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12. 흐르는 별 - 13
태양의 홀.
황궁에 존재하는 모든 대소신료들이 황제와 함께 정무(政務)를 처리하는 공간이자, 제국의 지배자로서 군림하는 황제의 위엄 그 자체를 상징하는 곳.
...그리고 회귀 전, 황제가 나로 하여금 ‘겨울 원정대’의 길잡이 역할을 강제로 종용하는 것과 동시에 억지로 갖은 책임을 떠맡기기도 하였던 악몽과도 같은 장소.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아버지와 함께 황제와 대면을 했던 당시에도 이 장소를 방문했던 이력이 있었지만, 그 때와 현재의 내가 처한 상황은 실로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때는 주위에 지켜보는 눈이 존재하지 않는 개인적인 면담인 수준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황제가 한창 조정의 신료들과 정사(政事)에 대해 논의하던 와중에 황녀와 함께 이곳에 들이닥친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제국의 태양을 뵙사옵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주변에서 나와 황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아주 뜨겁게 느껴지기만 할 뿐이었다. 태양의 홀에 모여 있는 모든 관료들은 자신들의 눈동자 안에 호기심만을 담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대체 얼마나 중대한 용건이기에 황제가 한창 제국의 정사를 돌보는 와중에 난입하여 독대를 신청한 것일까? 라는 의문이 저들의 얼굴에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는 중이었던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환장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체 황제는 어떠한 이유로 말미암아 주위에 무수한 ‘관객’들을 모아놓고 나와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한 것일까. 내가 황녀의 국서 후보로 간택되었다는 이야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흐르는 별’과 관련된 이야기가 불특정 다수에게 퍼져나간다면 결코 좋은 일은 없을 텐데.
황제는 대체, 무슨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감이 잡히지 않을 따름이다.
“흠, 에스텔 소공작. 꽤나 오랜만에 보는군. 그래, 건국절 연회 이후 이리 다시 마주하는 것이니 대충 1년 만에 얼굴을 보는 것 같군. 그렇지 않은가?”
“...저 또한 폐하의 존안은 다시금 뵙게 되어 실로 영광이라는 생각뿐이옵니다.”
“그런가? 짐의 눈에는 꼭 오지 못할 자리에 억지로 끌려온 사람처럼 보일 뿐인데?”
“.....”
정말 귀신같은 눈치를 가지고 있는 영감이 아닐 수 없었다.
“허허, 짐 나름대로의 소소한 농이었다네. 그러니 얼굴을 그리 딱딱하게 굳히지 말게나. 그대가 그리하면 마치 짐이 자네를 핍박하는 것 같지 않은가.”
고작 말한 마디로 상황의 주도권을 가져간 황제는 현재 자신이 우위에 서 있다는 확신이 든 것인지 느긋한 어조로 입을 열어가기 시작하였다.
“짐이 자네와 만남을 가져야겠다는 결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네. 짐이 앉아 있는 자리가 자리이다 보니 굳이 원하지 않아도 귀에 들어오는 소식이 있기 마련이라네. 그래, 예를 들어 지난 1년간 자네가 행해온 용감무쌍한 활약상과 같은 일, 말이지.”
짐을 너무 섭섭하게 여기지는 말게나. 에스텔 소공작, 그대에게는 그 어떠한 개인적 감정도 없지만 고지식한 딸의 단 한 번 뿐인 부탁이니 들어주는 수밖에.
“그 중에서도 짐의 귀를 사로잡은 소식은 따로 있었다네. 에스텔 소공작이 휘두르는 검술이, 짐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어떠한 검술과 굉장히 유사한 형태를 띠고있다는, 아주 흥미로운 소식 말일세.”
“.....”
순간, 나를 바라보는 황제의 두 눈에서 기광이 번뜩이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황제가 무언가 작정을 했다는 사실을.
“번거롭게 짐의 입으로 언급을 하지는 않겠지만, 황실에는 황족들만이 익힐 수 있는 검술이 은밀히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쯤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한 번쯤은 들어본 사실일 터. 특히 에스텔 소공작, 그대는 그러한 사실에 대해 더욱 잘 알고 있을 것 같군. 왜냐하면, 그대는 그 검술을 직접 익힌 장본인이니 말일세.”
황제의 말은 아주 구구절절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마치, 제반사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곳의 수많은 ‘관객’들을 향해 모든 사실을 친절히 설명해주고 있는 것 마냥.
