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12. 흐르는 별 - 12
황궁 내부의 구중심처. 그 중에서도 궁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황제로부터 ‘귀빈’이라고 인정을 받은 이들만이 머무를 수 있는 어느 크고 화려하며 호사스럽기 짝이 없는 커다란 방.
제국의 유일한 황녀,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가 ‘그 누구보다 극진히 대접해야 할 귀빈’이라고 사방천지에 공공연하게 천명한 탓에 1년 전과는 사뭇 다른 의미로서 화제의 중심이 되어버린 에스텔 소공작과 그의 전속 시녀인 아리아가 머무르고 있는 방이기도 하였다.
이 방의 현재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에스텔 소공작도 그렇고, 그가 유일하게 대동한 사용인인 전속 시녀 아리아도 그렇고, 그렇게까지 수더분한 인간상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보니 그들이 머물고 있는 이 방 안은 언제나 고요하고 한적한 분위기를 유지하고는 했지만, 오늘따라 이 방에서는 왠지 모르게 시끌벅적한 기운이 맴돌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야, 무리도 아니겠지. 제국의 지배자인 동시에 대륙 위의 삼라만상을 통솔하는 주인이라 칭할 수 있는 황제가 오늘 한 번 진득하게 이야기를 좀 나누어 보자며 통보를 해왔다면 세상천지의 어떠한 사람일지라도 평정심을 잃은 채 우왕좌왕 헤매게 되고 말 것이다.
특히 사전에 별다른 예고도 없이, 사적인 곳에서 얼굴을 한 번 보자는 것이 아니라 조정의 대소신료들이 전부 모여 있는 어전(御前) 앞에서 만남을 가져보자고 한다면 더더욱.
‘그 능글맞은 영감은 대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거지.’
지난번에 만났을 당시, 흡사 수백년은 묵은 너구리처럼 뻔뻔스레 굴어대는 황제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은데, 황제가 뒷구멍으로 어떤 음험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렇게 고민을 해봐야 전부 소용이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
애당초, 제국의 모든 부(富)를 한 손에 거머쥐고 있는 황제가 무늬만 공작가인 에스텔 공작가를 한 번 밟아버리기로 결심한다면 찍소리도 하지 못한 채 밟혀야만 하는 것이 공작가를 둘러싼 비참한 현실이다. 결국, 이 방 안에서 머리를 열심히 굴려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으니 황제의 뻔뻔스러운 면상을 직접 마주해봐야겠다는 한심스런 결론을 다시 한 번 도출하였을 뿐이다.
...뭐, 지금 이 순간 그런 것 따위보다 나를 심란하게 하는 요소는 따로 있었지만.
“...아리아, 아직 멀었니?”
“...죄, 죄송해요. 카인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나의 전속시녀로서 소공작으로서의 정복(正服)에 대한 착용을 도와주어야만 하는 아리아가 정복의 착용법에 대해 무지한 나머지 고사리 같은 손을 꼼지락 거리며 그저 우물쭈물하고만 있는 광경을 바라보며 그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몇몇 소수의 인원을 제한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온화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현세의 상식을 가뿐히 뛰어넘는 마법에 대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기에 만능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는 아리아에게도 딱 한 가지 단점이 존재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정작 자신의 본업이라 할 수 있는 전속 시녀의 일에는 굉장히 서툴다는 것이었다.
애당초 아리아에게서 전속 시녀로서의 깔끔한 일처리를 기대하며 그녀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 아니었기에 별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정복을 눈앞에 둔 채 우왕좌왕하고 있기만 한 아리아를 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지고 말았다. 아무래도 에스텔 공작가로 돌아가게 된다면 아리아가 전속 시녀로서의 업무에 조금 능숙해지도록 특별 교육을 시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번에야말로 아무 짝에 쓸모도 없는 카를 영감의 뒤를 이어 아리아를 에스텔 공작령의 전속 마법사로 임명을 한다던가.
그렇게 내가 울상을 짓고 있는 아리아를 바라보며 이것저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무렵, 출입문 쪽으로부터의 한 줄기 노크 소리가 나의 귓가에 들어오고 말았다.
똑. 똑. 똑.
간결하고, 정확한 간격과 세기를 유지하는 단 세 번의 노크 소리. 흡사 기계가 문을 두드렸다고 해도 믿을 법한 그 노크 소리에, 나는 대체 어느 누가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린 것인지 깨달아버리고 말았다.
“...카인, 들어가도 괜찮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문 밖에서 내게 있어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머무르고 있는 곳의 집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의 목소리였다.
“예, 들어오셔도 괜...”
“흠, 아니네. 우리 사이에 허락 따위는 웬 말이란 말인가. 그냥 들어가도록 하겠네.”
벌컥-
내가 대답을 끝마치기도 이전에 황녀는 다짜고짜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
이렇게 행동할거면 처음에 노크는 왜 했던 것이며 나를 향해 들어와도 되냐고 질문은 왜 했던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저하, 아무런 기별도 없이 방에 불쑥하고 들어오는 것은 좀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만.”
