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8)14. 미련의 끝 - 01
에스텔 공작령은 제국에서도 가장 최북단에 위치한 척박하기 그지없는 혹한의 땅이다.
한 여름에도 진눈깨비가 심심치 않게 내리는 등 날씨가 변덕스럽기 이를 데 없으며 지력(地力)이 다한 황무지가 이곳저곳에 심심치 않게 널려 있는 탓에 자연스레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극도로 한정 될 수밖에 없는, 대륙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 참으로 지랄 맞은 동네가 아닐 수 없었단 말이다.
영지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농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영지의 수입은 줄어들고, 수입이 줄어드니 영지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아 자연히 인구수도 늘어날 생각은 하지 않으며, 인구수가 늘어날 생각은 하지 않으니 자연히 영지의 수입 또한 해가 지날수록 악화일로를 달리는, 악의 순환이 계속되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나마 아직까지 폐광이 되지 않은 채로 근소하게나마 명맥이 남아 있는 몇몇 광산이 아니었다면 에스텔 공작가는 그대로 파산을 면치 못하는 신세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천 년 전, 아니 삼백년 전만 하더라도 제국 전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성세를 자랑하던 가문이었건만, 대체 어쩌다가 이런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는지를 회상한다면 그저 한숨밖에 나오지 않을 실태가 아닐 수 없었다.
헌데 요즘, 그저 절망밖에 남아있지 않던 에스텔 공작령에 활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앞으로도 줄곧 이 땅에는 좌절밖에 없을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있던 영지민들에게, 희망이라는 이름의 생기가 솟아나기 시작하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공작령에 제대로 된 사계(四季)가 돌아왔다. 봄에는 따스한 훈풍이 불고 대지에 녹음이 피어났다. 여름에는 강렬한 햇살이 산천초목을 뜨겁게 달구었다. 가을에는 낙엽이 흩날리고 농작이 이루어졌던 땅은 모두 풍작을 맞이하였다.
...결정적으로, 이번 겨울은 춥지 않았다. 이번 겨울에는 예전처럼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지도, 언제나 그래왔듯 눈보라가 휘몰아치지도 않았다. 마치 온화한 어머니와 같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덤덤하게 겨울이 끝을 맺고 다시금 따스한 봄이 찾아왔다.
농사를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척박한 대지에, 다시금 지력이 돌아왔다. 영지민들의 활동반경이 넓어지고 순식간에 개간지가 늘어났다. 에스텔 공작령에 놀고 있다는 땅이 많다는 소문을 어디서 들은 것인지, 이주민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고작해야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에스텔 공작령을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는 많이 바뀌고 말았다. 다른 영지들처럼 농사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이주민들이 늘어나며, 영지 전체에 활력이 돌다보니 이는 그대로 자금의 선순환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 말인 즉 슨, 새로 재무관에 취임을 하게 된 사라의 일거리가 종전보다 수배는 더 늘어나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에스텔 공작령의 재무관으로 임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햇병아리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일거리가 쏟아졌다. 겉보기에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혀보지 않은 여인의 손끝에서, 공작령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자산에 대한 서류 처리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표했건만 총관은 그들로 하여금 그녀의 일처리를 잠자코 지켜보라고 단단히 엄포를 놓기만 할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총관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사라는 자신의 진면목이 어떠한 지에 대해 만인에게 똑똑히 알려주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유능했다. 그냥 유능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훨씬 유능하였다.
먹물 좀 깨나 먹었다고 자부하던 관리들조차 골머리를 앓게 만드는 재무대장을 한 번 슥하고 훑어본 것만 가지고 그 내용을 모조리 파악한 것은 기본이었으며, 복잡하기 짝이 없는 숫자로 점철되어 있는 서류가 그녀의 손을 거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완벽하게 해결이 되는 모습은 마치 마법과도 같은 신비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그녀는 그저 책상 앞에만 앉아 서류만을 들여다보는 책상물림이 아니었다. 그녀는 직접 영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며, 그에 따른 융통성 있는 일처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서류에 적혀 있는 숫자는 그저 단순한 숫자에 불과할 뿐, 그 당사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으니 말입니다. 사람을 단순한 숫자로 치환해서 보게 되는 일이야말로, 소공작님을 대신해 영지를 책임지고 있는 담당자가 가장 지양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을 뿐이랍니다.”
