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상실에 걸린 마녀를 주워버렸다-134화 (134/201)

(EP.134)13.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 - 08

“...아슬아슬 했군요, 정말로.”

산봉우리의 윗부분이 마치 케이크처럼 잘려나간다는, 인생을 통틀어 본다 할지라도 구경하기 힘든 진귀한 장면을 보자마자 상황이 대충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한 내가 아리아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마주한 광경은 다름 아닌 내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여자 두 명이 피터지게 싸우고 있는, 문자 그대로 유혈이 낭자한 끔찍한 광경이었다.

...참고로 이것은 비유도 뭣도 아닌, 내 눈앞에 비추어지고 있는 광경을 그대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였다. 현재 나와 황녀 사이의 떨어져 있는 간격은 대략 10여 미터. 그리고 불과 10여 미터 사이의 땅바닥에, 사람의 선혈이 묻어 있지 않은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 그 어디에도.

“.....”

나는 아리아의 손에 들린 채로, 지금 이 순간에도 숨을 헐떡이고 있는 아리엘을 말없이 바라보고 말았다. 황녀로부터 대체 어떠한 일격을 받아낸 것인지, 몸이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잘려나간 끝에 몸 안에 깃들어 있던 피를 모조리 쏟아낸 것만 같은 아리엘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삼키고 말았다.

이건, 뭔가 아니었다. 이건 정말로 아니었다. 황녀와 아리엘이 화기애애하다던가 혹은 돈독하기 이를데가 없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물론 황녀나 비앙카 같은 여자가 다른 귀족가의 여식들처럼 점잖게 말다툼이나 하거나 질투심을 못 이겨 다른 여인의 뺨을 때리는 등의 귀여운 행동을 할 것이라고는 애당초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산봉우리 하나를 통째로 날리거나 멀쩡한 사람의 몸을 반 토막 내버리거나 이 일대를 피바다로 만들어버리는 일 또한 결코 정상적이라고는 말하기 힘들었단 말이다.

왠지 모르게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아파오는 것을 애써 참아내며, 나는 아직까지도 전의(戰意)를 잃지 않고 있는 기색인 황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하시지요, 저하. 이만하면 충분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리엘은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저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리고 그 때였다.

“거기서 비키게나, 그리고 우리 사이의 일에 끼어들지 말게나. 아리엘과 나 사이에서는 아직 어떠한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으니. 이건 오롯이, 아리엘 티에르와 나 사이의 개인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 일이라네. 설사 자네라고 할지라도 우리 사이의 문제에 끼어들 권리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하는군.”

엄준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황녀는 나를 향해 이것만큼은 그 어떠한 것도 양보할 수 없다는 듯 딱 잘라 말을 하였다.

“이것은 나와 아리엘 사이에서 행해진 결투의 정당한 결과일세. 자네가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끼어든 것인지는 짐작이 가지만, 자네의 행동은 거기 누워 있는 아리엘을 무시하는 것 그 자체나 다름없는 행위와 다름이 없다네. 설마 저곳에서 지금까지 결투를 관전하고만 있던 비앙카가 손발이 없어서 내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황녀의 말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저편에 우두커니 서 있던 비앙카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내가 보내는 시선을 알아채자마자, 비앙카는 황녀의 말에 수긍이라도 하는 것 마냥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번만큼은 저하의 말씀이 옳아. 두 사람의 결투 직전, 아리엘이 내게 당부했어. 이 결투에 절대로 끼어들지 말라고. 이건 자신의 싸움이니, 다른 사람의 도움 따위는 받지 않겠다고. 관전자로서 지켜본 저 두 사람의 싸움은 오롯이 저 둘 만의 것이었으며, 그 과정 속에서 두 사람은 사력을 다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내었지. 그러니, 나 또한 이번만큼은 네 편을 들어주지는 못할 것 같아, 카인.”

“.....”

비앙카의 말에,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말았다. 그녀의 지적대로, 이 난장판이 황녀와 아리엘의 정당한 결투의 결과였다면 내가 끼어들 명분 따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모든 것을 걸고 임한 결투 속에, 제 삼자가 마음대로 끼어드는 것만큼 무례한 행위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하, 아... 하, 윽...”

걸치고 있던 법의(法衣)가 갈갈이 찢어진 끝에 상반신이 거의 노출이 된 거나 다름없는 차림새를 하고 있음에도, 내 눈에 들어오고 있는 장면은 아리엘의 새하얀 피부 위를 가로지르는 끔찍한 자상과 그 상처에서 끊임없이 새어져 나오는 핏물 뿐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로.

