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8)13.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 - 02
과거, 카인과 함께 루멘티움을 방문했었을 무렵, 아리아는 카인과 함께 봄의 여신 아르벨을 섬기는 신전을 방문했던 경험이 있었다.
물론, 아리아는 카인의 손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신전을 방문하게 된 것일 뿐, 딱히 아르벨을 섬긴다거나 혹은 그녀를 향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애당초 아리아는 머릿속에 꽃밭을 기르고 있는 그런 덜떨어진 년을 여신이랍시고 섬기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하지만 카인의 손에 억지로 방문을 하게 된 여신의 신전에서, 아리아는 스스로의 가슴 속에 영원히 화인(火印)으로 남을 만한 무언가를 목격하고야 말았다.
신전의 예배당, 천장에는 천지창조부터 시작하여 여신의 자비로움과 그 은혜에 대한 일화를 표현한 실로 웅장한 성화(聖畫)가 그려져 있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장인들이 수십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혼을 담아 그려낸 천장화 속에서는, 정말로 여신의 영기(靈氣)와 신성 그 자체를 그대로 담아낸 듯한 무언가가 깃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심지어 봄의 여신을 향해 불쾌감을 느끼고 있는 아리아 또한, 그 천장화를 보며 알 수 없는 거룩함을 느끼고 말았을 정도였으니.
...그리고 지금, 아리아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 또한, 그러하였다. 모든 것은, 그녀가 그 때 느꼈던 감정과 동일하기만 할 뿐이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사방에는 어둠만이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테라스 근처에 켜져 있는 자그마한 등만이 이 주위를 밝히는 유일한 빛이 되어주고 있었을 따름이다. 자그맣고 은은한 불빛을 배경으로 하여, 어둠을 휘감은 채 뱀과 같이 엉켜 있는 한 쌍의 남녀의 모습만이 그곳에 있었을 따름이었다.
두 남녀는, 열정적이었다. 그리고 탐욕스럽기까지 하였다. 서로의 숨결을 원하는 두 개의 입술이 교차한다. 남자는 여인의 모든 것을 탐하려고 하는 것인지 비단 입술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신체 구석구석을 누볐으며, 여인은 자신을 향해 욕정을 비추는 사내가 기껍기만 한 것인지 교성을 내지르며 그의 모든 것을 얌전히 받아들이기만 하였다.
남녀의 살이 하나로 포개진다. 탄탄한 기사의 살과, 눈과 같이 새하얗고 가느다란 살이 서로 포개어지고 겹치어진 끝에 더 이상 누구의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의 욕망이 되며, 하나가 되고자 하는 그들의 모습은, 너무도 추하기 그지없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신성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래. 마치 언젠가의 그녀가 보았던, 신전의 웅장한 천장화처럼.
그들은 추하였지만, 동시에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였다. 적어도, 그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
숨이, 턱하고 막혀온다. 지금 이 순간, 아리아는 자신이 이곳에 왜 왔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부 잊어버린 채 그들의 정사(情事)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머리가, 핑하고 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만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이 지상이었다면,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지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듯한, 공허한 기분밖에 들지 않는다.
“...하, 악...!”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의 안쪽에서는 아픔 말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어쩌면 목구멍으로 아픔 그 자체를 내뱉어낸 것인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아리아는 현재 이토록 아픔을 느끼고 있기만 할 뿐이었으니까.
“...아, 아...”
...아아, 모르겠다. 정말로, 모르겠다.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지, 무엇이 추한 것인지 도저히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싫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싫기만 하였다. 도망치고 싶었다. 이곳만 아니라면, 다른 어디로든 가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는 것만 같았다. 세상의 진리 그 자체를 담고 있던 뇌수가 밖으로 줄줄 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온몸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끝에,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 것 같은 비참한 기분이 든다.
...자신은 대체, 어째서 저들의 추하고도 아름다운 저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는 것일까. 대체 왜-
“...흐읏, 하앙...!”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가, 헐떡이고 있었다. 아니, 그냥 헐떡이는 것이 아니었다. 주변을 아랑곳 하지 조차 않은 채, 기쁨에 젖어 내뱉은 끈적한 교성만이 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남녀 사이에 관계 속에서 울려 퍼지는 신음소리가, 아리아의 귀를 어지럽히고 있었단 말이다.