그렇게 사라는 점차, 에스텔 공작령에 빠져서는 아니 되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사라 또한, 과거 세르나드 백작가의 ‘사라’보다는, 현재 에스텔 공작령의 ‘사라’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그저 인형처럼 자신의 방 안에 갇혀 있기만 했던 옛날과는 달리, 현재는 자신이 앞장서서 많은 일들을 진취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현재 자신이 그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이지만 기뻤다.
허울뿐인 약혼녀일 당시에는 그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하였지만, 지금 이 순간 이런 식으로나마 그에게 쓸모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는 정말로 기뻤다.
재무관으로 일을 하며 그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으며, 많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누는 대화의 주제 속에는 언제나, 에스텔 소공작과 관련된 이야기가 포함이 되어 있었다.
사라 본인은 결코 인지하지 못하는 사실이다만, 그녀는 다른 사람과 에스텔 소공작과 관련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마다 마치 마음이 뜨겁게 들뜬 것 마냥,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고는 하였다. 자신이 알고 있지 못한 그에 대한 정보, 그에 대한 면모를 알아가는 것이야말로, 사라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행복이 아닐 수 없었기에.
기뻤다. 그녀가 대화를 나누어본 에스텔 공작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카인을 소공작이라 인정하고 있었다. 그가 소공작이라는 자리에 어느 누구보다 어울리는 인물임을 부정하는 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명실상부한 에스텔 소공작이었으며, 모두의 소공작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이, 그녀를 왠지 모르게 뿌듯하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사라는 다른 사람이 그에 대해 칭찬을 하곤 하면 마치 자신이 칭찬을 받은 것 마냥 가슴 속에 뿌듯한 만족감과 기쁨이 퍼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설사 자신이 칭찬을 받더라도 이 정도로 뿌듯하지 않았고, 이렇게 기뻤던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깨달을 수밖에 없던 것 같다. 각오의 의미로 그의 앞에서 머리까지 잘라보였음에도, 마음 속 깊이 굳은 맹세를 하였음에도, 사실 자신의 마음은 그가 자신을 꼭하고 안아주었던 그 순간에서 단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을 이미 그를 향한 헤어 나올 수 없는 마법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을.
이제 그만 접자고, 더 이상은 그를 향한 마음을 드러내서는 아니 된다고 그토록 수없이 다짐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이 충동에 몸을 맡겨버리는 자신이, 너무도 어리석고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그렇기에 사라는 현실에서 도망치고자 했다. 차라리 자신의 모든 정신을 업무를 처리하는데 쏟아 붓는다면, 가슴을 베어내는 듯한 이 통증이 조금은 덜할 것만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그녀는, 밤낮없이 서류 속에 파묻혀 일에만 열중하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존재하였다.
“...아가씨, 조금쯤은 쉬어가며 일을 하시지요. 안 그래도 체력도 별로 좋지 않으신데, 그러다가 지쳐 쓰러지시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고 있는 이 늙은이의 마음도 조금은 헤아려주셨으면 합니다.”
총관은 사라의 책상 위에 홍차 한 잔을 올려놓으며 조심스레 말을 하였다. 카인이 약혼을 맺었던 어릴 적부터 사라의 모습을 보아왔던 총관은, 사라가 어째서 저리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지 감에 잡힐 듯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총관은 그녀를 향해 어떠한 말도 섣불리 내뱉을 수가 없었다. 자고로, 예로부터 현명한 자들은 남녀 간의 관계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아니 하는 법이었으므로.
...다만,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온 저 아가씨가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에 가슴 아파 하는 모습 또한, 도저히 두 눈을 뜨고 보기 힘든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 서류만 처리하고 나서요. 이제 이것만 검토하면 일이 대충 마무리 될 것 같으니 저도 조금은 여유로워 질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리고...”
“...그리고, 무엇입니까?”
