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7)13.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 - 11
에스텔 소공작과 황녀가 연회장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둘이 함께 자리를 비우고 나서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처음에 자리를 비울 때만 하더라도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였는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연회장을 빠져 나가더니, 돌아올 때는 아주 당당하게 서로 간의 손을 꼭하고 잡으며 들어왔다. 마치, 자신들이 현재 어떠한 사이인지 이젠 숨기지 않고 모두에게 과시라도 하겠다는 것 마냥.
“...허어.”
“...으음.”
연회장에 모여 있는 좌중들은 주위의 시선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어느새 인가 둘 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연인의 볼썽사나운 작태를 가만히 바라보며 그만 말이 되지 못한 신음성을 목구멍 뒤편으로 넘어 삼키고 말았다.
방금 전, 황녀의 반응으로 미루어볼 때 이번 혼인이 단순한 정략혼이 아니라 에스텔 소공작과의 진지한 애정으로 이루어진 혼인관계라는 것은 익히 짐작했다만, 그렇다 해도 저토록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관계를 모두에게 드러낼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도 해보지 못했단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이들은 고작해야 저 둘이 연회장의 한 가운데에서 서로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일 따위로 놀라움을 표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고로 귀족들이라는 종자는 체면과 겉치레를 먹고 사는 생물인지라, 실제로는 눈조차 마주치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나쁜 부부일지라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방금 전 백년해로를 약조한 신혼부부마냥 굴어대는 인간이 이 바닥에는 널리고 깔렸다.
오히려 혼인을 약조한 젊은 남녀가 공식석상에서 서로에게 어색하게 구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이 진정으로 화제가 될 만한 일이지, 타인을 향해 비춰지고 있는 겉모습 따위, 백날 화기애애하게 보여도 결과적으로는 아무 짝에 쓸모없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었기에.
이 자리의 모여 있는 이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직까지도 서로의 손을 꼭 하고 붙잡고 있는 젊은 연인의 풋풋한 애정행각 따위가 아니었다. 방금 전, 에스텔 소공작과 함께 연회장 바깥에 나갔다온 황녀의 복장이 달라져 있었다. 아까는 분명히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현재 그녀의 복장은 청명한 푸른색 드레스로 뒤바뀌어 있었다.
또한, 언제나 단정하기만 했던 황녀의 헤어스타일이 어딘가 모르게 흐트러져 있었으며, 본인은 인지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만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에는 아직까지도 땀방울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쯤 되면 연회장 바깥에서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지 못하는 놈이 등신일 것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황녀의 암묵적인 ‘선언’임이 틀림없겠지. 자신과 에스텔 소공작은 아직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님에도, 이렇게 열정적으로 불타오를 정도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사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공표하는 암묵적인 메시지.
지금 이 순간, 연회장에 모여 있는 모든 귀족들은 직감하고 말았다. 별 것 아닌 정략혼일 것이라 생각했던 에스텔 소공작과 황녀의 혼인이, 어쩌면 제국의 권력 구조에 크나큰 지각변동을 가져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편, 연이은 결투로 인해 드레스가 걸레짝이 되어 옷을 갈아입고 온 황녀는 연회장 내의 분위기가 종전과는 달리 소강상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영문 모를 의아함을 품고 말았다. 아직 연회가 끝날 때까지 시간이 한참이나 남았거늘, 이토록 가라앉은 듯한 분위기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야 그것도 당연한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황녀의 의문에 카인은 심드렁한 어조로 대답을 하였다.
“바깥에서 산봉우리가 무너져 내리고 사방 천지에 굉음이 울려 퍼지는데도 연회장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춤이나 추는 사람이 더욱 비정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카인의 대답에 황녀는 맑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듣고 보니 그도 그렇긴 하군. 아니, 오히려 칭찬을 해주어야 하나. 자기 몸보신 하나는 끔찍하게 여기는 것들이 용케 황궁 밖으로 도망치지 않고 연회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말이지.”
