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0화 〉12. 흐르는 별 - 11 (120/201)



〈 120화 〉12. 흐르는 별 - 11

이제는 쉽사리 떠올릴 수도없는 머나먼 과거의 이야기다만, 그녀는 아직까지도 자신이 난생 처음 손에 검을 쥐기로 맹세하였을 때의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 아이리스, 너는 어찌하여 검을 배우려 하는 것이더냐.

그녀를 준엄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바라보는 스승의 그러한 질문에,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대답을 했었다 기억하고 있다.

제국의 황족은만민의 어버이나 다름이 없는 존재이며, 그들을 보살펴야만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는 이들이니.

자신은 그들을 전부 포용할 수 있는, 하늘이 되어주고 싶다고.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최초로 품은 소원이었으며, 삶의 방식이자, 결의였다.

그러한 맹세를 가슴 깊숙한 곳에 품은 채, 그 무엇보다 먼저 그녀는 스스로의 심상 깊숙한 곳에 높고 푸른 하늘을 품어 내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의념(意念)을 담아 휘두르는 검의 이름은 ‘하늘의 검’.

자신을 바라보고 의지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상념과 희망을 한데 엮어낸 끝에 완성된, 그녀가 추구하고자  이상의 구현이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끝까지 지켜낸 끝에, 자신의 무(武)속에 신(神)을 담아내려 했건만.

내가 추구하고자 했던 하늘은, 어느 한 남자만은 끝끝내 베어내지 못했던 것 같다.

내겐 이미  따위보다, 나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 따위보다, 훨씬 소중한 한 남자가 생겨버리고 말았으니까.

****


카인과 함께 연무장에 들어서니, 하늘에서는 때마침 눈이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겨울이 끝나고 따스한 봄이 찾아왔던 것이엊그제의 일과 같이 여겨지는데,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에 다시금 계절은 뒤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과거,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과 그로 인한 추위는 사람들에게 끝나지 않는 악몽의 상징으로서 받아들여지기만 했었지만.

이제는 다시금 자연의 섭리인 동시에 계절의 한 축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길거리에서는 ‘겨울의 마녀’를 무찌른 제국의 황녀,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에 대한 칭송의 목소리가 가득하기만 할 뿐이었지만.

정작 아이리스는 자신을 향한 그들의 칭송이 그저 낯 뜨겁기만 할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참으로, 싫었다. 정작 ‘겨울의 마녀’를 토벌한 영웅은 따로 있었지만, 그의 업적은 묻힌  자신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것인지, 정녕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계를 구한 진정한 영웅은 따로 있거늘, 그를 인정하주지 않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정말로 싫었다.

그녀는 이제, 다른 사람들을 지켜내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것이 싫었다.자신의 검을 오직, 어느 한 남자만을 위해 휘두르고 싶기만 할 뿐이었다.

스르릉-

연무장 반대편에 서 있던 카인은, 아이리스를 향해 한 발짝 걸어 나오며 자신의 검을 천천히 뽑아들기 시작하였다.

“...부디, 검을 들어주십시오. 저하.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당신께서, 저라는 사람의 마지막 순간이 되어주시기로.”

내가 죽는다는 사실 따위에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죽음 따위, 키리에의 손길을 받아들였던 그 순간부터 이미 각오를 하고 있던 바였으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죽는 것은 싫다. 아이리스, 당신이라는 여자의 앞에서만큼은, 나는 나의 끝이 비루하게 끝나기를 원치 않는다.

아이리스, 나는 너라는 여자가 내 인생의 최후의 순간을 장식해주었으면 한다.

그것만이, 나의 마지막 소망일 따름이다.

“...카, 인.”

아이리스는 자신의 손이 벌벌 떨려오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그의 두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싫었다. 그가 앞으로 얼마 후, 설령 자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더라도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쯤은 그녀 또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손으로 그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는 것이야말로 그에게 마지막으로 베풀어줄 수 있는 자비라는 사실 또한, 세상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단 말이다.

...하지만, 도저히 용기가 솟아나지 않았다. 그를 향해 검을 뽑아들 용기가 도저히 샘솟지 않았다.

그저, 무섭기만 하였다. 이제는 더 이상 그가 자신을 향해 말을 걸어줄 수 없다는 사실도, 자신과 어떠한 감정의 교류도 나눌 수 없다는 사실도, 이제 다시는 네가 내게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전부-

무섭기만 하였다. 그래, 모든 것이 그저 두렵기만 하였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저 겁쟁이에 불과한 한 명의 여자였던 것이다.

나는, 나는 너라는 사람의 노을빛이 되어주고 싶었다. 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보일 수 있는.

나는, 너라는 사람의 의자가 되어주고 싶었다. 인생의 여정 속에서 네가 힘들어 지쳐할 때, 네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너를 보듬어 줄  있도록.

