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상실에 걸린 마녀를 주워버렸다-129화 (129/201)

(EP.129)13.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 - 03

“...눈을 감고 뒤로 돌게나. 어서.”

황녀와의 꿈과 같았던 시간이 끝이 난 후, 황녀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소리는 바로 그것이었다.

“...뒤로 돌라니, 그건 무슨...”

“카인, 아무래도 그대는 한 번 말해서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군. 역시 자네에게는 말로 설명을 하는 것보다 몸으로 직접 익히게 하는 것이 더욱 어울리는 것 같네. 그래, 내가 그대에게 ‘흐르는 별’을 익히게 하였을 때처럼 말이지.”

그리 말을 하며 황녀는 손바닥으로 나의 눈 윗부분을 찰싹하고 가격하였다. 그다지 아프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나의 마음을 쓰라리게 하는 일격임이 분명하였다.

“그대와 정사(情事)를 나누느라 간만에 입은 드레스가 이토록 흐트러지고 구겨지지 않았는가? 나는 홍등가의 계집이 아니니 이런 꼴로 다른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을 리가 만무한 노릇일 터. 옷을 좀 단정하게 하고 싶으니 뒤로 돌아있으라는 의미에서 말을 했던 것이네.”

찌릿하며 나를 향해 눈을 흘겨 오는 황녀를 가만히 보고 있자하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제가 등을 돌아야만 하는 것입니까? 어차피 지금까지-”

볼 거 안볼 거 다 본 사이인데 이제 와서 이런 것으로 부끄러워 할 사이는 아니지 않느냐, 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노골적인 살기를 뿌리는 황녀의 모습을 보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대는 참 여심에 대해 무지한 것 같군. 비앙카 델 카스타나에 대해 조금이지만 동정심이 들 정도로, 말이지.”

“.....”

여기서 비앙카의 이름은 왜 나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게나. 그러니 입 다물고 뒤로 돌아서게나. 또다시 토를 달면 다음에는 그대의 얄미운 입을 때릴 예정이니.”

“...알겠습니다.”

황녀의 말마따나 내가 여심에 대해 무지한 것은 사실이다만 그간 비앙카나 아리아와 함께 하며 여심이라는 녀석에 대해 배운 것이 없지는 않았다. 그것은 바로, 여자들이 나를 향해 저런 까칠한 목소리를 낼 때는 결코 토를 달아서는 아니 된다는 점이다. 이해가 안 간다고 해서 괜히 한 마디를 덧붙였다가는 한 마디로 끝날 이야기가 열 마디 스무 마디로 부풀어 오를 수도 있으니까.

내가 두 눈을 질끈 하고 감으며 뒤로 돌아서자, 등 뒤에서 스르륵, 하는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이렇게 등을 돌린 채 눈을 감고 있자니 저 소리가 무척이나 크게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드레스를 아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군. 가슴 쪽에 얼굴을 파묻는 바람에 프릴은 전부 흐트러졌고, 밑단은 종이처럼 구깃구깃해지고 말았어. 이거야 원, 드레스를 몸에 걸친 채 남자와 나뒹굴고 왔다고 광고를 하는 꼴이나 다름이 없군.”

찔꺽, 하고 살에 물기가 달라붙는 소리가 난다. 그제야 황녀가 나보고 어째서 뒤로 돌아 있으라고 한 것인지 이해를 해버리고 말았다.

“...하아, 특히 드레스 안쪽을 아주 가관으로 만들어 놓았군 그래. 이 꼴을 한 채로 연회장으로 돌아간다면 다음 날 어떤 말들이 오고갈지 뻔한 노릇이겠군. 아마, 내일쯤이면 제도 전체에 제국의 차기 후계자가 열 달 뒤쯤 태어날 예정이라는 소문이 나지 않을까 예상하는데.”

“.....”

“어쩔 수 없군. 번거롭더라도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오는 수밖에. 나는 그대와 로맨틱한 소문이 나기를 원하는 것이지 질척질척한 소문이 나도는 것은 그리 반기지 않거든. 이래 뵈어도 나는 제국의 황녀. 내가 모든 이들 앞에서 보이는 겉모습은 황실의 위엄 그 자체이니 말일세. 이리 흐트러진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보일 수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겠는가.”