“물론, 짐은 에스텔 소공작 자네를 탓할 생각이 별로 없다네. 검술이 아무리 값진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제 아무리 유구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필경은 검술. 검술이란 사람의 손에서 빛나지 않는 이상 아무런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는 기예(技藝)로 전락하게 되기 마련이지. 짐은 이 자리에서 자네를 추궁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네. 그저, 해명을 바랄 뿐이지.”
“...해명,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제국의 역사 속에서 자네와 같이 황실의 검술을 익힌 자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자신의 검을 황실을 수호하려는 목적 이외에는 결코 휘두르지 않았었지. 짐 또한 황실의 오래된 맹우(盟友)이자 충신인 에스텔 공작가를 고작 이런 일로 불러 세우고 싶지는 않았네만 그렇다고 해서 자네 혼자만을 예외 사항으로 두고 일을 처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네. 짐은 제국의 황제. 누구 하나만을 편애한 끝에 후대에 안 좋은 선례를 남겼다는 불명예를 뒤집어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리 말을 하며 황제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한 차례 내리 쉬었다. 내 입장에서 보기에는 아주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짐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소공작 그대가 어떠한 연원으로 검술을 익히게 되었는지 이 자리의 모두에게 설명을 해주는 것이라네. 그대에게는 분명 검술을 가르쳐준 ‘스승’이 존재할 터. 그에 얽힌 제반 사정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만 해준다면, 짐은 이 일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을 것이라 이름을 걸고 약속하도록 하겠네.”
"...허."
황제의 말을 전부 듣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황제가 대소 관료들을 전부 모아놓은 상태에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한 것인지. 그리고 황제와 내가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째서 황녀가 나와 함께 어전(御前)에 나아가기를 원했던 것인지. 그리고 이러한 무대를 설계한 진정한 흑막이 누구인지까지, 전부 다.
...아이리스. 당신은 계획한 일이라 하기에는 너무 깜찍한 일이 아닌가. 내가 아는 당신은, 이런 책략을 즐겨 쓰는 여자가 아니었는데.
처음부터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자리는 나의 해명을 듣기 위한 장소가 아니었으며, 청문을 위한 장소는 더더욱 아니었다. 애당초 황제와 아이리스가 나를 이곳에 불러 세웠던 이유는 바로-
“...폐하, 죄송하지만 지금부터는 에스텔 소공작 대신 제가 폐하께 답을 올려도 괜찮겠사옵니까?”
그 때였다. 지금까지 소리 없이 황제를 향해 머리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쳐든 것이.
“아이리스. 네가 함부로 나설 자리가 아니리라. 이 자리는 에스텔 소공작을 위한 시간, 공과 사는 엄격히 구분 하였으면 좋겠구나.”
방금 전 공과 사를 구분하라고 한 주제에 은근슬쩍 ‘아이리스’라며 황녀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부르는 황제.
“그렇지 않사옵니다. 폐하. 제게는 이 대화에 끼어들 자격이 충분하지 않을까 합니다. 아마, 카인 또한 저와 마찬가지인 생각일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그에 질세라 이 자리에서 나를 ‘소공작’이라 칭하는 것이 아니라 ‘카인’이라며 이름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황녀.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은 우스웠다. 마치 한 편의 잘 짜여진 연극을 보는 것만 같았기에.
...이건 조금, 아니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아이리스.
하긴, 노골적인 대신 효과는 아주 확실하다. 무엇보다 관객들은 이 제국의 요직에 앉아 있는 모든 대소신료이다. 나를 확실하게 옭아매기에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안은 존재하지가 않겠지.
“왜냐하면 제가 바로 카인에게 검을 가르쳐 준 스승이며, 동시에 카인은 저의 낭군과도 같은 사내이기 때문입니다. 자고로 부부는 일심동체와 같다고 하였으니, 제가 어찌 이러한 사태를 가만히 눈을 감고 넘길 수가 있겠사옵니까?”
...그랬다. 처음부터 황제의 목적은 나를 추궁하는 것 따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모든 관객들을 모아놓은 채로, 황녀로 하여금 저런 폭탄 발언을 터트리도록 무대를 마련하였던 것에 불과했다. 나는 보기 좋게 낚였던 것이고.
무엇보다 웃기는 점은, 내게는 딱히 황녀의 발언에 반박할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앞으로 몇 년 뒤, 끝나지 않는 겨울을 불러온 ‘겨울의 마녀’를 토벌하기 위한 원정길에 올랐을 당시 황녀가 내게 ‘흐르는 별’을 가르쳐 주었다는 정신 나간 헛소리보다는, 황녀와 내가 서로 눈과 배가 맞은 끝에 그녀가 내게 검술을 가르쳤다고 하는 쪽이 더욱 신빙성이 있는 소리였으니까.