...나는, 너라는 사람의 희망이 되어주고 싶었다. 네가 내 마음 속에 한 줄기 별로 자리매김을 하였듯, 나 또한 너라는 사람의 유일한 편이 되어 너와 함께 영원이라는 시간을 걸어 가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꿈은 이제-

터벅.

그가 다시금 자신을 향해  발짝, 앞으로 걸어 나온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발짝 물러서고 말았다.

“...저하. 이젠 정말로 남은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손발의 감각이,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제가 부디  명의 무인으로서 끝을 맞이하도록 도와주시지요.”

아이리스의 두 눈에 그리 말을 하는 카인의 전체적인 모습이들어오고야 말았다.

 때 근육으로 채워져 있던 팔목은 뼈만 남은 듯 가느다랗게 변했으며, 얼굴에는 살이 빠져 전신에는 오직 완연한 병자의 기색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이제는 정말, 이별의 끝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을 듯 했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군요. 이래서야 검을 딱 한 번밖에 휘두르지 못할  싶습니다.”

“.....”

“뭐,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죽어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제 목적은 당신이라는 무인의 손에 죽는 것이기는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당신을 넘어서는  또한 괜찮은 결말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는 전력을 다해 당신에게 저항을 하려 합니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사냥감보다는, 마지막 순간까지 발버둥을 치는 사냥감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니겠냐며 카인은 소리 높여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아아, 그렇구나. 이런 순간까지 와서도, 당신은 나를.

“자, 이제 각오는 되셨습니까?”

죽기 직전의 처지에 놓여 있는 너에게, 오히려 나라는 사람이 위로를 받고 말았다.

“...그래.”

그래, 마지막이다. 너와 함께 하는 이 마지막 순간을,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더럽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나는-

“카인.”

모든 감정을 뒤로 한 채, 하나의 각오를 하도록 하겠다.

“그대의 소망대로, 나는 그대를 전력으로 베도록 하겠네.”

“...훌륭합니다.”

그의 진심 어린 미소가 나를 반긴다. 그 이유가 어찌되었든 간에, 네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준다는 것이 나는 기쁘기만 하다.

그의 검이 서서히 위쪽으로 올라간다. 자세를 잡는다. 그 자세는, 일찍이 ‘겨울의 마녀’의 앞에 홀로 대적하였을 때의 그 자세와 동일하기만 할 뿐.

“저하, 저는 당신의 제자입니다.”

“...알고 있네.”

내 생애, 네가 나의 제자라는 사실보다 더 자랑스러운 사실은 존재하지 않으니.

“옛말 중에 청출어람, 이라는 말이 있지요. 제자는 스승이 쌓아올린 업(業)을 뛰어넘어야만 비로소 스승으로부터 모든 것을 사사받았노라고 말할  있는 법.”

그가 들고 있는 검의 끝이 서서히 흔들린다. 그와 동시에, 그가 품고 있는 심상과 그에서 비롯된 의념이 하늘과 땅을 이어나가기 시작한다. 저 검이야말로, 일찍이 ‘겨울의 마녀’의 숨통을 끊었던 바로 그 검-

“이것이 당신이라는 스승을 뛰어넘고자 했던, 제 검입니다.”

지상의 놓인 유일한 별. 그 별은, 자신에게는 결코 닿지 않을 하늘을 동경하고 말았다.

나의 위대한 스승이여, 이것이야말로 당신을 위한 나만의 헌사(獻辭)일지어니.

나는 당신이라는 하늘을가르고자, 지금 이 순간 검을 휘두른다.

그렇게 그가 검을 아래로 내리 그은 순간-

모든 것이, 갈라지고 말았다.

하늘에서 내리는 새하얀 눈송이도, 그들이 서 있는 공간도, 저 위편의 하늘도 전부.

모든 것이 갈라져버린 틈새에서, 눈이 부신 별빛만이 새어나와 그녀의 각막을 환하게 불태운다.

그것이야말로, 카인이 자신의 스승을 뛰어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 휘두른 검.

그렇기에 검의 이름은 파천(破天). 한낱 인간의 몸으로 하늘을 뛰어넘고자 하는 이가 내놓은, 단 하나의 분명한 대답-

“...아아.”

그 눈부심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별빛의 격류를 마주하면서도, 그녀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만이 걸려 있었다.

카인, 너라는 사람은 언제나 나를 깜짝 놀라게만 하는구나. 분명, 이 검이라면 내 ‘하늘의 검’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 내가 휘두르고자  검이 정말로 ‘하늘의 검’이었다면, 이 싸움은 나의 패배였을것이다.

카인, 알고 있는가. 나는  이상, 하늘을 바라보지 않는다. 모든 이들을 포용하는 하늘을 동경하지도 않는다.

그 날 이후 내가 바라보고자 했으며, 동경하고자 했던 대상은.

오직, 너 뿐이었다는 것을.

찰나의 순간, 그녀의 검집에서 검이 미끄러지듯 뽑혀 나온다.

그리고-

“.....”