쿡쿡하고 웃음을 짓는 황녀의 웃음소리가 나의 귓가에 들려온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황녀에게서 등을 돌린 채 눈을 감고 있는 나의 등 쪽에, 누군가가 꼭하고 나를 안아온다. 나의 등 쪽에, 그 정체를 너무도 알기 쉬운 풍만한 감촉이 느껴지고 말았다.

“뭐, 그리 풀죽어 있지 말게나. 자네와 함께 한 시간이 별로였다는 의미에서 한 말은 아니거든. 아니, 오히려 너무 열정적이었기에 이러한 결과가 나왔다고 해야 할까. 나로서는 꽤나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네.”

나의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오는 황녀의 나른한 목소리.

“아니요, 저 또한 반성은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첫 관계인데 저하와 이리 야외에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특별함이 뭣도 없는 조금 기품이 없는 행동이 아니었나 생각해버리고 말았거든요.”

내가 반성이라도 하듯 쓴웃음을 내지으며 그리 말을 하고 있자니, 그 말에 나의 등 뒤에 안겨 있던 황녀는 방금 전보다 더욱 나의 품 안 쪽으로 파고 들어온다. 나를 껴안고 있던 두 팔에, 한층 더 힘이 들어간다.

“...그렇지 않다네, 카인. 결코 그렇지 않아. 애당초 나는, 특별하고 고귀한 무언가 따위 바란 적도 없다네.”

“...저하...?”

나를 향해 무언가를 고백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황녀의 말에 나는 스스로의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말았다.

“방금 전, 그대가 이리 말하였지? 남녀 간의 첫 관계인만큼, 조금 더 특별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좋지 않았겠냐고. 그 말에 나 또한 동감이라네. 나 또한 여자일세. 자고로 여자들이란 꿈을 먹고 사는 생물이거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특별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세상 그 어떤 여자라 할지라도 마다하지 않을 지고의 시간임이 틀림없겠지.”

“...하지만 말일세. 나는 특별한 것도 좋지만 머리에 열이 올라 분위기에 휩쓸린 끝에 일탈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느낌의 무언가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네. 황족의 기품에 걸맞는 화려한 장식의 방 안에서, 우아하고 푹신한 침대 위에 누운 채로 서로를 마주보며 정을 나누는 것 또한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품위고 멋도 아무 것도 없이 서로 간의 사랑을 나누는 행위도 좋다고 생각한다네.”

“나의 인생에서, 이미 특별함이란 차고 넘치는 중이라네. 그러니 이번만큼은 나 또한 한 남자 앞에서만큼은 한 명의 평범한 여인이 되어 그의 곁에 머무르고 싶군. 때로는 그 이와 함께 다과를 즐기며 담소를 나누고, 때로는 그 이와 함께 산책을 거닐곤 하며, 때로는 식사를 함께 하며 그 날 있었던 이야기를 즐거이 나누는, 그런 평범한 관계 말일세.”

나를 등 뒤에서 꼭 하고 안고 있던 그녀의 팔이 내게서 떨어진다.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멍하니 서있기만 하자, 황녀는 자신의 은은한 향기만을 남긴 채 테라스의 출입문 쪽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한다. 아마, 방금 전에 했던 말대로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틀림없겠지.

“그럼, 연회장에서 다시 보도록 하지. 우리 둘이 함께 입장을 한다면 귀족들의 표정이 볼만하겠군 그래. 하지만 안 그래도 오늘은 귀족들을 모아놓고 깜짝 발표를 하기까지 했는데, 더 이상 그들에게 가십거리를 던져주기는 싫다네.”

그리 말을 하며 그대로 테라스의 문을 열고 나가려는 황녀의 뒷모습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저하께 한 가지 묻고 싶은 사실이 있는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여쭈어 봐도 괜찮을런지요.”

“얼마든지.”

“...그, 방금 전에, 저하께서 자신을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말투도 편하게 변하셨고 말입니다.”

“그래, 그러했었지.”

“그런데, 음... 어째서...”

관계를 가지자마자 그 말이 거짓말이었던 것 마냥 말투가 원래대로 돌아온 것이냐는 의문이 내포되어 있는 나의 질문에, 황녀는 피식 하고 웃음을 지어 보인다. 나의 이러한 질문이, 진심으로 우습다는 듯이.

“카인, 그대는 정말로 여심을 공부해야 할 것 같군. 그런 것을 여자의 입으로 직접 밝히게 하다니, 그대는 참으로 등신 같은 남자임이 틀림없다네.”