나의 그러한 말에 황녀는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표정만을 지어보인다.
“흠,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군. 내 기억으로는 분명히 노크도 했었으며 방 안에 들어가도되냐고 양해도 구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정작 중요한 허락을 맡지 않고 불쑥하고 들어오셨잖습니까.
허나 그녀가 이 방 안에 들이닥친 시점에서 그러한 푸념을 늘어놓아봐야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기에 나는 목구멍의 끝까지 치밀어 올랐던 말을 도로 저 아래쪽으로 꾹꾹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헌데, 이 방 안에는 황녀의 폭거를 도저히 두 눈을 뜨고 넘길 수가 없는 사람이 나 말고 한 명 더 존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하. 이건 뭔가 아닌 것같군요. 카인님께서는 지금 그런 의도로 저하께 말씀을 드린 것이 아니시잖아요.”
정의로 가득 찬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아리아. 황녀가 이 방 안에 불쑥하고 들어온 시점부터 아리아는 뭐가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두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며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황녀의 호위기사인 크리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황족을 향한 불경죄라며 기함을 질렀을 법한 실로 건방진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호오, 상당히 재미난 의견이로군. 그건 대체 어떤 의미에서 하는 말인 것이지, 아리아?”
다행히도 황녀는 피식하고 아리아를 향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기만 할 뿐, 자신을 향한 아리아의 태도를 문제 삼을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카인님께서는 황녀 저하께서 기본예절도 모르는 얼간이가 아닌가 하며 의심을 품은 끝에 저하께 그런 질문을 던지셨던 것이랍니다. 하, 정말 우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네요. 제국 만민의 어버이나 다름없는 존재이신 황녀 저하께서 앞장서서 궁중의 법도에 어긋나는 행위를 저지르신다니 말이에요!”
...당연하지만, 나는 그런 의도로 가지고 황녀를 향해 입을 연 것은 아니었다. 저것은 어디까지나, 아리아 개인의 독자적인 해석이라는 것을 황녀 또한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행히, 아리아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황녀는 그리 화가 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입가에 만연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현 상황이 그저 유쾌하게만 느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흠, 그대는 아무래도 무언가를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군, 아리아.”
“...착각? 제가 무엇을 착각하고 있다는 말이죠?”
황녀의 말이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아리아가 미간을 찌푸리자, 황녀는 뭐가 그리도 재밌는 것인지 키득거리는 것과 동시에 아리아의 눈앞에 손가락 세 개를 치켜세운다.
“우선 첫째. 이곳은 황궁이며, 이곳을 지배하고 있는 법도는 전부 황실을 위한 것이라네. 본디 법도란 황실의 권위를 바로 세우기 위한 목적 하에 제정된 도구에 불과한 터. 그런데 법도 그 자체가 황족을 옭아매며 권위를 억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불성설인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
절대 황권 사상에 기반을 둔 꽤나 과격한 이야기이긴 했지만 원론적으로 보자면 옳은 말이기도 하였다. 황녀의 말마따나 전통과 법도란 황제와 황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만들어진 예법에 한 갈래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둘째. 아리아, 이래 뵈어도 나는 그대를 존중하고 있다네.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한 이들은 그대를 한낱 에스텔 공작가의 시녀라며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대가 어떠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지. 그렇기에 나는 그대를 향해 경의를 표하며, 그대가 나를 향해 다소 무례한 기색을 비추어도 이를 묵인해주고 있지. 허나명심하도록 하게. 나는 그대를 존중하고 있을 뿐이지, 그대를 인정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하여.”
“.....”
“그대가 정녕 카인을 위하며, 그의 곁에서 그의 도움이 되고자 한다면, 방금 전 그대가 한 말마따나 인간 세상의 법도를 지키는 편이 좋을 것이라네. 즉, 선은 넘지 말라는 의미이지. 뭐,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들의 눈치 따위 신경쓰지 않은 채 하고 싶은 대로 할 작정이라면 이 충고는 무시해도 상관이 없다만.”
키득거리며 그러한 말을 늘어놓는 황녀의 말을 가만히 들으며, 아리아가 자신의 입술을 꽉 하고 깨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허나 그것도 잠시, 마법사답게 빠른 속도로 진정을 되찾은 아리아는 싸늘한 어조로 자신의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세 번째는 무엇인가요?”
“아, 세 번째 말인가. 그것은 말이지...”
황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한 번 바라보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이리 대답을 할 뿐이었다.
“비밀이라네. 그렇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지. 왜냐하면, 그대 또한 머지않아 세 번째 이유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니.”
실로 여유롭기만 한 태도로 이쪽을 바라보는 황녀를 향해 아리아는 자신의 두 눈을 지그시 감더니 이내 무언가를 꾹꾹 눌러 담은 듯한 어조로 그녀를 쳐다보기만할 뿐이었다.
