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4화 〉12. 흐르는 별 - 15 (124/201)



〈 124화 〉12. 흐르는 별 - 15

“...그럼, 나는 연회장에 먼저 가 있겠네. 부디 그대는 천천히 뒤따라오도록 하게나.”

그러한 말을 남기며 아이리스는 카인의 방에서 걸어 나왔다. 천천히 방문을 닫고, 느긋한 태도를 유지한 채로 연회장을 향해 걸음을 옮겨가는 그녀에게서는 승리자로서의 여유로운 자태만이 느껴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대세는 이미 결정이 났으며, 모든 것은 이미 판가름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목적으로 써먹기 위해 그에게 ‘흐르는 별’을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이토록 확연한 명분을 가져다주는 무기를 활용하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단 말이다.

카인이 스스로가 미래에서 회귀를 한 회귀자이며 ‘흐르는 별’ 또한 미래의 아이리스에게서 얻어 배운 것이라 밝히지 않는 이상 현 상황을 빠져나갈 구멍은 쉽사리 찾아내지 못할 것이리라. 애당초,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믿어주기 것보다는 에스텔 소공작이 혼인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정신이 살짝 나간 것이라 생각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지만.

또각. 또각.

느긋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또각또각 힐을 밟으며 연회장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던 아이리스의 두 눈에, 마치 아이리스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마냥 저만치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벽에 등을 기댄 채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는 어느 여인의 모습이 들어오고 말았다.

아리아였다.

“...아이리스. 이게 당신이 말했던  번째 이유였던 것인가?”

다짜고짜 화부터 낼 줄 알았건만, 예상 외로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는 아리아의 차분한 목소리에 아이리스는 자신의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리고 말았다. 과연 아리아는, 정말로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차분한 척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감정은 지금, 대체 어느 쪽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

“이런, 아리아. 저번에 내가 던졌던 충고를 그새 잊어버린 것인가. 내가 분명히 충고하였을 텐데. 그대가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만, 나를 향한 일정 선만은 넘기지 말라고. 이 제국에서 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폐하와 카인, 오직  사람 뿐이라네. 아리아 그대는 내가 그대의 무례를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란 말인가?”

아이리스의 도발이 섞인 말에도 아리아는 결코 흔들림이 없는 모습을 유지할 뿐이었다. 마치, 자신은 그 따위 싸구려 도발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고 외치고 있는 것 마냥.

“그래, 아이리스. 얼마 전, 당신이 내게 그런 협박을 했었지. 카인님과 내가 함께 하고 싶다면, 인간 세상의 법도를 따라야만 한다고. 왜냐하면 내가 모시고자 하는 그 분이 세상의 법도 그 한 가운데에 위치한 분이니, 한 때의 ‘마녀’가 아니라 시녀인 아리아로서 지내고자 한다면 법칙에 순응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하지만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꼭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더라고. 아이리스.”

“...뭐?”

아리아의 당돌한 말에, 아이리스의 눈썹이 꿈틀거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나는 카인님의 눈치를 보는 것이지, 고작해야 너나 제국 따위의 눈치를 보는 것은 아니잖아? 다시 말하자면, 카인님께서 내 주위에 계시지 않는다면 그 때는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겠어? 그것도 아니라면 카인님께 무언가를 나불거릴지도 모르는 가벼운 입의 소유자를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방법도 있고.”

“...정론이로군.”

아리아의 신랄한 의견에 아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확실히, 아리아의 말이 옳았다. ‘겨울의 마녀’와 같이 강대한 힘을 가진 자쯤에게는 인세의 법도를 적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애당초, 법도라는 것은 법의 테두리 내에서 보호 받기를 원하는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룰이다. 카인이라는 남자만 아니었다면 인세에 어떠한 관심도 없는 아리아를 법도로서 옭아매는 것은 역시 불가능한 노릇이었나 보다.

“그보다 내 질문에 대답부터 했으면 하는데. 방금 전, 카인님께 늘어놓았던 헛소리가 바로 당신이 말했던 세 번째 이유였던 것인가?”

...어쩐지, 카인이 잠시 나가 있으라고 했다지만 지나칠 정도로 순순히 나가더니 바깥에서 대화를 전부 엿듣고 있었나보다.

“그래. 그것이 바로  번째 이유라네. 카인과 나는 조만간 서로가 서로만을 바라보겠노라고 하는 일생에 단 한 번 뿐인 신성한 약속을 맺게  예정이라네. 자고로 아내가 되어 남편이 거하고 있는 방에 아무런 기척도 없이 들어온다고 한들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조만간 우리는 그보다 더욱 남사스러운 광경도 수없이 공유해야할 터인데 말이지.”