사라의 끝이 맺어지지 못한 말에 총관은 의문을 표하였지만 사라는 끝끝내 입을 열지 못하였다. 차마 자신의 입으로는 다른 누군가에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카인이 에스텔 공작령에 복귀하기 전에 모든 업무를 대충이나마 끝내 놓음으로서, 그에게 ‘잘했다’라는 칭찬을 받고 싶다는 속내를 어찌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을 수 있겠는가.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것보다 총관님, 저를 아가씨라고 부르지 않기로 하셨잖아요. 저는 이제 아가씨가 아닐뿐더러, 무엇보다 저는-”
더 이상 카인의 약혼자도 귀족도 아닌 신분이니 당신에게서 존대를 들을 이유가 없다, 라는 말을 꺼내려던 순간, 총관은 고집 있는 얼굴을 한 채로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제게 있어 아가씨는 언제나 아가씨일 따름입니다. 또한 아가씨께서 과거에 소공작님의 약혼자였다는 사실 또한 변치 않는 사실이고 말입니다. 그러니 제가 아가씨를 어찌 부르건, 그것은 저의 자유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적어도, 둘만이 있을 때는 아가씨를 이리 부르는 것을 허락해주시지요.”
총관의 고집어린 그 말에, 사라는 그만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설사 자신이 어떠한 말을 한다고 한들, 결단코 자신에 대한 호칭을 순순히 바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누구보다 자신이 더욱 잘 알고 있었기에.
...허나, 아가씨라는 칭호는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총관에게서 ‘아가씨’라는 칭호로 불리고 있자면, 마치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었다. 과거, 그와 자신이 약혼자 사이였던, 언젠가 그의 아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곤 하던, 그와 함께 했던 모든 나날의 시간들이.
“.....”
그 날의 기억은, 더 이상은 떠올리기조차 싫었다.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현재의 그녀에게 있어서 세상 어떠한 것에도 비할 바 없이 소중하고, 아련했던 시간이기에 함부로 떠올리기조차 싫었기 때문이었다.
...딱 하나, 그를 탐탁치 않아하던 자신의 어리석은 모습만을 이 기억 속에서 후벼 파버릴 수만 있다면, 정말 완벽한 기억이 아닐 수 없을 텐데.
허나 이제 그와 단 둘이서 함께 했던 과거의 기억 따위, 이젠 정말 자신의 추억 속에만 고이 남겨두어야만 할 듯 했다. 왜냐하면, 한 때 제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소문이 그 머나먼 거리를 경유한 끝에 드디어 에스텔 공작령까지 도달하게 되었으니까.
“정말로, 괜찮으십니까?”
총관의 우려가 섞인 질문에도, 사라는 꿋꿋하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인다. 사실, 이렇게라도 강한 척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았기에, 모든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괜찮아요. 아니, 오히려 소공작님께 무척이나 잘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요.”
그렇다. 카인과 황녀가 혼인을 맺는다는 사실은, 실로 경사스러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황녀는 매우 아름다우며, 능력 있는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 카인과 황녀, 그 둘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면 그 어떠한 사람이라도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여인이 아닐 수 없다 인정할 수밖에 없을 테지.
더욱이 황족과 혼인을 맺음으로서 생겨나는 정치적 이득 또한 어마어마하였다. 황녀와의 혼인을 통해 그녀가 에스텔 공작가에 가져올 막대한 지참금부터 시작하여, 황실과 사돈관계를 맺게 됨으로서 제국 전체에 에스텔 공작가의 위상이 상승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까지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이득 밖에 존재하지 않는 혼인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러니, 축하해주는 것이 옳다. 설사 자신이 그의 곁에 있어봐야, 자신은 그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으니까. 아니, 오히려 그에게 잔뜩 민폐만 끼친 여자이니까. 그의 곁에는 황녀나 아리아와 같이 아름답고 유능한 여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이 분명 옳은 길이라 생각한다.
비록 네게 닿지 않아도 좋다. 지금 내 감정이, 하나의 세찬 감정이 되어 네게 닿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품고 있는 감정을, 네가 꼭 알아차려주지 않아도 괜찮다.
누군가를 향한 사랑만이, 누군가를 향하는 감정의 전부는 아니니까.
이렇게나마, 이런 모습으로나마, 나는 그저 네가 행복하기만을 바랄 따름이다.
...그래, 정말로.
“...전,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아요.”
왠지 모르게 세차게 떨려오는 어깨를 꽉 하고 붙잡으며, 사라는 간신히 그러한 대답을 내놓는다.
피곤함 때문인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말았다.
두 눈을, 꼭 하고 감았다. 그녀를 둘러싸고 세상에는 오직 어둠 밖에 없었다.
아마, 두 눈을 이렇게 꼭 감고 있기 때문이겠지.
적어도, 사라는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