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0)13.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 - 04
인적이 드문 서쪽 테라스에서 평상시 황족들이 거하고 있는 황궁의 심처로 이어지는 어느 한적한 통로.
그곳에는 평상시의 정갈한 옷차림과는 달리 왠지 모르게 흐트러진 차림새의 드레스를 입고 있으며 어딘가 모르게 성숙한 분위기를 내비추고 있는 제국의 황녀, 아이리스가 실로 우아한 자태를 유지한 채로 또각또각 힐을 밟으며 통로를 걷고 있는 중이었다.
통로를 걷고 있는 그녀의 입가에는 실로 여유로운 미소가 떠오른 상태였다. 언제나 딱딱하게 굳은 표정만을 짓고 있으며, 다른 사적인 감정 따위는 얼굴에 일절 내비추지 않는 그녀로서는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꽤나, 귀여웠지. 아니 정말로 귀여웠어. 그래, 정말로.”
아이리스는 한 차례 키스를 나눈 후, 맞닿아있던 입술을 떼어냈을 때 그가 자신에게 내비추었던 당혹스런 표정을 생각해내며 다시금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그간 체면과 자존심이 있기에 결코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다만, 사실 아이리스는 자신이라는 매력적인 여인을 눈앞에 두고서도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는 카인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관계도 아니고, 카인과 자신의 관계였다. 과거에서 연을 맺고, 미래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연인 중의 연인이라 할 수 있는 관계였단 말이다. 그런 자신이 그의 옆에 찰싹하고 달라붙어 있는 이 상황에서 자신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은, 한 명의 여인으로서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하는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단 말이다. 물론, 그가 자신에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손을 대었다면 그것은 그거대로 꽤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되었겠지만.
좌우지간, 그렇게 불만이 차곡차곡 누적되어 가던 상황 속에서 이렇게 그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크나큰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방금 전, 그와 몸을 섞은 것을 통해 아이리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은 카인을 사랑하며, 그 또한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 그와 함께 나누었던 교감(交感)의 시간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와 자신은, 분명히 이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리스라는 여인이 어떠한 계산도 없이 찰나의 격정적인 감정에 휩쓸린 끝에 여인으로서의 처음을 그에게 가져다 바친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제국의 황녀. 스스로가 행하는 가벼운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커다란 평지풍파를 일으킬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여인이었다.
카인과의 정사 속에는 물론 카인을 향한 사랑이 최우선적으로 깃들어 있었지만, 동시에 여러 정치적 계산이 내포되어 있기도 하였다. 당연하지만, 카인 폰 에스텔이라고 하는 남자를 정치적으로 옭아맨 끝에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악랄한 계획의 일환이었단 말이다.
지금까지, 그녀가 꾸민 모든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흐르는 별’이라는 검술을 미끼로 그를 낚아 올린 끝에 다른 계집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제도로 그를 끌어들인 것이 계획의 첫 번째 단계였으며, 모든 관료들이 모여 있는 어전 앞에서 그와 자신이 연인 관계라는 것을 공표하는 것이 두 번째 단계였다.
그것도 모자라 쐐기를 박기 위해 제국의 정보부를 사적으로 동원, 적어도 제도(帝都) 내에서는 그와 자신과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해 온갖 소문을 필사적으로 퍼뜨리도록 지시를 내린 것이 세 번째 단계였으며, 연회를 핑계로 제도에 거하는 수많은 귀족들을 모아놓은 채로 카인과 자신이 어떠한 관계인지 선언하기까지 한 것이 바로 네 번째 단계였다.
즉, 카인은 영원히 알지 못하는 사실이며 앞으로도 알 수 없을 사실이지만, 그의 미래는 이미 그가 제도에 발을 들여놓은 시점부터 결정이 되어 있었다. 그는 현재 외통수, 아니 체크메이트에 걸려 있는 상태였다.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그는 향기에 이끌려 파리지옥 속에 제 발로 날아든 파리였으며, 굶주린 개미핥기 앞에 놓인 개미와 마찬가지인 신세였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아이리스는 오늘 밤 그와 사랑을 나누기까지 하였다. 물론, 그녀답지 않게 분위기에 휩쓸린 감정적인 선택이었지만 행위 그 자체만 본다면 결코 나쁜 선택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와 혼인을 치르게 된다면 후계자를 생산하기 위해서라도 관계는 필시 가져야만 할 테니까. 또한, 책임감이 강한 카인이라면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을 무작정 거부하지만을 못할 테지.
