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4화 〉12. 흐르는 별 - 05 (114/201)



〈 114화 〉12. 흐르는 별 - 05

떨그렁-

검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연무장 전체를 가득 채운다. 그리고 루시안은 스스로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신도 모르게 손아귀에서 검을 놓치고 만 작금의 현실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자신의 오른손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뿐이었다.

별 다른 일은 아니었다. 그저 언제나 그래왔듯 에스텔 공작가로 오랜만에 복귀한 카인을 향해 한 차례 대련을 요구하였으며, 서로가 쌓아올린 검기(劍技)를 나눈 끝에 그의 검에 담긴 거력(巨力)을 감당하지 못하고 끝내 손아귀에서 검을 놓치고 말았다는 시시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이건, 나의 패배로군...”

루시안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부들부들 떨려오는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보며 허탈한 목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틀림없었다. 그 어떠한 변명을 대더라도, 카인과 행한 이번 비무는 명실상부한 자신의 패배임이 분명하였다.

물론, 제도의 연회장에서 행하였던 결투처럼 전력을 다하여 그와 검을 맞대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그와 함께한 것은 엄연한 비무였으며, 서로 간의 순수한 검기만을 재기 위해 오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제약이걸린 상태이기는 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시안의 패배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순수한 검기(劍技)에서 카인에게 밀렸다는 말은, 바꿔 말하자면 루시안의 검사(劍士)로서의 역량이 카인의 역량에게는 도저히 미치지 못했다는 말과 동일한 의미의 말이기도 하였으니까.

“...강해졌군. 1년 전, 연회장에서 한 차례 검을 나누었을 때보다 훨씬 강해졌어.”

루시안의 말은 진심이었다. 물론, 당시 행해졌던 결투는 카인의 승리로 끝을 맺었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의 카인이 루시안보다 강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  당시 카인이 루시안에게서 한 판을 따낼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루시안이 ‘흐르는 별’의 특성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었지, 그가 카인보다 약해서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의 육체는 1년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단련이 되었으며, 순수한 검사로서의 역량만 따지더라도 절정에 이르렀다고 평할 수 있을 만큼 그는 강해졌다. 어쩌면, 이제는 방심하지 않은 채 전력을 다해 싸우더라도 그를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르지.

“글쎄, 이 정도는 정말 별 거 아니라 생각하는데.”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 자신의 재능에 대해 극찬을 하고 있음에도 카인의 표정은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잘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다른 사람 앞에서 겸손을떨기 위한 목적으로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말은 결코 아니었다.

카인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검술에 그다지 나쁘지 않은 재능을 가지고 있다 생각하였지만 눈앞의 루시안이나 황녀나 같은 진정한 천재와 비교하자면 자신의재능은 실로 하찮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작 1년이라는 시간 만에 이토록 가파른 성장세를 유지한 채로 실력이 일취월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현재의 자신은 검술을 ‘익혀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복원’해나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겠지.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자신이 세상에 비견할 바가 없는 천재로 보이는 것이리라-

그렇게 카인이 숨을 돌리며 허리춤에 매여 있는 검집에 자신의 검을 납검(納劍)하려고 하던 바로  순간.

짝, 짝, 짝.

연무장 구석에서 아주 자그맣긴 하지만, 동시에  있는 박수 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카인과 루시안이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기척을 숨긴 채 유령과도 같이  자리에 서 있는 황녀와 실력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주제에 황녀의 호위 기사를 자처하는 크리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크리스?’

실로 오랜만에 보는 크리스의 얼굴에 카인은 스스로의 몸을 멈칫하고 말았다. 카인이 기억하기로 황녀는 에스텔 공작가를 방문했을 당시 크리스는 물론 어떠한 수행원도 대동하지 않은 채 이곳을 찾아왔을 터, 그런데 이제 와서 녀석이 뒤늦게 에스텔 공작가를 방문한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설마 저 실력으로 황녀의 호위를 자처하며 깝죽대려고 오지는 않았을 테고.

카인이 속으로 머리를 굴리기 바쁘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녀는 카인과 루시안을 한 차례 번갈아보며 실로 감탄하였다는 어조로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잘 보았네.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무인들이 검기(劍技)를 겨룬다는 것은, 실로 재미난 구경거리임이 틀림없는  같군.”

그리 말을 하는 황녀의 얼굴에는 아주 옅지만 분명한 흥분이 올라와 있었다. 방금 전, 우리들의 비무를 보며 감탄을 하였다는 것이 마냥 공치사는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과찬이십니다. 저하.”