“.....”
“.....”
태양의 홀 내부는 순식간에 적막으로 가득 차고 말았다. 이 공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시선이 나와 황녀에게로 집중되고 있었다.
어전 앞에서 한 눈을 파는 것은 극히 무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시선을 살짝 돌려 나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황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러니, 카인을 굳이 추궁하시지 않아도 될 성 싶사옵니다. 왜냐하면 카인은 조만간 제국의 국서가 될 남자이며, 저와 이미 많은 것을 나눈 사내이기 때문입니다. 그깟 검술은 저희가 함께 나눈 것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니, 문제로 삼을 거리조차 되지 않는다는 생각뿐입니다.”
아이리스의 왠지 모르게 들뜬 목소리만이, 태양의 홀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카인의 추측대로, 그녀는 정말 살짝 흥분해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렇다. 카인과 나는 이미, 많은 것을 함께 나누었다. 나는 그와 검술을 나누었으며, 서로의 옆자리를 나누었고, 서로 간의 애정을 함께 하였으며, 그 끝에 서로가 서로의 영원이 되어주기로 맹세를 나눈 몸이다. 그와 나는 이미,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부족하다. 그의 옆에는 계집이 많다. 많아도, 너무도 많다.
사실, 그의 곁에 도둑 고양이가 몇 마리 있는 것쯤은 상관하지 않는다. 그도 건장한 사내이니, 계집을 보며 눈이 돌아가는 것쯤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일 테니까.
그와 처음 사랑을 나누지 못했지만 그것도 괜찮다. 비앙카 델 카스타나가 그와 가장 먼저 사랑을 나누었다며 으스대는 것 따위, 실로 가소롭기만 할 따름이다. 하기야,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애정도 없이 자라난 계집 따위가 대체 무엇을 알겠는가. 남한테 사랑을 주는 것도, 사랑을 받는 것도 서툰 계집이니 자랑할 거리가 육체적 관계밖에 없겠지.
비앙카 델 카스타나, 아리엘 티에르. 키리에 엘 데나리스. 너희는 알고 있는가. 내가 그와 함께한 그 시간들에 대해, 너희는 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가.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왔을 당시, 내가 느끼던 그 먹먹함을.
그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을 무렵, 내가 느껴야만 했던 그 무력함을.
그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어야 했을 당시, 내가 느낀 그 비참함을.
너희는, 그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하지 않는가.
그러니 너희는 안 되는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와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한 끝에, 그로부터 진심어린 고백을 받은 몸이니까.
그러니 육체적 관계 따위, 누구와 먼저 맺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가 주위에 어떠한 계집을 거느리든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다.
...허나, 그는 나를 가장 우선시해줘야만 한다. 모든 여인들이 모여 있다면 가장 먼저 나를 바라봐야만 하며, 나를 향해 가장 먼저 웃음을 지어줘야만 한다. 그리고 나를 향해, 가장 많이 사랑해줘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눈꽃이 흩날리던 그 날, 네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던 바로 그 날, 너와 함께 나누었던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가게 될 지도 모르는 노릇이니.
미안하다, 카인. 나라는 여자는, 네 사랑을 독차지할 방법이 이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는 한심한 여자였을 따름이다.
“...저는.”
그 때였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카인의 입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 것이.
“저 또한, 저하를.”
심장이 크게두근거린다. 아아,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네가 나와의 관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금 이 순간을, 내가 어찌나 기다렸던가.
“사랑합니다. 아니, 지금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저는 저하를, 아니 아이리스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자포자기한 듯 쓴웃음을 지어보이며 황제를 향해 그러한 말을 늘어놓는 카인을 바라보며, 나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 없이 웃음을 높이고 말았다.
그래, 드디어 이겼다. 나는 모든 계집을 제치고, 가장 먼저 승리를 쟁취하고 말았다. 이것으로서, 나는 너의 우선이 되고 만 것이다-
아아, 카인. 내 방법이 그릇되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나를 치사하다 생각해도 좋다. 교활한 여자라 생각해도 좋다. 나는 그저, 너라는 남자의 곁에 나라는 여자가 가장 우선시되기를 바라였을 뿐이니.
...하지만, 부디 이것만은 알아주었으면 한다.
너를 향한 나의 사랑에 보수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내게 있어 보수는, 너와 함께 했던 지난 날로 충분한 노릇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