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9화 〉12. 흐르는 별 - 10 (119/201)



〈 119화 〉12. 흐르는 별 - 10

그리하여 길고 긴 겨울은 끝이 나고, 봄이라는 계절이 찾아왔습니다.

대륙을 가득 덮고있던 눈은 흔적도 없이 녹아내리고, 산천초목에는 꽃들이 가득 만개하는 봄이 우리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모든 악몽은 끝이 났습니다. 힘들고 차가웠던 나날을 훌훌 털어버린 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봄의 따스함을 만끽하도록 합시다.

많은 것을 잃고, 슬퍼하기만 했던 나날은 이제 끝입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다시금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겠지요.

그렇습니다. 이것은 해피엔딩.

행복으로 가득 차 있어야만 할, 이야기의 끝.

모든 것이 막을 내린 무대 뒤편의 후일담.

****


“...대수림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인가?”

“돌아가야겠지요. 인간 세상에 엘프가 홀로 나돌아다니는 것은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거든요. 거기다가, 제게는 세계수를 지켜야만 하는 사명이 있기도 하니.”

아이리스의 질문에, 키리에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리 대답을 하였다.

겨울의 마녀와의 일전 후, 제도로 돌아온 키리에는 성녀에게서 상처의 치유를 받아 원래 상태를 회복하자마자 대수림으로 복귀를 하겠노라고 아이리스에게 통보를 하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난 1년간 한솥밥을 같이 먹은 정이 없지 않아 있었기에 그녀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있었지만 키리에의 말마따나 그녀에게는 세계수를 지켜야만 하는 사명이 있었다. 이 이상 그녀를 붙잡는 것은, 민폐임이 분명하겠지.

그렇게 아이리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키리에의 말에 긍정을 표하자, 키리에는 살며시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겨울의 마녀는어찌 되었나요?”

“겨울의 마녀는 현재 황궁의 지하에 엄중하게 봉인을 하고 있는 중이다. 어차피, 심장만뛰고 있을 뿐 시체나 다름이 없는 상태인지라 봉인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그 날의 격전 이후, 카인이 휘두른 일검에 복부가 꿰뚫린 마녀는 두 번 다시 눈을 뜨는 일은 없었다만 동시에 그렇다고 해서 죽은 것 또한 아니었다. 비록 시체나 다름이 없는 상태이긴 했지만 전신에 온기가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으며 무엇보다 아직까지도 미약하게나마 심장 박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아아, 그렇군요. 그래서 아직, 이 세계가 이렇게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이로군요.”

“...그건 대체 무슨 의미에서 하는 말이지?”

키리에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아이리스가 그리 반문을 하였음에도 키리에는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마지막까지 그녀의 질문에 답을 해주지 않았다. 다만-

“...만약,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면 마녀의 심장을 찌르도록 하세요. 그리한다면, 다시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르는 노릇일 테니.”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키리에는 대수림으로 돌아갔다.

한편 비앙카  카스타나와, 아리엘 티에르는 황궁에 남기로 결정하였다. 지난 1년, 그들과 동고동락을 함께한 끝에 이제는 죽고 못 사는 친밀한 사이가 되었기에 그들이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리스가 그들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듯, 그녀들 또한 아이리스라는 여인을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이 황궁에 남아 있으려고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카인, 그 남자 때문이었다.

‘겨울의 마녀’와의 격전 이후, 다행히 그는 한 달 만에 의식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몸이 예전과 같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현재 하루의 절반 이상을, 의식을 잃은 채로 무기력하게 누워있어야만 하는 상태였다.

...이유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비앙카와 아리엘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원인을 찾으려 애를 썼지만, 끝내 무엇 때문에 그가 이리 된 것인지  원인을 규명해낼 수가 없었다. 그저, 그가 마지막에 사용했던 검술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만 있을 뿐.