황녀를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다하는 루시안과는 달리, 카인은 옅게 한숨을 내쉬며 타박을 하는 듯한 어조로 그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대체 언제부터 기척도 내지 않은 채 이곳에 서 계셨던 것입니까?”

제국의 황녀를 향한 질문이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건방지기 이를  없는 그 질문에 그녀에 옆에 시립하고 있던 크리스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정작 황녀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자네는 참으로 수줍음이 많은 남자로군. 누군가가 자신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는 사실이 그리도 신경이 쓰이는가?”

카인을 향해 피식하고 웃음을 지어보이던 황녀는 이내 입을 열어 순순히 대답을 해주었다.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네. 대충, 자네와 투르니젠 소공작이 첫 번째 합(合)을 나누었을 무렵부터였던가?”

“.....”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지켜보았다고 말을 하면 될 것을 왜 이리 어렵게도 설명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카인, 자네의 검기를 견식하다 보니 한 가지 의문점이 드는데 답을 해줄 수 있겠는가?”

“의문점 말씀이십니까? 어떠한 것이 말씀이십니까?”

카인이 약간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황녀는 무언가가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리 질문을 던졌다.

“방금 전, 자네가 구사하던 검술 말일세.어딘가 모르게 눈에 많이 익는 것 같은데, 단순한 나의 착각인 것인가?”

황녀의 그러한 질문에 카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이리 답을 할 뿐이었다.

“글쎄요. 제 검술 스승이 스승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스승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흠, 참으로 그럴 듯한 변명인지라 이대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 나의 처지가 조금 아쉽기만 하군.”

그리 말하며 그녀는 피식 웃어 보인다. 어딘가 수상쩍은 기색이 역력하긴 하지만 이대로 묻고 넘어가 주겠다는 제스처임이 분명하였다.

“뭐, 자네의 검술에 대한 문제는 일단 차치하도록 하지. 지금부터 자네와 긴히 나누어야  중대한 이야기가 있으니 말일세.”

그리 말을 하며 황녀는 자신의 품속에서 자그마한 서찰 하나를 꺼내들어 보인다. 서찰의 겉면에, 황제의 직인(職印)이 큼지막하게 찍혀 있는 불길한 광경이 눈에 들어오고 말았다.

“폐하께서 에스텔 공작에게 직접 보내신 친서라네. 국사(國事)와 관련된 매우 중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 한시라도 빨리 폐하께 답을 돌려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내 이렇게 친히 자네를 찾아온 것이라네.”

카인을 향해서는 입으로 ‘급하다’라고 표현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황녀의 말투는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내기를 할 수도 있었다. 저 여자는, 지금  상황에 대해 눈꼽만큼도 ‘급하다’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저하께서는 어찌하여 저를 찾아오신것입니까?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저라는 사람이 국사(國事)를 처리하는 것에 있어서, 별반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만...”

카인의 의아함이 담긴 질문에, 황녀의 입에 걸쳐져 있던 미소는 더욱 짙어지고 말았다. 마치, 카인이 자신을 향해 그러한 질문을 던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마냥.

“이런, 안타깝게도 자네는 이번 일과 관련이 있다네. 그것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


“...으음...”

아버지께서는 황제가 보낸 서찰을 아무 말 없이 한 차례 읽어보더니 황녀를 바라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한 번 서찰을 읽어보시더니, 이내 무언가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눈초리를 하며 황녀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아마, 아버지 나름대로 이 상황 그 자체가 황당하기 짝이 없기만 하다는 표현임이 틀림없겠지.

“...저하, 그러니까 서찰의 내용을 요약해보자면 폐하께서는 이제 저하의 국서(國壻)를 정하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나 또한 이제 성혼을 치를 나이가 되었으니 말일세. 또한, 현 황실에 직계 혈통이라고는 나 혼자밖에 존재하지 않으니 하루 빨리 후계자를 생산해 제국의 반석을 든든히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소 낯이 뜨거워질 법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황녀.

“그리고 현재 저하의 국서 후보로서 가장 유력한 자가 다름 아닌, 음...”

아버지께서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시겠는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실 뿐이었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시선에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최근 들어 나를 바라보는 황녀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기에 뭔가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 마음의 준비도 없이 사각지대에서 거나하게 한 대 얻어맞으니 뒤통수가 얼얼하기만 했다.

...빌어먹을. 다른 걸 다 떠나서 나를 주인공으로 하여 이런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개최할 예정이었다면 내게 미리 한 마디 정도는 해야 인지상정이 아니던가?

