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5)13.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 - 09
나의 말이 내뱉어 진 순간, 일대에는 잠시 침묵만이 흐른다.
허나 그것도 잠시.
“...하.”
나의 호기로운 장담을 들은 아이리스는 아주 잠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아하하, 하하하하하하하!”
진심으로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듯,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이야, 도무지 제정신이라고는 봐주기 힘든 제안인걸, 카인! 하지만 재밌어. 그것도 아주 재밌어. 그리고 동시에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는 매혹적인 제안이기도 해. 왜냐하면 결투에서 이기건 지건, 내가 손해 볼 일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나를 바라보며 재미있다는 듯 맑은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아이리스를 눈앞에 두고서도, 나의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어디까지나, 진심에서 내뱉은 말 이었으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하는데, 아이리스. 내가 만약 너와의 결투에서 승리한다면, 너는 오직 나만의 것이 되어 주어야만 하지. 그리 된다면 방금 전 네가 내게 장담하였던 대로, 너는 나를 혼자서 독점할 수는 없게 될 텐데.”
나의 말에, 아이리스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그저 관점의 차이지. 말했지, 카인? 나는 지금 이 순간, 너라는 사람을 마음깊이 사랑하고 있는 중이라고. 네가 온전한 나의 것이 되어주는 것이 내게 있어서는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긴 하다만,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실력 차에 의해 패배를 겪어 너의 소유가 된다는 것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지. 언젠가 네게 밝혔다시피, 나의 이상형은 나보다 강한 남자이니까.”
아이리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본다.
“하지만 내가 너의 소유가 된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네가 결투에서 승리를 하였을 때의 이야기가 아니던가?”
순간, 아이리스의 몸에서 흡사 칼날과도 같은 날카로운 기세가 새어져 나온다. 그 기세에, 나는 꼴사납게도 몸을 뒤로 주춤거리고 말았다.
“카인, 설마 나와 똑같이 ‘흐르는 별’을 익혔으며, 똑같은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서, 승산 또한 똑같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망상이라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
“나는 너에게 검술을 알려준 장본인이자, 네가 실시간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유일한 사람이야. 호흡을 하는 법, 숨을 곧게 내쉬는 법, 발을 옮기는 법, 검을 쥐는 법, 검을 휘두르는 법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네게 알려준 스승과도 같은 존재란 말이지. 현재 네가 구사하는 검술 속에는, 나라는 여자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너 또한 부정할 수 없을 텐데?”
“자식은 결코 부모를 당해낼 수 없는 법. 하물며, 스승을 뛰어넘지 못한 제자는 두 말할 필요도 없지. 지금 네 행동은 승산이라고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 도박에 몸을 던진 것과 같다는 것을, 왜 너만 알고 있지 못하는 것일까.”
그녀는 나를 조롱하고자 저러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단순한 사실을 나열하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 그러한 사실을, 세상 어느 누구보다 앞서 나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중이었다.
현 시점의 아이리스는 제국에서 제일가는 검사(劍士)인 동시에 무력으로만 따진다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절대적인 강자.
...애당초, 그녀에게 싸움을 거는 행위 자체가 내게 있어서는 자살행위와 동등한 우행(愚行)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싸움에 임함에 있어 승산 따위는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상대방과 검을 맞대는 나의 마음이 어떠한 형태를 하고 있는가. 오직 그것 하나일 뿐.
“미안하지만, 아무리 상대가 너라도 봐줄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어. 아니, 오히려 상대가 너이기에 더욱더 봐줄 수는 없지. 네가 정녕 그 때의 결투를 계속하고자 하자면, 나 또한 진심으로 너를 상대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건, 오히려 이쪽에서 할 말이다. 아이리스.”
그리 말을 하며 나는 아리아가 손에 쥐고 있던 검 한 자루를 그녀에게서 받아들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아이리스의 방에서 들러 가지고 나온 그녀의 검이었다.
“결투는 최대한 공정해야겠지? 안 그래?”
그것은, 푸른 장식으로 감싸여진 황금의 검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여신이 하늘로 돌아가기 직전에 지상에 남기고 간 파편을 가공하여 검으로 만들었다는 전승이 남아 있는 대륙 8대 기보 중 하나, 귀천검(歸天劍)을 그녀의 손에 건네주었다.
나에게서 자신의 검을 받아든 그녀는 한동안 나를 말없이 바라보더니, 이내 입가에 자그마한 실소를 머금었다.
“...카인, 넌 내 생각보다 훨씬 제정신이 아니었구나. 안 그래도 희박한 승산을, 스스로의 손으로 더더욱 줄여 버리다니.”
스릉, 하는 청명한 소리와 함께 아이리스는 검집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새어 나오는 살기는 배가 되었다. 그녀는, 진심이었다.
“좋아. 아무래도 한 점의 아쉬움도 없는 정당한 결투를 바라는 것 같은데, 네 소원대로 기꺼이 어울려 주지. 지난 생, 다하지 못했던 결투의 끝을 이곳에서 보도록 하자고.”