예를 들어 서로의 나신이라던가, 라며 쓸데없는 뒷말을 덧붙이는 아이리스를 향해 결국 아리아는 스스로의 입술을 잘근하고 씹고 말았다. 저 여자 앞에서만큼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건만, 아이리스의 헛소리를 들은 순간 아주 조금이지만 평정심이 깨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당신, 처음부터 그럴 작정으로 카인님께 ‘흐르는 별’을 가르친 것이었어? 겉으로는 검을 가르친 스승이니 뭐니 떠들어대더니, 결국에는 카인님을 옭아매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건가?”

아리아의 말에, 아이리스는 조용히 고개를 좌우로 내젓는다.

“아니, 그것만큼은 사실이 아니라네. 그저, 현재의 내가 취할 수 있는 수단 중 그것이 가장 효과적이었기에  방법을 택한 것일 뿐. 또한, 그를 정치적으로 옭아매는 것보다는 사승(師承) 관계 속에서 서로 간의 애정이 싹텄다고 하는 편이 더욱 좋은 그림이 아니겠는가?”

그리 말을 하는 아이리스의 웃음은 해맑기 그지없다. 자신이 택한 방법이야말로, 그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 마냥.

“...아이리스, 네 말은 아주 그럴  하긴 한데, 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을 깜빡하고 있어.”

“호오, 그게 무엇이지?”

“카인님의 의지. 그 분의, 자유 의지.”

그 말과 함께 아리아는 아이리스를 향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선다.

“방금 전 네가 지껄였던 말에는 오직 네 의견만이 포함되어 있을 뿐, 카인님의 의지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단 말이지. 네가 진정으로 그 분을 사랑하고 있다면, 어째서 그 분의 의지를 이렇게 일방적으로 묵살할 수 있지? 그것이 네가 말하는 사랑이라는 녀석이란 말인가?”

아리아의 질문에 아이리스는 실로 재미있다는 듯 스스로의 눈을 치켜뜬다.

“아리아, 그대의 말에는 다소 어폐가 있는 것 같군.”

황녀의 입가에 걸쳐져 있는 미소가 요요하게 빛난다.

“나는 그의 의지를 구속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네. 오히려, 그를 보호하려고 하기에 이리 행동을 하는 것이지.”

“...보호?”

순간, 아리아는 자신의 귀가 고장이 난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고 말았다. 보호라고? 이것이?

“그래, 보호. 이러한 방법이 아니라면, 나는 그를 행복하게   방법을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다네. 아리아, 그대도 알다시피 카인은 하나의 촛불과도 같은 남자이지. 타인을 위해 스스로를 모조리 불태운 끝에, 언젠가는 스스로의 심지조차 태워버릴 지도 모르는 그런 남자란 말일세.”

“헌데, 이대로 그를 가만히 놔둔다면 그는 결코 행복해지지 않겠지. 나는 그에게 세상의 모든 기쁨을 가르칠 것이다. 어느 누구보다 환하게 웃는 방법을 가르칠 것이다. 그가 자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우선, 그에게 매달려 사랑을 구걸하기만 한 끝에 그를 지치게 만드는 몇몇 계집들을 떼놓은 다음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것이, 카인님의 의지를 구속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거고?”

“말했지 않은가. 나는 그를 구속할 생각이 없다고. 나는 그에게 자유만을 부여할 것이라네. 내 곁에 있는 한 그는 그 어떠한 것이라도 할 수 있으며, 어디로든 갈 수 있지. 그에게 매달리는 다른 계집들 또한 그의 곁에 체류하더라도 전혀 상관하지 않을 예정이라네. 물론, 나를 가장 우선적으로 사랑해줘야 한다는 소소한 조건이 붙기는 하지만.”

아이리스의 말에, 아리아는 헛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이것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아이리스, 저 여자는 돌아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래도 네게는 키리에를 욕할 자격이 없는 것 같구나. 넌, 미쳤어. 그것도 아주 냉정하게 미쳤어.”

그 말에 아이리스는 그저 피식하고 웃기만 할 따름이었다.

“무얼. 세상을 통째로 얼린 전적이 있는 주제에 그의 곁에 뻔뻔스레 붙어 있는 어떤 여자보다는 훨씬 정상적인 사고방식이지 않은가?”