사적으로는, 아이리스에게 있어 좋지 않은 추억으로 얽혀 있는 서쪽 테라스의 악몽을 떨쳐내 버리기 위해 그리 행동을 했던 점도 있었다. 아이리스는 오늘 카인과 자신이 사랑을 나눔으로서 테라스 전체에 배여 있던 사라의 냄새가 덮어씌워졌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서쪽 테라스는 그녀에게 있어 더 이상 악몽과도 같은 장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 함께 사랑을 나눈 추억의 공간으로 탈바꿈 하게 된 것이리라-
실로 완벽했다. 모든 계획이 술술 풀려나가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라면 미래영겁, 자신의 옆자리에 그가 있어준다는 것 또한 결코 꿈이 아닐 테지-
“아주, 좋아. 이대로 계속해서 그를-”
그리고, 그 때였다.
“...계속해서, 그 다음에는 무엇인가요? 무척이나 흥미로운 혼잣말이네요. 저하, 부디 제게 저하께서 그 다음에 무슨 말을 하시려고 했었는지 그 뒷내용을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터벅-
기척이라고는 일절 느껴지지 않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아이리스의 귓가에 실로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말았다. 왜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였냐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아이리스가 대충 세상에서 두 번째 정도로 싫어하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아리엘 티에르?”
통로 저편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한 저 여자의 얼굴을 보며 아이리스의 미간이 살포시 구겨지고 말았다. 방금 전 그와 함께 했던 추억을 곱씹으며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던 바로 이 순간, 저 여자가 자신 앞에 저 뻔뻔스런 얼굴을 드리움으로 속이 뒤집히고 말았기에 얼굴이 구겨지게 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저, 저 여자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일 뿐.
“...네가 어떻게 황궁에 있는 것이지. 너는 분명, 비앙카 델 카스타나와 함께 에스텔 공작령에 남기로 했던 것이 아니었나?”
아이리스의 질문에 아리엘은 실로 재미있다는 듯 쿡 하고 웃음을 짓는다.
“뭐, 그야 저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라는 여자는 황녀 저하의 말씀을 순순히 들어먹을 정도로 제대로 되먹은 여자가 아니라서 말이죠. 특히, 제국민이 아니라 그런지 저하에 대한 충성심도 없고 말이죠. 제가 하늘 아래 모시는 분은 오직 여신 한 분 뿐이니 말입니다.”
실로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기휘(忌諱)를 범하는 아리엘이었지만 아이리스의 얼굴에는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다. 애당초 세간에서는 성녀라 불리는 저 여자가 뒷구멍으로는 호박씨를 까는 계집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새삼스레 아리엘의 말에 분개할 필요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 어쩐지 에스텔 공작령에 너무 순순히 남는 기색이더니 뒷구멍으로는 이런 깜찍한 수작을 부리고 있던 것이로군. 제도까지 몰래 쫓아온 것은 그렇다 치고, 황궁에는 대체 어떻게 들어온 것이지?”
당연한 말이지만, 황궁은 동네 구멍가게와 같이 개나 소나 아무렇지도 않게 들락날락 거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황족을 제한 그 어떠한 이일지라도 황궁에 출입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허가를 따로 맡아야만 한다. 아리엘 정도의 여인이 황궁에 들어오고자 했으면 황녀인 자신의 귀에 그 소식이 한 번쯤은 들려왔을 터. 하지만 아리엘과 관련된 소식은 지금까지 일언반구도 전해 듣지 못했단 말이다.
“저하. 이건 제국의 안위를 위해서 올리는 말씀입니다만, 황궁의 경비를 조금 더 신경 쓰시는 편이 좋을 듯 하네요. 비앙카 그 아가씨가 간단한 마법을 사용하니 정문으로 당당하게 출입을 하는데도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했으니까 말이에요. 비앙카 아가씨가 대마법사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조금 심한 것이 아닌가요?”
흡사 조롱이라도 하듯 즐거이 말을 하는 아리엘을 향해 아이리스는 혀를 차고 말았다. 하여간, 저 고약한 말뽄새 하고는.
“...허, 황궁의 경비와 결계는 비앙카 그 여자 같은 초월자의 움직임까지 방비해낼 정도는 상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주제에 잘도 조잘거리는구나. 그대가 되먹지 못한 여자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만 방금 전의 그것은 참으로 뻔뻔스러운 발언이 아닐 수 없군.”
“뭐, 제 인간 됨됨이가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차후 찬찬히 토론을 했으면 하는군요. 그것보다는, 저하와 긴히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이리 황궁에 숨어들은 것이니 말입니다.”