일생을 한 자루의 검으로서 살아왔으며, 타인 앞에서 언제나 고고한 기상만을 비추던 바로 그 여자가, 남자의 밑에 깔리니 한낱 암컷의 얼굴을 한 채로 그를 향해 쾌락을 애걸하고 있었다. 애정만을 탐하고 있었다. 사랑만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렇다.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는, 기뻐하고 있었다. 본인의 의지로 남자의 밑에 깔린 채 쾌락을 탐하고 있었으며, 그의 손에 의해 여자가 되어가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던 것이었다.
“.....!”
...그제야, 깨닫고 말았다. 저들의 모습이 추악하지만 동시에 신성하게도 보이던 이유가.
저들은 지금, 하나로 이어져 있는 상태였다. 육체의 교감을 통해 서로를 온전히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누가 시켜서, 강제로 저런 것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저들의 행위 속에서는, 오직 서로를 향한 사랑만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육체의 유한을 넘어, 서로 간의 다름을 규정하는 모든 것을 뛰어 넘어, 그저 상대방 그 자체만을 원하는 순수하기만 한 사랑.
그저 완벽한 채로 태어나버린 자신은 가질 수 없었으며 끝내 닿을 수도 없었던, 무언가.
“...우욱-!”
구역질이 치밀고 말았다. 저들의 행위가 역겹게 느껴져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직 상대방만을 위하며, 서로만을 위하고 있는 저들의 사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저들을 향해 진심으로 ‘부럽다’라고 생각해버린 자신이 너무도 비참하기 짝이 없어서 그렇다-
‘아니야.’
알고 있었다. 카인의 곁에는 이미 자신 말고도 다른 여자가 많으며, 그들 중 몇몇과는 이미 정을 통한 사이라는 사실에 대해. 모르고 싶어도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비앙카 델 카스타나라고 하는 정신이 나간 여자가, 수치심도 없는 것인지 자신은 이미 카인과 몸을 섞은 사이라는 것을 자랑스레 떠들고 다니곤 했으니까.
‘...아니야.’
...그래도, 그래도 괜찮다 생각했다. 상관없다 생각했다. 다른 어떤 여자와 정을 통하더라도,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을 각오가 되어 있다 생각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자신 또한 그와 이미 마음이 맞닿아 있노라고 자부하고 있었으니까.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을 희생하더라도 괜찮다 생각했다.
‘...아니라고.’
이스타드의 축제 날, 그녀는 느꼈다. 자신은 이토록 그를 사랑하고 있으며, 그 또한 자신에게 마음을 주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확신하였다. 이 세상이 만약 하나의 이야기라면, 이번만큼은 자신이 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그가 다른 여자를 바라본다고 할지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비앙카 델 카스타나도,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도, 아리엘 티에르도, 전부 이미 흘러간 이야기의 주역에 불과하다. 그에 비해 자신은, 그와 함께 하는 이야기를 쌓아 올려 나가는 중이다-
그러니, 이 순간만 참아내면 된다 생각했다. 자신은 이제, ‘겨울의 마녀’가 아니라 그의 전속 시녀인 ‘아리아’이다. 자신은 그런 천박한 여자들과는 다르다. 고작해야 육욕에 헐떡이며, 사랑을 애걸하지 않는다. 그저 정숙하게 그의 옆을 고수하며, 그에게 쓰임새가 있는 여자로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한다면, 언젠가는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설사 지금 이 순간은 손에 닿지 않는다 할지라도, 가슴 속에 무언가 남는 것이 있다 생각했다. 고집 세게 이 마음을 지켜간다면, 언젠가 그와 함께 웃을 수 있는 날이 찾아올 것이라 믿고 있었다.
‘...아파.’
...헌데, 아프다. 아파도 너무 아프다. 가슴이 갈갈이 찢겨나가는 듯한 통증이, 가슴을 아로 지르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오직 그녀가 내지르는 비명과 신음과 아픔만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슴이, 저린다. 모든 것이 자신의 착각이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어쩌면, 자신 혼자서만 그를 사랑했고, 그와 마음이 이어졌다는 착각을 했던 것이 아닐까. 자신은 남몰래 그에게 사랑을 애걸하는 여자를 비웃곤 하였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로 착각에만 빠져 있던 어리석인 피에로는, 사실 누구였던 것일까-
“...하.”