****


황궁의 중심, 그 한 가운데에 위치한 넓직한 연회장.

현재 이곳에서는 제국의 조만간 있을 이유 모를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 황제가 손수 개최한 연회가 열리고 있는 중이었다.

 쪽에서는 황실 소속의 악사들이 아리따운 선율을 연주하고 있었으며, 다른 한 쪽에는 겉으로 보기에도 화려한 음식들이 잔뜩 올려져 있는 테이블이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연회장의 북쪽, 상석(上席)에는 눈과 같이 새하얀 드레스를 걸치고 있는 한 명의 아리따운 여인이 자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 오늘  연회장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을 지닌 인물이자 동시에 이 연회의 주인공 격 되는 여인이었다.

그런데 연회장 전체에 악상(樂想)이 흘러넘치며 선남선녀들이 저마다 짝을 지어 춤을 추고 있던  가운데에서도, 황녀는 그저 심드렁한 태도를 유지한 채로 자리에 앉아있기만 할 뿐이었다. 마치, 연회 그 자체에 일말의 흥미조차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처럼.

본디 연회와 같은 공식 행사에서는 그 행사에 참여한 이들 중 가장 고귀한 이가 앞장서서 분위기를 이끄는 것이 관례였건만, 황녀는 자신의 그러한 의무를 망각하기라도 한 것인지 연회장   구석을 바라보고 있기만  뿐이었다.

그녀의 그러한 태도에, 연회에 참석한 귀족 자제들의 시선이 빠르게 교차하고 말았다. 상대는 제국의황녀. 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피를 이어받은 여인이자 동시에 제국 제일의 미녀라며 칭송받는 이다. 비록 조만간 혼인을 할지도 모르는 여인이긴 하지만, 그쯤 되는 절세미녀와 춤을 출 기회는 앞으로 살면서 결코 흔히 오지는 않을 터.

또한, 현 황제가 붕어한 이후 제관을 물려받기로 예정된 이의 눈에 들어서 결코 손해  것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는 남는 장사임이 틀림없었단 말이다.

결국, 아이리스의 아리따운 외모에 젊은 혈기를 참지 못한 한 잘생긴 청년이 그녀를 향해 다가가더니 이내 그녀의 앞에서 예를 갖추어 무릎을 꿇기에 이르렀다.

“저하, 저는 리카르도 가(家)의 적자, 알버트라고 합니다. 제게 제국의 달과 어울릴 영광을 하사해주실 수 있겠사옵니까?”

청년의 발언에 줄곧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이리스의 눈에 이채가 띠고 말았다.

“...호, 동부의 사자라고 불리는 리카르도 자작가 말인가. 선대 리카르도 자작과는 안면을 텄었지만, 그 후계자를 만나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로군.”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자신 앞에 있는 청년이 누구인지 깨닫자마자, 그녀의 눈에 깃들었던 이채는 다시금 종적을감추고 말았다. 아이리스는 카인 이외의 다른 남자에게 별다른 관심을 쏟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나의 반려를 제외한 다른 이와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이 없다네. 그러니, 그대의 제안은 듣지 못한 것으로 하겠네. 이만 물러나도록 하게나.”

눈 하나 까닥하지 않은채, 아이리스는 청년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그 어떠한 반론도 허락하지 않겠다고 하는 단호한 태도에, 주변의 시선이 자신에게 날아와 꽂히는 것을 느끼며 청년은 그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저, 저하.”

하지만 청년은 이대로 순순히 아이리스의 앞에서 물러날 수가없었다. 이미 연회장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단 말이다. 그런 상태에서 청년이 정말로 황녀의 말을 따라 순순히 뒤로 물러난다면 자신은 차후 친우들 사이에서 단순한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게 되고 마리라.

결정적으로, 가까이에서 바라본 아이리스의 자태는 실로 아름답기만 할 뿐이었다. 과연, 제국 제일의 미녀라더니 그 명성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이 정도의 미녀와 함께 연회장을 거닐며 춤을 춘다는 생각을 하니 심장의 한 가운데에 무수한 정욕이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결국 청년은, 어디선가 느껴지는 불안감을 애써 억누른 채로 다시금 용기를 그러모아 황녀를 향해 입을 열고 말았다.

“...하지만 저하, 고작해야 연회장에서 춤을  번 추는 일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이 연회장에서 저하의 파트너가 되어 춤을 출 자격은, 소공작님 뿐만이 아니라 제게도 있다고 봅니다만.”

