작은 무언가가 불편하기라도 한 듯 미묘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을 하였다.
“...음. 굳이 내게 존대를 쓰지 않아도 괜찮소. 그대는 엘프. 인간세상의 역학 관계가 적용되지 않는 곳에서 온 이에게 굳이 인간들의 법칙을 적용시킬 정도로 나는 융통성이 없는 인간이 아니외다. 결정적으로, 엘프들은-”
“...결정적으로, 무엇이죠?”
에스텔 공작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키리에를 눈앞에 두고, 에스텔 공작은 아무리 보아도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라나 자신의 딸인 엘레나와 비슷한 연배로 밖에 보이지 않는 그녀를 향해 떨떠름한 어조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전해들은 바로는 엘프라는 종족은 천 년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인간 기준에서 보자면 불사(不死)나 다름이 없는 삶을 구가하는 종족이라 들었소. 그러니 키리에, 그대 또한 나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많은 여인임이 틀림없을 테니 내 어찌 함부로 그대에게 말을 놓을 수 있겠소?”
에스텔 공작의 무심한 발언에, 순간적으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키리에의 이마에 아주 작은 실핏줄이 새겨지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서, 키리에라는 엘프는 다른 사람을 향해 그리 자비롭고 넓은 마음씨를 보여주는 여자는 아니었다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시아버지가 될 지도 모르는 인간 앞에서 스스로의 성격을 있는 그대로를 전부 펼쳐 보일 정도로 멍청한 여자는 아니었단 말이다.
...에스텔 공작의 말마따나,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온 연륜은 허투로 먹은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럴 리가요. 그것은 정말로 오해랍니다. 공작님.”
키리에는 애써 표정을 풀며 최대한 자상하고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공작님의 말씀처럼, 엘프의 수명이 인간의 수명의 대략 열 배 정도인 것은 사실이 맞답니다. 하지만 공작님, 애초에 수명이 다른 두 종족의 나이를 그대로 비교하는 것 또한 지극히 불합리한 일이 아닐까요? 과연 인간이 보내는 십 년과, 엘프가 보내는 십 년이 똑같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애당초 수명이 다른 두 종족인데?”
“.....?”
이건 대체 무슨 이상한 소리란 말인가. 인간이나 엘프나 십 년을 살았으면 둘 모두 공평하게 열 살을 먹은 것이 아니던가? 이것이 대체 왜 불합리한 계산법이라는 것인지 에스텔 공작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틀립니다. 완전히 틀려요. 수명이 다른 두 종족은, 나이를 환산하는 법 또한 달라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랍니다. 그렇군요. 엘프 나이가 백 살 정도라면, 인간 나이로는 열 살로 환산하는 것이 올바른 계산법이겠군요. 그렇다면 저는 올해 이백 살 정도이니, 인간 나이로 치면 대략 스무 살 정도가 되겠네요. 그래요, 저는 인간 나이로는 아직 스무 살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엘프였던 것이랍니다.”
“.....”
실제로 육체의 성장은 세계수의 수호자로 임명이 된 이백 살 쯤에서 멈추었으니 키리에는 자신의 나이를 스무 살이라고 대는 것에 어떠한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공작님, 공작님께서는 엘프 나이로 환산하시면 연세가 어느 정도 되시나요?”
키리에의 기습과도 같은 질문에, 에스텔 공작은 그만 얼떨결한 기색으로 대답을 해주고 말았다.
“...대략 4, 500살 정도가 아닐까 생각하외만...”
키리에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을 해버리고 만 에스텔 공작은 자신의 가치관이 점차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 보세요. 공작님께서는 나이로 보시나 지위로 보시나, 저보다 한참이나 높은 위치에 서 계신 웃어른이셨던 것입니다. 공작님, 고작해야 스무 살 정도 밖에 먹지 않은 어린 여자에게 존대를 사용할 생각은 아니시겠죠? 그렇죠?”
“.....”
대체 뭘 어쩌다가 이야기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쯤 되니 키리에를 상대로 더 이상 나이를 들먹이는 것은 현명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차피 공작 또한 겉보기에는 스무 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키리에를 향해 존대를 사용하는 것이 조금은 불편하던 찰나였고.
“...그래. 네 의견이 그러하다면, 앞으로는 굳이 존칭을 붙이지 않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공작님.”
에스텔 공작의 발언에 키리에는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생긋하고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도 괜찮을까. 키리에, 대체 무슨 용건으로 에스텔 공작가에 방문한 것인지, 아직 그 이유에 대해 밝히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 그러고 보니 아직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었군요. 이건 제 명백한 실수네요.”
키리에는 전혀 실수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느긋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홍차를 집어 들더니, 참으로 우아한 태도로 차를 홀짝이며 이리 말을 하였다.
“제 일생에서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저의 사랑스런 정혼자를 만나기 위해 이리 공작가를 방문한 것이랍니다, 아버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