그 말과 함께 아이리스의 검에서 새하얀 색의 오러가 마치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에 맞서, 나 또한 검을 들어 푸른색의 오러를 집속시키기 시작한다. 그것만으로도 나의 검은 강철조차 양단할 수 있는 예리함과 단단함을 얻게 되었지만, 넘실거리는 하나의 불꽃과 같은 아이리스의 오러에 비하자면 나의 오러는 아직 한참이나 부족할 따름이었다. 만약, 서로의 오러가 맞부딪히게 된다면 나의 오러 따위는 무참히 산산조각 나버리고 말겠지.
“.....”
목구멍으로 침을 넘어 삼킨다.
그녀는 결코 알지 못하는 사실이겠지만,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순간을 구상해왔었다.
루시안 그 빌어먹을 녀석을 에스텔 공작가에 기사로서 받아들여 준 것도, 굳이 데카라즈난 공작가까지 가서 검술을 연마했던 것도, 어울리지 않게 연무장에서 구슬땀을 흘려가며 검술을 연마했던 것도 전부-
전부, 이 순간을 위하여.
...승산은 극히 희박하다. 하지만, 없는 것은 아니다. 맨몸으로 바늘 끝을 통과하는 것과 같은 실낱같은 가능성을 현실에 구현시키는 것은, 오롯한 나의 영역.
나의 진가를 시험당하는 때는 바로 이 순간.
지금 이곳에서, 나는 나의 스승을 뛰어 넘고자 한다.
****
카앙-!
검과 검이 교차한다. 서로가 내지르는 검은 겹침과 튕김을 무수히 반복한다. 어느새 묵직한 강철끼리 부딪히는 소리만이 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말았다. 나와 그녀의 주위에는 불꽃이 가득 찬 끝에, 주위의 모든 것을 불살라버릴 것만 같이 여겨진다.
“...윽!”
나의 목에서는 어느새 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이리스가 휘두르는 검격을, 도저히 시인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녀의 검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로부터 내질러지는 검은, 느릿하긴 하지만 확실하게 나를 무너뜨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대체 어째서인가. 같은 검술을 구사하며, 같은 속도의 참격을 내지른다.
아니, 완력으로만 따진다면 오히려 이쪽이 우위일 테지.
...그런데도, 그녀와 나 사이에는 도저히 메꿀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아아아아아아-!”
등어리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두려움을 떨쳐내고자 기합을 내지른다. 그간 필사적으로 갈고 닦아온 검술을 그녀에게 쏟아 부어 보지만.
타다다다당-!
아이리스는 서 있는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조차 움직이지 않은 채 나의 공격을 모조리 튕겨내고 말았다. 아니, 그것도 모자라 그녀의 검이 뒤집혀지며 나를 향해 쇄도하기까지 한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가벼운 견제에 불과할지 몰라도 나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일격은 전부 필살.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되돌려 그녀의 일격을 방어하려 한다-!
카앙-!
다음 순간, 강철이 세차게 부딪히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는 것과 함께 나는 그녀의 일검을 막아낸 대가로 십여 미터를 뒤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아주 잠시, 우리 둘 사이에 거리가 떨어진 틈을 타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려 한다.
“...하아, 하아, 하아...”
서로 간에 합을 나눈 지 벌써 수십 합, 이쪽은 벌써 숨결이 갈라져 있는데, 대조적으로 그녀는 호흡 하나 흐트러져 있지 않다. 저쪽은 ‘하늘의 검’은커녕, 변변한 기술조차 사용하지 않는데도 그러하다.
그것도 당연한 노릇이겠지. 처음부터 자신이 승리할 것이라고 알고 있는 싸움에, 긴장감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애당초 그녀와 나는, 검사로서의 격이 두 단계 정도는 차이가 난다. 그녀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것은 단순한 놀이에 불과할 테지.
“제법인데. 못 보던 사이에 검술이 제법 많이 늘었어. 좋지 않은 버릇도 많이 없앴고. 하지만 검 끝에 힘을 온전히 싣지 못하는 점은 여전한 것 같네. 내가 누누이 충고했을 텐데. 검사란 무릇 스스로의 검 속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내야 한다고. 신념이 담겨있지 않은 검은 그저 단순한 칼부림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그새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인가?”
마치 스승이 제자를 향해 훈계라도 내리는 것 같은 말투. 하지만 그녀에게는, 나에게 저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하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실제로 그럴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으니까.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잘 알고 있음에도 면전에서 대놓고 저런 말을 들으면 머리에 열이 도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듯 했다.
“...제길-!”
‘흐르는 별’을 사용해 힘의 와류(渦流)를 검 끝에 집중시킨다. 노리는 것은 그녀의 심장. 대기의 저항을 비롯한 불필요한 모든 종류의 ‘흐름’을 배제시킨 채 내질러지는 혼신의 찌르기는, 마차 하나의 섬광과도 같다!