청년의 말은 딱히 틀린 말이라고는 할  없었다.  작위를 막론하고, 연회에 참석한 모든 남성들은 연회장 내부에 있는 모든 여인들에게 춤을 신청할 권리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불행히도, 청년의 그러한 말이 아이리스의 귓가에 매우 거슬리게만 들렸을 뿐.

“고작해야...?”

아주 작고, 어딘가 나른하게까지 들리는 듯한 목소리.

다음 순간 아이리스는 방금 전과는 명백히 다른 눈빛으로 청년을 내려다보았으며-

“힉...!”

그녀의 두 눈과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다리의 힘이 풀린 나머지 바닥에 꼴사납게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묻겠다. 대체 무엇을 근거로 하여, 내가 그대와 몸이 맞닿는 일을 ‘고작’이라 치부할 것이라 생각했던가. 그대는, 나에게 이미 미래를 약속한 반려가 있다는 것을 정녕 알지 못했단 말인가?”

“...커, 허...”

청년은 아이리스의 말에 대답을 하려 했지만, 도무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숨이,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가 않았다. 마치 목구멍의 한 가운데에 무언가가 턱하고 걸려,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듯한 끔찍한 기분이었다.

그제야 깨닫고 말았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저 여인은, 단순한 미인이 아니라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경지에 오른 절세의 무인이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마침  되었군. 현재 연회장에는 제국 내의 많은 귀족들이 모여 있는 중이니, 굳이 번거롭게 나중에 한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연회장에 모여 있는 수많은 귀족들이 바람잡이를 자처하며 자신의 언행을 널리 퍼뜨려줄 테니까.

짝-!

아이리스가 자신의 양손바닥을 가볍게 마주쳤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울려 퍼진 소리는 매우 작았지만, 신기하게도 연회장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소리를 인지하고 자신도 모르게 아이리스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리고 아이리스와 그녀 앞에 주저앉아 있는 한 청년의 모습이 그들의 눈에 들어온 순간, 이 연회장 안에는 싸늘한 적막만이 가득차고 말았다. 제국의 황녀 앞에서 황망한 얼굴을 한 채로 주저앉아 있는 청년의 모습이라니. 방금 전 저들의 사이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 것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고 관여하기는 더더욱 싫을 뿐이었다.

“.....”

“.....”

연회장 내부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집중되는 것을 느끼며, 아이리스는 이곳에 모여 있는 좌중들을 향해 한 차례 싸늘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물어보도록 하지. 그대들 또한 귀가 있다면, 나에게는 평생을 바쳐 함께하기로 한 반려자가 존재한다는 소식을 한 번 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라 믿고 있네. 만약 들어보지 못했다면 실로 섭섭한 노릇이 아닐 수 없군.  소문을 널리 퍼트리기 위해 제국의 정보부가 정말 많은 수고를 하였거든. 그들이 밤낮없이 뛰어다니며 열심히 퍼뜨렸던 소문이 제국의 요직에 앉아 있는 귀족들의 귓가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정보부의 일원들이 어찌나 가슴이 아프겠는가. 그대들 또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

그녀에게 돌아오는 대답 따위는 없었다. 애당초, 아이리스 또한 이들의 대답을 바라고 물었던 질문은 아니었다.

“정보부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내 몸소 그대들의 앞에서 고하도록 하지. 나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는, 이미 어떤 사내의 소유가  몸이라네. 나는 그와 모든 것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 시점부터,  가지 맹세를 하였지. 이 몸이 스러지는 그 순간까지 나는 다른 남자와 접촉을 하지도, 말을 섞지도, 눈을 마주하지도 않기로. 이 삶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오직 그만을 사랑하고, 그 하나만을 바라보기로 약속하였다네. 왜냐하면 나는 그의 것이며, 그는 나의 것이 되고 말았으니까.”

터벅-

아이리스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청년을 향해 다시금 한 발짝 다가간다. 청년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전부 빠져나간 끝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는 상태였다. 그런 청년을 향해, 아이리스는 입가를 살짝 들어 올리며 그의 귓가에 이리속삭였다.

“즉, 내 옆자리는 자네 따위가 함부로 넘보아서는 아니 될 자리라는 말일세. 오늘 이 자리에서는 경고로 그치겠지만 한  만 더 주제를 넘어선다면  때는-”

“...데브하르트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도록 하지. 네 그 더러운 혀를 베어버리고,  두 눈을 뽑아버리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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