나를 바라보며 살짝 눈웃음을 짓던 황녀는, 이내 몸을 돌려 나에게로 다가와 나의 귓가에 대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살그머니 속삭였다.

“어떠한 여인일지라도 잠자리에서만큼은 연약하게 보이고 싶은 법이라네. 특히 그대는 나를 단 한 번도 꺾어본 적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밤만큼은 내가 그대에게 양보를 해야지.”

“내 남자라면, 낮에는 내게 지더라도 밤만큼은 나를 이겨야 하지 않겠는가?”

****

그리하여,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만을 남긴 채 황녀는 테라스 바깥으로 퇴장하였다. 오직 사방에 남아 있는 은은한 제비꽃 향기만이, 그녀가 방금 전까지 그녀가 이곳에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되어줄 따름이었다.

...마치, 한바탕 꿈을 꾼 것 같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황녀와 몸을 섞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건만,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그녀와 갈 때까지 가버리게 된 신세로서 전락해 버리게 된 것인 걸까.

“어디까지나 저의 외람된 생각이긴 하지만, 카인님께서는 너무 지조가 없으신 것 같아요. 비앙카 델 카스타나 때는 그렇다 쳐도, 이번만큼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외도(外道) 그 자체가 아닌가요?”

“...틀린 말은 아닌데, 외도라고 표현을 하는 것은 좀...”

아니지 않나, 라고 대꾸를 하려던 찰나,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경험을 하고 말았다. 이 목소리는 대체 어디서 들려오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분명 이 테라스에는 나와 황녀 말고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을 텐데?

“저 여기 있어요, 카인님.”

스르륵-

나를 향한 한 줄기 음성과 함께, 대기 그 자체의 굴절층이 흔들리며 저 편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한 인영의 모습이 나의 시야에 들어온다. 인영의 정체는, 내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어느 한 여인이었다.

“...아리아?”

황망함까지 느껴지는 나의 말에, 아리아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떻게?”

“카인님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이미 사태는 전부 벌어진 것 같지만요, 라며 약간이지만 질책 어린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아리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약간이지만 죽고 싶다는 충동이 일고 말았다. 설마 나는 지금, 아리아 앞에서 황녀와 그 짓을 하는 것을 전부 들키고 말았다는 것인가-

“어, 어디서부터?”

실로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내 질문의 저의를 잘만 알아들었는지 아리아는 막힘없이 대답을 해준다.

“별로 안됐어요. 대충 카인님께서 그 여자와 서로의 입에 혀를 집어넣을 때쯤부터 일까요.”

“.....”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직관하였다는 말이었다.

실로 말로서는 도저히 형언할 수가 없는 이 감정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말자, 아리아는 그러한 나를 보며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쉰다. 마치, 이러한 내가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기라도 하듯.

“죄송해요. 카인님께서는 방 안에 얌전히 있으라고 하셨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인님의 행방을 찾아 황궁의 이곳저곳을 살피고 돌아다녀 보았어요. 카인님의 사생활을 엿본 것은, 결코 자의가 아니었어요.”

...그야, 당연히 아리아의 자의가 아니었겠지. 애당초 야외에서 그런 짓을 한 것은 황녀와 나의 원죄임이 분명하니.

“우선 본의 아니게 개인적인 대화를 엿듣게 된 것에 대해서는 사죄를 드릴게요. 그것은 정말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었음이 분명하니 말이에요.”

그리 말을 하며 예의 바르게 고개를 꾸벅하고 숙이는 아리아. 아무리 생각해도 아리아는 너무 순하고 착해 빠진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카인님, 그것과는 별개로 카인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어요. 외람되지 않는다면 제가 카인님께 질문을 올리는 것을 허락해주실 수 있나요?”

그리 말을 하는 아리아의 두 눈 속에는 알 수 없는 기백이 깃들어 있었다. 그 기세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뭐, 뭔데?”

내가 아리아의 말에 수긍을 하자, 아리아의 영롱한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 눈동자 속에는 나를 향한 강한 원망과 질책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방금 전, 카인님께서는 황녀님을 향해 사랑한다고 속삭이셨죠. 그것은, 정말 진심이었나요? 카인님께서는 정말로 황녀님을 사랑하시나요? 그녀의 말처럼, 정말 황녀의 것이 되실 생각이신가요?”

“.....”

...이것만큼은, 아리아의 말마따나 지조 없이 여자들에게 아랫도리를 놀리고 돌아다닌 나를 향한 업보임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래, 아마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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