하지만-
“소용없어.”
나의 혼신의 일격은, 마치 거짓말과 같이 그녀의 검에 아주 간단하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분명히 가르쳐줬을 텐데. 흐르는 별은 결코 마법이 아니라고. 흐르는 별이란 시전자를 중심으로 발생하는 힘의 흐름을 검을 통로로 삼아 인위적으로 조절을 하는 원리의 기술. 거꾸로 말하자면, 상대방이 사용하는 ‘흐르는 별’을 내 쪽에서 간섭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지. 네가 구사하는 흐르는 별에서 파생되는 흐름 또한, 엄연한 힘의 일종이라 할 수 있으니까. 물론, 상대방보다 흐르는 별의 숙련도가 높다는 가정 하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내게 가르침을 내리는 것 같은 그 말과 함께, 아이리스는 그대로 나의 배에 발을 꽂아 넣었다.
“커헉!”
아이리스가 내지른 발차기에, 나는 그 자리에서 튕겨져 나가 바닥에 볼썽사납게 구르고 말았다. 지금이라면 간단하게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음에도, 그녀에게는 마무리를 지으려는 기색이 없다. 아니, 저것은 승패 따위는 자신이 원할 때 얼마든지 결정지을 수 있다는 오만함에서 비롯된 태도임이 틀림없다-
“거기까지야. 이젠 머리가 좀 식지 않았어? 너는 날 이길 수 없어.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현재의 너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을 알려준 스승이자, 부모와 같은 존재야. 네 버릇, 네 검술, 네 사고방식 같은 것은 너 자신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다고.”
“.....”
“그러니 이제 그만 포기해. 내 것이 된다는 게 네게 있어서 나쁜 것만은 아닐 텐데. 내 것이 된다면 세상의 어떤 사람에게도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을 테니까. 왜냐하면 너는, 제국의 주인의 하나 뿐인 반려자가 될 사람이니 말이야.”
그녀의 제안에, 나는 목구멍으로 넘어오려던 핏덩이를 애써 넘어 삼키며 이리 답을 하였다.
“거절하지.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숨을 최대한 가지런히 고르며, 말을 또박또박 외친다.
“나는, 결코 너만의 것이 되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너야말로, 순순히 항복하고 내 여자가 되라고.”
나의 대답에, 아이리스의 눈초리는 방금 전보다 두 배는 사나워진다. 그녀가 들고 있는 검의 오러가, 방금 전보다 더욱 세차게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그래, 굳이 벌주를 마시려 하는구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힘으로라도 그 사실을 강제로 새겨넣어주는 수밖에.”
그녀가 들고 있는 검에 하나의 흐름이 집중되기 시작한다. 정상적이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인위적인 흐름의 조절. 일점으로 수렴된 대기의 흐름은 한 곳으로 응집된 끝에 거대한 진공의 칼날을 형성하고, 범위 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강제적으로 분쇄하는 하나의 폭풍으로 화한다.
나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흐르는 별의 숙련도를 지니고 있는 아이리스이기에 선보일 수 있는 기예. 그 이름은 바로-
“하늘의 칼날.”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던 검이, 나를 향해 내려친다. 한 줄기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절대적인 죽음이 내게로 떨어지려는 바로 그 순간-
"....!"
자세를, 바로 잡는다. 줄곧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그녀가 ‘흐르는 별’을 사용하는, 바로 이 순간을.
가장 기본은 에스텔 공작가의 비전검술, 명신(明神). 기본기에 충실한 그저 우직한 것 밖에 장점이 없는 검술이다만, 그렇기에 명신은 그 안에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었다. 나는 명신 속에, 투르니젠의 ‘어스름한 달’과 데카라즈난의 ‘이지러진 태양’을 담아내었다.
빠름과 직선을 목표로 하는 ‘어스름한 달’과, 상이함과 변칙을 목표로 하는 ‘이지러진 태양’은 실로 상반된 검술. 그 두 가지 검술을 한꺼번에 펼치는 반동은, ‘흐르는 별’로 조율한다.
단 한 번의 올려베기에 검술을 무려 4가지나 동시에 펼치는 기예. 하지만 실패할 리가 없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줄곧, 이 순간 휘두르는 단 한 번의 검을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 왔기에!
신(神)에, 태양과 달과 별이 깃든 끝에 나의 푸른 오러와 융합하여 절대적인 파괴의 이미지를 현세에 구현시킨다. 언젠가의 스승을 동경하여, 그녀와 같이 하늘에 닿고자 한 일격이, 다름 아닌 자신의 스승에게 쏟아진다.
“극천(極天).”
천상으로 향하는 하늘에 닿고자 한 일격과, 지상으로 떨어지는 하늘을 가르고자 한 일격이 서로 교차한다.
파직-
“...맙소사, 이건.”
그 놀람은, 대체 누구의 것이었는지.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아이리스가 휘두른 ‘하늘의 칼날’은 그대로 산산이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