개인적으로, 내 여자가 상처를 입고 바닥에 쓰러져 신음성을 흘리고 있는 장면이란, 그 어떠한 이유를 들더라도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이라 생각될 뿐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자리에 아리엘이 아니라 아이리스가 누워있었더라도 나는 똑같이 행동을 하였을 것이라는 점이겠지.

“...한 가지, 뭘 좀 여쭈어 봐도 괜찮겠습니까?”

“좋네. 그대가 질문을 하는 것을 허하도록 하지.”

황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아직까지도 아리아의 손에 들린 채 숨을 거세게 몰아쉬는 아리엘의 상처를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리도 치열하게 싸우신 것입니까? 저하와 아리엘 간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음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것은 도가 좀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나의 질문에 황녀는 그저 빙그레 웃음을 짓기만 할 뿐이었다.

“그야 치열하게 싸울 수밖에 없지. 카인, 한낱 짐승들조차 일정 영역 안에 여럿이 모여 살게 된다면 서로 간의 서열과 우위를 정하려고 하는 법이지. 그런데 하물며 인간은 어떠하겠는가. 나는 그저 자네 곁에 머물고자 하는 여인들 사이의 서열을 확고히 하고자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을 뿐이라네.”

“...서열?”

이건 또 무슨 이해가 가지 않는 소리란 말인가.

“카인, 나는 자네라는 남자에 대해 제법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네. 자네는 참으로 우유부단한 겁쟁이인 주제에, 한 번 자신의 손에 들어온 것은 결코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하는 욕심쟁이 이기도 하지. 그런 그대가 하고 있는 생각 따위, 그야말로 눈에 훤히 보인다네. 자네는 결코 자네 곁에 머물고자 하는 여인들을 매정하게 내칠 성격이 되지 못해. 비앙카 델 카스타나를 끌어안았듯, 자네 옆에 매달려 사랑을 갈구하는 여인들을 자네는 전부 받아들이고야 말겠지. 그렇지 않은가?”

“.....”

“사실, 나는 자네 곁에 다른 여자의 모습이 비추어지는 것 따위, 참으로 질색이라네. 그래, 예를 들어 지금과 같이 다른 계집들이 그대의 곁에 득실거리는 광경 따위, 정말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네. 머리에 저절로 화가 치밀 만큼 짜증이 나는 것은 일종의 덤이라고 할 수 있고.”

그리 말을 하는 황녀의 두 눈에는 알 수 없는 기광만이 번뜩이고 있었다.

“혹시라도 시치미 뗄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걸세. 자네가 나와 관련된 기억을 어렴풋하게나마 떠올리고 있음은 진작부터 눈치 채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대에게도 기억이 있다면 잘 알고 있겠지? 과거, 그대의 곁에는 오직 나만이 있었으며, 내 곁에는 오직 그대만이 존재하였지. 세상에는 오직 그대와 나만의 사랑만이 가득 차 있었다네. 그것만이, 내가 바라던 전부이자 모든 것이었지.”

“헌데 이제는 아니야. 설사 내가 그대 곁에 없더라도, 그대의 곁에는 나를 대체할 다른 계집들이 득실거리고 있다네. 물론, 머릿속으로 이해는 한다네. 저 여자들 또한, 나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 과거로 돌아온 자신들의 세계의 주연배우임을 잘 알고 있으니. 하지만, 설사 머릿속으로 이해는 하더라도 내 가슴이 이해를 거부하는 것을 내가 대체 어찌할 수 있겠는가?”

일그러진 웃음 따위 이미 그녀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의 말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이미 각오를 굳힌 듯한 흔들림 없는 살기뿐.

“마음 같아서는 자네의 곁에 있는 다른 계집들을 전부 죽여 버리고 오직 나 혼자서 그대를 독차지하고 싶다네. 하지만 그리 한다면 나는 필시 그대의 미움을 받고 말테지. 그것만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러니 차선책으로나마 여자들끼리 서열 정리라도 하려 했던 것이라네.”

“자네에게도 이미 말했다시피, 황실의 권력으로서 자네의 거의 모든 것을 옭아맬 수 있다만 동시에 그런 것 따위로는 비앙카나 아리엘과 같은 초월자까지 옭아맬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렇다면 남은 길은 오직 하나, 무력으로 모든 것을 결정지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우리는 자네를 하나의 ‘상품’으로 걸고, 서로의 모든 것을 건 결투를 감행하였던 것이라네. 자, 이 정도면 자네의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변이 되었는가?”

그리고 황녀의 말에 호응이라도 하듯, 저편에 쓰러져 있던 아리엘조차 숨을 헐떡이며 가까스로 스스로의 몸을 일으킨다. 그 모습은 참으로 연약하고 힘이 없어 보여, 지금이라도 툭 치면 금방이라도 옆으로 쓰러질 것만 같이 느껴지고 있었다. 허나 아리엘에게서도 황녀와 마찬가지로, 상대방을 향한 적의가 끊임없이 새어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저 여자의 말이, 맞아요. 하아, 카인. 이건, 제 싸움이에요. 그러니, 하아, 끼어들지 마세요.”