거기다가 그가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동안, 그의 몸에서는 생기가 점점 사라져 갔다. 쉽게 말해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차츰차츰, 그리고 확실히 죽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인세에서 가장 강력한 회복력을 가진 아리엘의 신성력도, 비앙카가 연금술을 이용해 만들어낸 치료제도, 그에게는 전혀 효과가 듣지 않았다. 그들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의 몸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생기가 옅어지기만 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들의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인은 그저 평온한 얼굴을 하며 침대 위에 곤히 누워있기만  뿐이었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이리스는 그가 멀고도 먼, 한 때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그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리라. 깊고도 끝이 보이지 않는, 오직 평안함만으로 가득 찬 안락한 꿈을.

시간은, 흘러간다.

“...굳이 침대 위에서까지 그렇게 일처리를 해야만 하는가?”

침대 위에 에스텔 공작령과 관련된 온갖 서류를열심히 훑어보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아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뾰로통한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이리스라고 해서 시간이 많고 한가롭기만 하여 그를 만나러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그녀야 말로 이 제국 내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녀는 현재 일선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선 황제를 대신하여 온갖 정무를 처리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사실상 그녀는, 제국의 황제나 다름없는 바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떠한 것도 부질이 없다 여겨질 뿐이었다. 아이리스  데브하르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검도 아니었고 제국도 아니었거니와, 카인이라는 한 남자가 되었다.

...알고 있다. 자신의 이러한 선택은, 일찍이 자신이 믿어왔던 모든 것에 대한 배반이나 다름이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아이리스라는 여인에게는 그라는 존재가 가장 소중한 것이 되었으니까.

그래. 그 하나만이 자신의 곁에 있어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다른 어떠한 것도, 더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있어 시간을 쪼개고또 쪼개어 그와 차를 마시는 이 시간이 너무도 소중하기만 하였건만, 이런 자신의 심정을 알아주지도 않은 채 저리 서류에만 탐닉을 하고 있는 그가 그저 불만스럽기만 하였다.

“이제 와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 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그리 말을 하며 카인은 이것만큼은 결코 양보할 수 없다고 그녀를 향해 고하고 있었다.

...아아, 그래. 나도 알고 있다. 애당초 너는 뼛속까지 공작이신 몸이다.

지금까지 너를 움직여온 것은 네 후회가 아니라, 네 각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한 너의 긍지를, 고작해야 나의 감정 때문에 짓밟아버린다는 역겨운 행위는 어느 누구보다 바로 내가 용납을  수 없을 테지.

그렇게 그녀는 그를 멈추지 못하였으며.

그 또한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끝끝내 바꾸지 못하였다.

...시간은 무심한 듯, 하지만 냉혹하게 새겨져 간다.

그를 둘러싼 모든 여인들의헌신에도 불구하고, 그의 증상은 날이 갈수록 차도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화되어가기만 하였다.

현재의 그는 하루에1시간조차 깨어 있지못하는, 사실상 반시체나 다름이 없는 상태로 전락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손에서 서류를 떼어놓지 않고 있었다. 그의 책임감은, 지금  순간에도 그의 어깨를 강하게 짓누르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결국, 아이리스는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악역 따위는 얼마든지 자처할 수 있다는  가지 결심을.

짝-!

“너, 정말 미쳤어?”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른 듯한 모습의 비앙카가 끝내 분기를 참지 못한 것인지 아이리스의 뺨을 냅다 후려 갈겼다.

황족을 향한 그 불경에 대해 호위기사인 크리스는 놀란 나머지 기함을 터트리고 말았지만, 정작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아이리스는 너무도 담담한 태도로 비앙카를 마주하고 있었다.

“미치지 않았다. 나는 지극히 이성적일 따름이지.”

“아니, 미쳤어. 완전 정신이 나갔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카인과 단 한 마디의 상의도 없이 그 따위 일을 저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비앙카가 분기에 가득  어떠한 말을 늘어놓고 있건 간에, 아이리스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비앙카 델 카스타나. 너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지난번의 겨울로 인해 에스텔 공작령은 인구수가 대폭 감소하였으며, 사람이 살만한 토지 터무니없이 줄어버리고 말았다. 지금의 에스텔 공작령은, 사실상 군소 영지보다 못한 신세가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래서 그 틈을  에스텔 공작령을 황실의 소유로 편입하고자 그런 개수작을 벌인 것이라고?”