“...이야기? 그게 무엇이지?”
아이리스는 저 독사 같은 여자와 그리 말을 섞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만, 아리엘은 그녀의 기분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녀를 향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선다.
“저하께서도 잘 알다시피, 사람에게는 귀라는 것이 달려 있는 지라 설사 듣기 싫더라도 귀에 들려오는 소식이 존재하더군요. 특히 제도에 도착한 이후, 도저히 그 출처를 짐작할 수 없는 괴소문이 자꾸만 제 귀를 간지럽히는 바람에 잠을 자지 못할 지경이었답니다.”
그리 말을 하며 싱긋하고 웃음을 짓는 아리엘의 얼굴 속에는, 작지만 분명한 살기가 배어있었다.
“성직자의 본분 중 하나가 타인의 고해성사를 듣는 것인지라 헛소리를 듣는 것에는 익숙하다 생각했지만, 이번만큼은 그 헛소리를 도저히 가만히 듣고 넘길 수가 없더군요. 그따위 혹세무민을 일삼는 헛소리가 거리에 나돌아 다니는 것은 여신께서도 불쾌히 여기실 것이 틀림없을 테니 말이에요.”
“여신의 의견이 아니라 네 의견이겠지.”
하도 어이가 없던 나머지 아이리스가 지적을 하였음에도 아리엘의 표정은 한 점의 변화도 존재하지 않는다.
“저는 그 소문이, 당연히 헛소문이라 생각을 한답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요. 고작해야 검술 하나 가르쳤다고 해서, 사람을 그런 식으로 옭아매려는 정신 나간 여자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을 리가 만무한 노릇이니 말이에요.”
“...호오, 말 한 번 잘했겠다.”
가만히 있으려고 했지만 아리엘의 말투는 사람의 신경을 어딘가 거스르는 면이 존재하였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주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황녀 저하. 당신이 하는 행동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비앙카 그 아가씨보다 훨씬 질이 좋지 않아요. 비앙카 아가씨는 자기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홧김에 그런 행동을 저지른 것에 불과하지만, 저하께서는 아주 교묘한 수단을 이용해 그를 독점하려 하시는 것이지 않나요.”
아리엘의 말에, 아이리스는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틀린 말이 아니긴 한데, 그의 곁에 있는 여자 중 가장 제정신이 아닌 여자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지 않나.
“그리 걱정 말거라. 나는 관대하니, 그의 곁에 첩이 몇 명 쯤 있는 것쯤은 얼마든지 용인해줄 수 있으니까. 내 비록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는 하나, 네 태도 여하에 따라 그의 곁에 머무는 것을 허락해줄 수도 있는 노릇이 아니겠느냐? 그리고-”
“...그리고?”
“카인을 독점하고, 그 끝에 구속하려 드는 것은 바로 네가 아니더냐. 대수림에 간 김에 키리에로부터 재미난 사실을 몇 가지 들었다. 네가 무엇 때문에 그를 그토록 갈망하고, 그에게 무엇을 바라며, 무엇을 집착하고 있는지. 전부.”
“.....”
...빌어먹을, 입 한 번 가벼운 여자 같으니.
“뭐어, 그리 노심초사한 표정은 지을 필요 없다. 왜냐하면, 지금부터 네 소원은 내가 대신 들어줄 테니까 말이지.”
“...대신요?”
아이리스는 대답 대신 자신의 입꼬리를 천천히 비틀어 올린다. 마치, 잠시 후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이 너무도 기대가 되는 듯이.
“아리엘 티에르. 내가 방금 전, 카인과 무엇을 하다 왔는지 너라면 눈치 챌 수 있을 테지.”
그리 말을 하며 아이리스는 자신이 입고 있는 드레스의 밑단을 아주 살짝 들어올린다. 깔끔한 그녀의 성정과는 달리, 여기저기가 잔뜩 흐트러져 있고, 구겨져 있으며 어딘가 젖어 있는 기색이 있는 드레스.
“.....”
아리엘의 안색이 아주 살짝,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아리엘의 얼굴이 왈칵하고 일그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을, 아이리스는 아주 흡족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뭐, 그렇게 되었다네. 카인과 나는 이미, 그런 사이가 되고 말았지. 그러니, 그대가 우려할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다네. 아리엘 티에르.”
“왜냐하면 그의 아이는, 자네 대신 내가 열 달 뒤에 낳을 예정이거든. 나는 그와의 사랑의 결실이 생겨서 좋고, 그대는 두 번 배가 아플 필요가 없으니 서로에게 아주 좋은 거래가 아닌가? 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