카인은 산봉우리가 무너지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아리아의 재빠른 조치가 있었기에 연회장에 사람들이 아직도 이렇게 남아 있는 것이라는 해명은 굳이 하지 않았다. 굳이 이런 순간에 다른 여자의 이름을 들먹여 황녀의 기분을 잡치게 할 필요성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좌우지간, 연회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한 쌍의 남녀가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오니 분위기는 다시금 정상화 되었다. 오직 그들만을 향하던 주위의 시선도 점차 하나둘씩 거두어지며, 연회장 전체에 부드러운 선율의 음악이 다시금 잔잔하게 흐르기 시작한다.
무곡(舞曲)소리에 맞춰 좌중에 모여 있던 젊은 남녀들이 다시금 한데 어울려 춤을 추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황녀는 카인을 힐끗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그러고 보니, 간만의 연회라고 할 수 있는데 아직 춤을 추지 않은 것 같군. 다른 남자와 혼약을 약조한 임자가 있는 몸이다 보니 어떠한 남자도 내게 춤을 신청하지 않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며 춤을 신청하던 건방진 애송이의 행동 따위는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워진지 오래였다.
“카인, 부디 나와 한 곡 추지 않을 텐가.”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손을 보며, 카인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원래 춤 신청은 남자 쪽에서 먼저 권유하는 것이 매너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무얼, 춤 신청쯤이야 누가 먼저 하건 간에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찌되었든 그대와 춤만 추면 되는 노릇이 아닌가.”
두 남녀의 시선이 서로 교차하더니, 이내 기다렸다는 듯 씩 하며 웃음을 짓는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두 사람은 다시금 서로의 손을 마주잡고, 연회장의 한가운데로 발걸음을 옮겨 갔다.
“그러고 보니 춤은 조금 오랜만에 추는 지라, 저하의 발에 실례를 범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미리 해둬야겠군요.”
“무얼, 그리 걱정하지 말게. 그대는 그저 나의 움직임에 맞추어 따라오기만 하면 되니까. 오늘은 내가 그대를 리드해주도록 하지.”
황녀는 카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카인은 황녀의 허리에 손을 가져다 댄다. 둘은 이내 연회장 내에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소리에 맞춰 사뿐사뿐 스텝을 밟기 시작하였다.
흡사 검무(劍舞)라도 추듯, 연회장 한가운데에서 우아하게 춤을 추는 남녀를 향해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다. 허나 정작 그들은 타인의 시선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오직 자신의 눈앞에 있는 상대방만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서로가 내뱉는 호흡이 맞닿는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그녀는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에게 무언가를 속삭인다.
“...그러고 보니, 결투에서 패배한 자는 승리한 자의 것이 되기로 약조를 했었지. 그 논리대로라면 나는 이제 그대의 것이니, 지금부터라도 그대를 향해 존댓말을 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과 같이 나의 하나뿐인 주인을 향해 반말을 늘어놓는 행위는 참으로 무례한 일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만.”
그녀의 짓궂은 질문에, 카인은 피식하며 웃음을 짓고 말았다.
“글쎄요. 저는 굳이 저하께 존대를 강요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왠지 모르게 자신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는 황녀는 그거대로 뭔가 무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호오, 굳이 말투와 같은 허례허식에 얽매이지 않아도 이미 나는 그대의 것이니 상관없다는 호기로운 태도인 것인가? 뭐, 그대의 노림수대로 내가 얌전히 공작가의 안주인 행세를 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얌전한 말투를 사용해야만 하겠지. 사실 나도 거추장스러운 황제 행세보다는 뒷방에 앉아 소소하게 살림이나 꾸려나가는 쪽이 더 끌리던 찰나였으니.”
“저하께서 제위를 포기하시면 어느 누가 제국의 황제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거야 내 알 바는 아니지. 방계 중에 적당하고 무능한 누군가를 골라 앉히지 않겠는가.”
상상만 해도 유쾌한지 쿡쿡하고 웃음을 짓는 그녀.
“사실 이제와 하는 고백이다만,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현모양처가 꿈이었다네. 이대로 꼼짝없이 황제가 되어야만 하는 줄 알고 조마조마했다만, 그대 덕에 소원을 성취하게 되었군.”