카인과 아이리스는 여전히, 연무장 위에 서로를 마주하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언뜻 보기에, 달라진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둘 모두 알고 있었다. 방금 전, 결정적인 것이 끝을맺고 말았다는 것을.

푸확-

카인의 상체에서,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이 바닥에 천천히 쓰러지고 말았다.

“카인!”

끝끝내 버티지 못한 아이리스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카인에게로 달려와 그의 몸을 끌어안고 말았다. 그녀의 표정은 실로 울상인지라,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넘칠 것만 같은 슬픈 표정이었다.

“...카, 인...”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아이리스의 포근한 품을 느끼며, 카인의 시선은 서서히 눈이 내리고 있는 하늘로 향하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살며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리아. 이제 곧, 너를 만나러 갈 수 있겠구나.

“...마지막의, 그 검은 대체 무엇이었습니까? 하늘의 검은 아니었던  같은데...”

아이리스를 향해 그러한 질문을 던지는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고, 생기가 걷혀가고 있었다. 그러한 그를 바라보며, 아이리스는 가까스로 입을 열어 그에게 대답을 해주었다.

“...별빛. 나는 별빛을 나의 이정표로 삼아 검을 휘둘렀다네. 카인.”

정확히 말하자면, 별과 같이 반짝이는 너를 보며 나는 스스로의 검을 휘둘렀다.

과거의 나는, 모든 이들의 하늘이 되고자 검을 휘둘렀지만.

지금의 나는, 내 마음 속에 너라는 사람 이외의 것을 담아내지 못하게 되었다.

...그것이, 너의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너는 하늘을 베어내고자 스스로의 검을 휘둘렀지만.

정작 나의 검은 이제 너라는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니까.

나는 이제 세상 따위보다, 너라는 사람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을 뿐이다.

“...아하, 어쩐지. 무척이나 아름다운 검이더군요.”

그의 손이 점점 식어간다. 온기가 점차 사라져간다.

“제발 더 이상 아무 것도 말하지 마. 제발 아무 것도 하지 마. 제발...!”

나를 두고 가지마. 나를 두고 떠나지마. 1분이라도, 1초라도 좋으니까 조금이라도 내 곁에 있어줘. 제발...

결국,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말았다. 흘러넘치는 눈물은, 지상이 아닌 다른 곳에 떨어질 것만 같았다.

“...울지, 마십시오.”

그는 자신의 손을 가까스로 들어, 나의  눈의 눈물을 닦아내 주었다. 그 손짓은,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이 한없이 가벼웠으며, 어떠한 힘이 깃들어 있지 않을 뿐이었다.

“...이제 좀, 쉬고 싶군요.”

생기가 빠져나간 쉰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 아이리스는 바닥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자신의 무릎에 그의 머리를 기대게 하였다. 그의 눈은, 이미 반쯤 감겨 있는 상태였다.

“...카인.”

이제 정말 마지막이 멀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라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의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아이리스는 무언가를 고백하기 위해 자신의 입을 천천히 열려고 하던 바로 그 순간.

“...카인.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네. 나는, 나는...”

“...그만.”

그에게 무언가를 고하려 하던 그녀의 입을, 카인의 손가락이 살며시 틀어막는다.

“남자가 되어서 여자로 하여금 그런 말을 먼저 하게 하는 것은, 실로 멋이 없는 짓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먼저 당신께 고백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소리 없이 웃더니, 카인은 마지막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 아이리스의 입술에 스스로의 입을 가져간다.

“사랑한다. 아이리스  데브하르트. 나는, 너라는 여자를 사랑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의 고백에, 결국 그녀의 두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흘러내리고야 말았다. 그 어찌나, 그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이었던 것인가. 그리고 하필, 이 마지막 순간에 그는 이러한 말을 해주는 것이란 말인가. 슬픔과 기쁨이 하나가 된 그녀의 눈물이, 지상에 흘러 내리고 말았다.

...그래, 카인. 나 또한, 당신이라는 남자를 사랑했다.

지난 시간, 너라는 남자와 함께해서 나는 행복했다. 너라는 남자를 사랑할 수 있어서, 참으로 기뻤다.

그러니 한 가지 약속할게.

나는 언제나 너라는 남자를 사랑하도록 할게.

나는 네가 어디에 있든 반드시 너를 남자를 만나러 갈게.

반드시.

“...나도, 널 사랑했어.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러니 이젠, 푹 쉬어.”

“.....”

돌아오는 대답은 더 이상 없었다. 그저, 고요한 침묵만이 주위를 맴돌고 있기만  뿐.

"...카인."

"....."

"...카,인..."

"....."

어느새 하늘에서는 더 이상 눈이 내리지 않고 있었으며.

구름이 맑게 개인 하늘은 그저 끝없이 높고 청명하기만 하였다.

그녀가 내뱉는 비통의 말은,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사라져간다.

결국 이 자리에는, 아주 깊은 잠에 빠진 한 명의 사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이리스를 둘러싼 차가운 겨울은, 그렇게 끝을 맺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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