“뭐, 이야기가 그리 되었다네. 참고로 소공작은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도 없이 나와 함께 곧장 제도로 향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을 해주고 싶군. 이미 폐하와 모든 조율을 끝내 놓았으니 말일세. 어떠한가, 에스텔 소공작. 일이 간편해서 돌아가니 기분이 좋지 않은가?”

“.....”

아무래도 황녀에게 있어 내 의견 따위는 고려사항 조차 되지 않았나보다.

“...저하, 이건 너무...”

갑작스러워도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냐는 말을 꺼내려고  그 순간, 황녀와 나의 눈이 서로를 마주하고 말았다. 그녀의 두 눈에는, 이제는 어떠한 것도 양보를 할 수가 없다는 강력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

...결국,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나. 그래, 그간 어쩐지 황녀가 너무 조용하다 싶었다. 비앙카와 예의 ‘거짓 약혼’ 사건이 있을 때도 상황을 좌시하지 않은 채로 나를 찾기 위해 대륙을 헤집고 돌아다녔던 황녀였다. 지난 1년간 나를 바라보며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모든 인내심이 소진되어버린 것이 틀림없겠지. 아니, 그간 용케도 참고 있었노라고 칭찬을 해줘야 할까.

“하지만 제게 있어서는 조금 갑작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군요. 저하, 카인이 저하의 국서 후보로서 꼽히게 된 구체적인 이유라도 설명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제반 사정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아버지께서 다소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그리 질문을 던지자, 황녀는 마치 그러한 질문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린다.

“흐음, 구체적인 이유라. 뭐, 이유야 셀 수도 없이 많지만 공작 자네가 가장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가지 거론해 보도록 하겠네.”

“호오, 그게 대체 무엇입니까?”

황녀의 말이 흥미롭기만 한지 흥미진진한 기색으로 그녀의 말을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시는 아버지.

“공작. 현 제국의 4대 공작가에는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검술이 하나씩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잘 알고 있겠지?”

황녀의 다소 엉뚱한 질문에도 아버지께서는 흔들림 없이 고개를 끄덕이신다.

“잘 알고 있습니다. 문(文)에 치중한 크러셀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공작가에는 전부 초대 황제 폐하 시절부터 전해져 내려온 검술이 하나씩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에스텔의 ‘명신(明神)’. 투르니젠의 ‘어스름한 달’. 데카라즈난의 ‘이지러진 태양’. 그 위력도 위력이지만 무려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승이 되어온 검술이라는 점 때문에 상당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유파(流派)들이기도 하였다.

“사실, 황실에도  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전해져 내려온 검술이 하나 존재한다네. 그 이름은 흐르는 별. 기본적으로는 황족의 직계만이 익히는 것이 허용된 검술이지만,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언제나 예외가 존재하기 마련이지.”

앞으로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올 말이 즐겁기만 한지 황녀는 키득거리며 말을 이어나간다.

...빌어먹을. 자신의 입으로 문제 삼을 생각이 없다고 했던 주제에 이제 와서 말을 바꿀 예정이란 말인가. 정말로, 수단과 방법 따위 가릴 생각이 없는 것인가.

“하나,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황실에 투신하기로 맹세한 자.”

“그리고 다른 하나. 외부인이긴 하지만, 황실의 일원이 될 예정인 자. 즉, 황실의 직계와 피를 섞을 예정인 자.”

“...하.”

내 입에서 결국 헛웃음이 새어나오고 말았다. 아무래도, 황녀에게 한 방 먹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싶었다. 황녀에게서 ‘흐르는 별’을 익히기로 결심한 그 순간부터 차후에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설마 대가라는 녀석이 이런 때에 이런 식으로 돌아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못했단 말이다.

‘흐르는 별’을 익힐 수 있는 조건에 설마 저런 조항이 붙어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그 때,내게 ‘흐르는 별’을 가르쳐주었던 황녀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순간, 황녀가 이 순간을 기약하며 내게 ‘흐르는 별’을 가르쳐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말았다.

“참고로 폐하께서는 황실의 비전검술이 유출된 이 사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계시는 중이라네. 국서 문제는 우선 차치해두고서라도, 우선 폐하께 해명을 하기 위해서라도 제도로 올라가는 것을 추천하도록 하지.”

“아아, 물론. 에스텔 소공작이 나의 국서가 된다면, 모든 것은 순리대로 해결이  것이라네.”

“...그래. 모든 것이 순리대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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