입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나는 이토록 아픈데, 가슴 한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린 것처럼 이토록 아픈데, 어째서 웃어버리고 만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은 바라서는 아니 될 꿈을 꾼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겨울의 마녀’. 무수히 반복된 시간 속에서, 그와 수도 없이 반목을 해온 그의 영원한 적. 동화책에 흔히 나오는, 공주님을 납치한 나쁜 마왕과 같은 존재이다.
자신이 나쁘다는 것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주제에, 자신은 여기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기억을 잃은 척하고, 순진한 척을 하며, 그의 곁에서 속죄를 추구한다 해서 무엇이 달라지기라도 한다 생각했던 것일까.
언젠가는, 그에게 모든 것을 용서 받고 떳떳하게 그의 옆에 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가. 시녀 아리아가 아닌, 한 명의 여인인 아리아로서 그의 곁에 머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가.
실로 우습다. 그런 형편 좋은 결말이, 나 같은 여자를 기다리고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보라, 이것이 바로 나 자신의 최후이며, 내가 맞이해야만 하는 정당한 결말이다.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가. 이 생애, 자신이 처음으로 마음을 준 단 한 명의 사내가 다른 여자와 뱀처럼 얽힌 채 사랑을 탐닉하고 있는 추악한 광경을 남몰래 관음하며 한없이 절망하고 좌절하는 것이야말로, 과거 이 세상을 끝없는 겨울로 내몰았던 ‘겨울의 마녀’에게 한없이 어울리는 형벌이 아니던가.
그래, 자신은 처음부터 정상적인 행복따위 바라서는 아니 되는 몸이었건만.
“...아, 으...”
지금 이 순간, 어째서 이토록 가슴이 아프기만 한 걸까. 대체, 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주먹을 너무 강하게 쥔 나머지, 손톱이 살갗을 뚫고 들어간 것이었다.
...허나 그 따위 아픔 따위, 단죄의 아픔조차 되지 못한다. 차라리 누군가가 자신의 심장을 찔러,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주었으면 했다.
그 정도로, 아리아는 아파하고 있었다. 저 밑에서는 아이리스가 행복을 느끼며 기뻐하고 있었건만, 반대로 아리아는 절망을 느끼며 아픔만을 느끼고 있었다.
아아, 그랬던 것이다. 사랑이란, 이토록 아픈 것 이었구나-
“...카인, 님...”
그의 사랑이 주위에 이토록 흘러넘치고 있건만, 어째서 자신을 향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당신은 어째서, 나를 봐주지 않는 것일까. 정말 나에게는, 어떠한 자격도 없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다른 여인을 향하는 네 사랑을 바라보며 아파야만 하는 것일까.
“...너무, 좋았어. 사랑해...”
“그래. 나도, 너를 사랑한다. 아이리스. 이것만큼은, 진심이야.”
파정(破精)을 끝낸 뒤, 서로 간에 사랑을 속삭이며 애정을 확인하는 두 남녀.
...다른 여자를 향해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카인을 눈앞에서 직접 목격하고 만 것이.
“.....”
아마, 아리아가 이성을 유지할 수 있던 마지막 한계선이었던 것 같다.
확실히, 느꼈다.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어떠한 선을 넘겨버렸다는 것을. 마음 속에 있던 어떠한 끈이, 뚝 하고 끊어지고 말았다는 것을.
딸깍-
설사 세상이 무너진다고 할지라도 연락할 일이 없다고 여기던 여자를 향해.
- ...뭐야, 설마 아리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네가 나한테 먼저 연락을 다하고.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먼저 도움을 요청하고 말았으니까.
“...그 입 다물고, 빨리 그 여자랑 황궁 쪽으로 들어오기나 해.”
빈정거리는 듯한 비앙카의 목소리를 한 쪽 귀로 흘려 넘기며, 아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통신용 마도구를 으스러지도록 꽉 하고 붙잡는다.
“너희들의 힘이, 필요한 일이 생기고 말았으니까.”
가슴이 아프기는 하다만, 이대로 병신 같이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만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만은 아니었다.
남아 있는 밤은 길기만 하였고.
“카인님과, 관련된 일이야.”
세상에 일어나는 대다수의 일은, 정말 유감스럽게도 힘으로서 해결이 가능하니까.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