“...아리엘.”

“저는 절대로,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어요. 저 여자가, 저 여자가 제게 뭐라 그랬는지 아시나요. 저 여자는 감히 저희의-”

“아리엘이야말로, 이제 그만하시지요.”

아리엘의 말을 중간에 딱 자르며, 그리 말하였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이대로 더 이상 움직이다가는, 정말로 죽을 지도 모릅니다. 아리엘이 저하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것이 당신의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나의 말에 아리엘은 아주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이내 그녀로서는 드물게 분노로 가득 찬 표정을 지어 보인다.

“...여보. 아니, 카인. 당신 지금,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고는 있나요. 당신은 지금-”

이대로라면 대화가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기에, 나는 마치 상처 입은 강아지와 같은 눈빛을 보내오는 아리엘에게서 가까스로 눈을 떼고 등을 돌렸다.

“그러니 제발 지금은 얌전히 있어주세요. 불평이라면 나중에 전부 들어줄 테니 말입니다.”

그리 말을 하며 나는 황녀에게로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선다. 그녀의 손에는, 피가 묻은 부러진 나뭇가지 하나만이 들려있을 뿐이었다.

“...상황은 전부 이해하였습니다. 저하와 아리엘이 서로의 모든 것을 건, 결투를 벌이고 있었다는 것 또한 이해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습니까. 제가 아리엘의 권리를 전부 이어받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몸인 아리엘 대신 제가 저하와 결투를 벌이고자 합니다.”

사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녀가, 아니 아이리스가 나를 대하는 모든 행동이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흐르는 별’을 미끼로 삼아 모든 관료들이 보는 앞에서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던진 것부터 시작해, 제도에 도착한 이후 나는 아이리스의 의도대로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기력하게 여기저기 질질 끌려 다니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런 것은, 딱 질색이었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여자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경험은 비앙카 때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더 이상 내 여자에게 관계의 주도권을 빼앗길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단 말이다.

비단 아리엘의 부상 때문이 아니더라도, 지금 이 순간 내가 아이리스를 향해 검을 들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였다. 내가 구상하고 있던 계획과 다소 달라지기는 했지만, 어차피 빠른 시일 내에 그녀와 검을 나눌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나의 말에, 아이리스는 스스로의 눈썹을 치켜세울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미안하지만, 내게는 자네의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도 없을뿐더러, 자네와 검을 나눌 이유는 더더욱 없다네. 내가 뭐 하러 자네와 결투를 행해야 하는가. 이미 아리엘과의 결투는 나의 승리나 다름이 없는데 굳이 나서서 일을 만들 필요는 어디에도-”

하지만.

“저하.”

내게는 그녀를 설득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한 가지 존재하였다.

“지난 생의 끝, 저희들이 나누었던 결투는 제대로 된 끝을 맺지 못했었죠. 그러니 감히, 당신께 청합니다. 그 때 범하였던 무례를, 지금 이 자리에서 벌충하고자 합니다.”

“.....”

“저는 당신으로부터 직접 검을 사사 받은 당신의 하나 뿐인 제자이며, 동시에 저희는 스스로가 쌓아올린 검으로서 대답을 하는 무인이 아닙니까. 그러니, 감히 당신께 검으로서 대화를 나누기를 청합니다. 그 때 나누었던 결투의 끝을, 바로 이곳에서 매듭짓기를 바랄 뿐입니다.”

나의 말에 아이리스는 허를 찔린 것 마냥 멍한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이내 나를 향해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치사하군. 정말로. 그리 말을 한다면, 내가 자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고, 아이리스 역시 내게로 한 발짝 앞으로 다가 선다. 어느새, 우리 둘의 시야에는 서로의 모습밖에 비추어지지 않고 있었다.

“좋아. 당신이 아리엘 저 여자 대신 그 자리에 설 권리를 인정해주도록 하지. 대신, 만약 당신이 결투에서 진다면 당신은 확실하게 내 것이 되어주어야겠어.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내게만 사랑을 베풀어주는 나만의 것이.”

나를 대하는 아이리스의 말투가 바뀌었다. 그녀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나를 그 때의 ‘카인’이라 인정해주고 있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좋습니다. 제가 만약 결투에서 진다면, 저는 저하의 것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다만?”

“만약, 제가 결투에서 이긴다면.”

나 또한, 이 자리의 너를 그 때의 ‘아이리스’라고 생각하고 검을 휘두르겠다.

“아이리스, 너 또한 나만의 여자가 되어 주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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