그리 말을 하며 비앙카는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아이리스의 뺨을 후려쳤지만, 그녀는 그저 비앙카의 손길을 묵묵히 맞아주고 있을 따름이었다.

“...현재 살아 있는 사람  에스텔 공작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카인 사람 밖에 없으며, 카인 또한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 생활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지. 변변찮은후계자도 없는 처지이니, 그가 죽으면 에스텔 공작령은 자동적으로 황실령에 편입이 되고 말 것이다. 내가 한 일은 그저, 그것을 조금 앞당긴것에 불과해.”

“그는 아직 살아 있어. 그는 여전히 그곳의 영주이며, 그곳의 공작인 사람이라고. 그런데 네가 무슨 권리로 그에게서 그 모든 것을 빼앗아가려는 것이지? 대답해봐!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

“...그래, 전부 나의 욕심이다. 그러니 원망하려면, 나만을 원망해라. 비앙카 델 카스타나.”

그리 말을 하며 아이리스는 더 이상 어떠한 변명도 늘어놓지 않은 채 자신의 눈꺼풀을 살며시 닫기만 할 뿐이었다.

“...더러운 년. 이런 상황에서도 자기 밖에 생각하지 않는 개 같은 년.”

그런 원독에 가득 찬 말을 내뱉으며 뒤편으로 사라진 비앙카와는 달리, 아리엘은 그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리엘 티에르. 너는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인가?”

“당신의 같잖은 속내 따위 이미 전부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당신은 그저, 남은 시간이나마 카인이 자신만의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겠지요.”

“.....”

“참으로 멍청한 여자로군요. 스스로를 굳이 그렇게까지 몰아세울 필요는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리 말을 하며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리 쉬더니 아리엘 또한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다.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않았습니다. 남은 시간만큼이라도, 그를 꼭 행복하게 만들어 주세요.”

“...그래.  역시 잘 알고 있다.”

아리엘이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기 직전, 아이리스는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던 것 같다는 실없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시간은, 그렇게 쉴 새 없이 새겨져 간다.

그가 깨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만 갔다.

1시간에서 30분으로. 30분에서 15분으로. 15분에서 10분으로.

...이제는, 모두가 깨닫고 말았다. 모든 사람이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아하던 그 시간이, 이제 코앞까지 닥치고 말았다는 사실에 대해.

그는  이상 에스텔 공작령과 관련된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깨어 있을 수 있는 아주 짧은 시간을, 자신이 아는 사람들과 함께 소비하기 위해 그 시간을 아주 소중히 여길 뿐이었다.

여신이시여, 우리에게 더 이상의 잔혹함을 강요하지 마시옵소서. 부탁드리옵니다. 여신이시여-

하지만끝내,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날이 찾아오고야말았다.

“...저하.”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을 잠깐이라도 바라보기 위해 방문을 연 순간, 아이리스는 여느 때처럼 곤히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이 아닌 자신을향해 말을 걸어주는 그의 모습을 마주하고 말았다.

“.....”

순간,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음에도 본능적으로 깨닫고 말았다.

기적이 일어나 그가 치유된 것이 아니라,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던 그 순간이 마침내 도래하고 말았다는 사실에 대해.

“...카, 인...”

스스로의 입에서 언어가 되지 못한 말이 흘러넘치고 말았다.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실이, 너무도 싫었다. 처음으로, 인간의 운명을 관장한다는 여신이 죽도록 미워지고 말았다.

그러한 아이리스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카인은 그녀를 향해  발짝 다가오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지도 모르는 이 순간, 그의 앞에서 눈물이 흘러넘친다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기에, 떨려오는 목소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그와 두 눈을 마주한다.

“...저하.”

“...그래, 카인.”

“부디 저를, 죽여주실  있으십니까.”

...아아, 너는 어찌하여 나를 향해 이리도 잔혹한 부탁을 하려 드는 것이란 말인가. 카인-

“당신의 검으로 직접, 저에게 죽음을 선사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휘두르는 검이 저의 마지막이 되게 해주십시오.”

"....."

“그것만이 저의 마지막 소망이자, 당신을 향한 마지막 부탁일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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