“...황녀님의 값진 충고, 반드시 명심하도록 하죠. 저하께서 하신 말씀처럼, 이곳은 황궁이며 당신의 앞마당과 같은 곳이니까요. 한낱 집에서 기르는 개라도, 자기 집 앞마당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가는 법이니 말이에요.”
아리아의 도발이나 다름없는 그 말에도, 황녀의 표정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거 참, 실로 기대가 되는군. 부디 남은 시간동안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쳐보게나.”
그렇게 서로를 향해 훈훈한 덕담을 나누며, 그 둘은 한참동안이나 서로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상대방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다 좋은데, 이 둘이 제발 내 앞에서만큼은 싸우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황궁이 내 눈앞에서 반파가 되는 꼴만은 보고 싶지가 않을 뿐이니.
“...뭐, 그건 그렇고. 대체 무엇을 하느라 이리 늦었던 것인가. 폐하를 뵈러 갈 시간이 이제 머지 않았거늘, 옷을 차려입은 꼬락서니가 실로 한심하기만 하군.”
황녀가 나의 옷매무새를 보며 눈썹을 치켜세우자, 나는 멋쩍음을 감추기 위해 쓴웃음을 지어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만큼은 나와 아리아의 실책임이 분명한 노릇이었으니까.
“원체 오랜만에 정복을 착용하는 것이라 그런지 손놀림이 서툴러진 것 같군요.”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그러한 변명을 늘어놓자, 황녀는 뭐가 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아리아를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차기만 할 뿐이었다.
“...한심하군. 그의 전속시녀를 자처하는 주제에 이리도 쓸모가 없다니.”
황녀가 자신을 향해 혀를 끌끌 차며 그러한 말을 늘어놓았음에도 아리아는 그저 신음성만을 삼킬 뿐, 어떠한 반응도 하지 못하였다. 황녀의 말마따나, 전속 시녀가 되어 정복의 착용조차 제대로 도와주지 못한다는 것은 전속시녀로서 반푼이도 되지 못했다는 의미와 동일하였으므로.
“쯧, 이리 와보게.”
“네?”
황녀는 내가착용하고 있던 넥타이를 확하고 잡아당김으로서, 나를 자신 쪽으로 끌어 당겼다. 어어하는 사이에 나는 그녀에게 끌려가, 어느새 그녀와 서로의 숨결을 간지럽히는 사이에 놓이고 말았다.
“이것 보게나. 카라가 삐뚤어졌지 않은가. 또한, 와이셔츠의 가장 위쪽의 단추마저 잠근다면 사람이 너무 답답하게 보이기 마련이지. 아무래도 이런 공식 석상에 너무 오랜만에 선 나머지 기초적인 면조차 간과하게 된 모양이군.”
그리 말을 하며 황녀는 나의 가슴 쪽에 살며시 손을 대더니 나의 옷매무새를 차근차근 정돈해주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손길은 매우 맵시가 있고, 또한 단정하기 이를 데가 없었던지라, 나의 전체적인 차림은 금세 그녀의 손길로 인하여 깔끔한 복장으로 변모를 해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넥타이 또한 삐뚤어진 것 같군. 카인, 제발 가만히 있어보게나.”
그리 말을 하며 황녀는 나에게로 한 발짝 다가오더니 흡사 나의 품에 안긴 것 마냥 가까운 거리에서 나의 넥타이를 살며시 매만져주었다. 그 손길은 마치, 출근길의 남편을 돌보는 새색시 같다는 실없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참으로 간질간질한 느낌이로군. 하지만, 나쁘지 않아. 그래, 정말로.”
황녀의 손이 넥타이에서 미끄러지듯 내려가더니, 나의 쇄골과 가슴을 어루만지듯 스쳐지나간다. 그녀의 두 눈은,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응시하는 듯 보였다. 그녀의 숨결은 나의 목덜미에 살며시 내려 앉아 나를 어지럽혔으며, 그녀로부터 풍기는 향긋한 체향이 나의 코를 간질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저하.”
내가 그녀를 향해 뭐라 입을 열려고 한 그 순간, 그녀는 살며시 검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나의 입을 가로막는다.
“그러한 눈으로 나를 보지 말게나. 나를 향해 그 어떠한 말도 하지 말게나. 나는, 이런 식으로 자네의 위로를 받아야만 할 만큼 나약한 여자는 아니니.”
그리 말을 하며 그녀는 손을 털어 나의 옷깃과 소매에 잡혀 있던 주름을 잡아주는 것과 동시에 나를 향해 한 발짝 앞으로 걸어온다. 그녀의 자그마한 체구가, 마치 나의 품속에 꼭 하고 안기는 모양새가 되어버리고 만다.
“...카인, 그거 알고 있는가.”
그녀의 아주 자그마한 속삭임이, 나의 귓가에 아주 살며시 들어오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내가 바라였던 것은, 고작해야 이런 것들 뿐이었다네. 자네와 함께하는 이런 소소한 시간이야말로, 나에게 있어서는 전부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자네는 알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