그리 말을 하며 그녀는 일순간 스텝을 멈추고 몸을 정지시킨 채 그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이내 그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키스였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전부 지켜보는 한 가운데에서. 그리고 오직 낭만으로 가득 찬.
다소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을 지닌 그녀다운, 고전적인 연회의 마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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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쌍의 남녀가 연회장의 한가운데에서 오직 서로만을 바라보며 춤을 추고 있을 무렵, 연회장의 바깥에서 그들을 단란한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한 여인이 존재하였다.
아리엘 티에르.
여신의 현신이라 불리며, 언제나 만민을 향해 자애로 가득 찬 표정을 지어보이던 그녀는 현재, 너무도 일그러진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아니, 어찌보면 물고기와 같이 죽은 눈을 하고 있는 아리엘은 저 곳에서 춤을 추고 있는 남녀의 모습을 자신의 눈동자 속에 담아내며 슬픔과 좌절과 아픔과 분노가 가득 뒤엉킨 듯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얼굴을 짓고 있었다.
“...아, 아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어째서, 자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저 남자가, 저런 이상한 여자와 춤을 추고 있는 것일까. 대체 어째서, 저리도 자연스럽게 손을 마주잡고 있는 것일까. 대체 어째서, 저리도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대체 어째서, 자신은 이토록 아파야만 하는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숨을 헐떡이고 말았다. 뇌수에 불이 붙어,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잡동사니마냥 굴러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의 팔을 움켜잡고 말았다. 손톱이 팔을 파고든 끝에, 피가 새어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이 따위 아픔 따위 그녀에게는 단죄의 아픔조차 되지 못한다.
한 때 자신의 목숨보다 더욱 사랑했던 그가, 지금은 이토록 밉게만 느껴진다. 그에 대한 사랑의 크기만큼, 증오라는 감정을 느끼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 대체 왜 자신이 이토록 비참한 기분을 맛봐야만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가 저곳에서 다른 여자와 뒤엉켜 있는 것이 싫었다. 그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여자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싫었다.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를 우선시하는 것이, 싫었다.
...그가, 감히 나를 제치고 먼저 아이를 가지겠다는 말을 입에 올린 저 여자와 함께 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너무도 싫었다.
당신만은, 당신만은 내게 그래서는 아니 된다. 당신만큼은, 내게 그리 행동해서는 아니 된단 말이다.
당신도 알고 있지 않은가. 당신도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자그마한 오두막에서 함께한, 따스했던 10년이라는 세월에 대해.
우리의 하나뿐인 아이와 함께, 세 명이서 함께 만들어간 그 보물과도 같은 시간에 대해.
그런데 어찌, 나를 놔두고 감히 다른 여자와 먼저 혼인을 치르겠다는 말을 올릴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들 중, 그와 가장 먼저 이어진 사람은 나이다.
우리들 중, 그와 가장 먼저 사랑의 결실을 품은 사람은 바로 나이다.
우리들 중, 그를 가장 먼저 좋아했던 사람은, 바로 나란 말이다.
내가 가장 먼저 좋아했는데, 내가 가장 먼저 사랑했는데. 내가 가장 먼저 그와 함께 했었는데-
대체 어째서, 그는 나를 제쳐둔 채 저 야만적인 여자를 먼저 택한 것이란 말인가.
대체, 어째서-
가슴이 갈갈이 찢이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연회장 한 가운데에서 입술을 맞추는 두 남녀를 바라보며 아리엘은 스스로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현재의 자신이, 너무도 비참하고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그 때의 오두막이, 너무도 그리웠다. 그와 자신과 아이, 셋만이 존재했던 그 시절이 너무도 그리웠다.
아이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런 딸이, 너무도 보고 싶었다.
그렇기에 싫었다. 자신의 주위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은 이 허전함이. 이 공허함이.
...지금 슬퍼하고 있는 자신의 손을 붙잡아줄 사람이 주위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쓸쓸함이.
그저, 싫기만 하였다.
너무나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