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12. 흐르는 별 - 04
에스텔 공작가의 뒤편에 위치한 자그마한 후원.
그다지 관리가 잘 되어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자그맣고 소박한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 있는 아기자기한 화단의 사이를 걸어가며 사라는 실로 오래간만에 평온함과 안온함이라는 감정을 되새기고 있는 중이었다. 바람은 기분이 좋을 정도로만 그녀를 스쳐지나가며, 화단에 피어 있는 꽃들을 나부끼게 한다. 눈에 보이는 것, 자신의 감각에 와 닿는 것 전부가, 하나의 기적이나 다름이 없다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에스텔 공작가에 도착한 지 어느덧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녀가 재무관으로서 맡은 일은 점차 손에 서서히 익어가기 시작했으며, 카인이 데려온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위의 모든 사람은 그녀를 향해 친절히 대하였다. 일부 진실을 알고 있는 자들은, 아무런 내색 없이 그녀를 챙겨주기만 할 뿐이었다.
현재의 사라에게서는, 과거의 ‘사라 세르나드’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머리색과 눈동자의 색이 바뀌었으며, 아리아의 마법으로 인해 그녀의 생김새는 과거와 미묘하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래봐야 인상이 살짝 바뀐 수준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그것만으로도 에스텔 공작가의 사람들의 대다수는 사라가 과거의 ‘사라 세르나드’임을 눈치 채지 못하였다.
...결정적으로, 현재의 사라는 언제나 웃고 다녔다.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과거의 ‘사라 세르나드’가 언제나 얼음장 같은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다녔던 것과는, 참으로 대조되는 표정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현재의 사라는 과거의 ‘사라 세르나드’와는 별개의 사람이라 할 수 있겠지.
“.....”
햇살은, 참으로 따스하였다. 저 멀리에는 푸른 하늘이 높고 푸르게 펼쳐져 있었다. 지평선의 저 끝까지 하늘이 펼쳐진 그 광경에, 자신이 그대로 날아가 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만일 누군가가 현재의 자신에게 기분이 어떻냐고 묻는다면, 자신은 필경 ‘행복하다’라는 말을 해버리고 말겠지.
...비록, 내가 이곳에 있는 하나 뿐인 이유인 네가 나를 봐주지 않는 것이 조금은 아플 따름이지만, 그것 또한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였다. 지금은 이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나는 지금, 너와 같은 하늘 아래 있으니까. 설사 네게 닿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가슴에 무언가가 남는 것이 있다는 것을 믿으니까. 나는 한 때나마, 너와 같은 것을 바라보았으니까. 사라라는 여자가,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남자를 정말 사랑했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쭉 남아 있을 테니까-
그러니 어느 것 하나 서두를 것 없었다. 앞으로, 이러한 시간은 잔뜩, 아주 잔뜩 남아 있을 것이다. 느릿하지만, 나만의 방식으로 느긋하게 삶을 구가해 나갈 수 있을 테지.
“...사라 양, 제발 제게 한 번만 시간을 내주실 수는 있으십니까?”
“...투르니젠 소공작님.”
...그래, 투르니젠 공작가의 소공작이 자신을 바라보며 구질구질하게 매달린다는, 실로 짜증이 절로 나는 이 광경 하나를 제한다면 말이다.
루시안의 얼굴을 보자마자 사라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살포시 찌그러뜨리고 말았다. 세간에서는 루시안의 얼굴을 보며 ‘반반하다’라고 평하며 여성들에게 수요가 많다는 사실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사라는 루시안의 얼굴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사라는 저렇게 곱상하며 반반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게 되었다. 그래, 남자라면 카인과 같이 듬직한 면모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째서 저를 계속 피하시는 것입니까? 혹시 제가 불편하기라도 하신 것입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인가. 네가 불편해서 피하는 것이 당연한 노릇이 아니던가? 무엇보다, 네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대상은 에스텔 공작가의 ‘사라’가 아니라, 세르나드 백작가의 ‘사라 세르나드’가 아니던가? 그 사실이, 내게 있어서는 세상 그 무엇보다 짜증이 난단 말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너와 정면에서 마주하는 것을 피해왔다. 너와 대화하고자 하는 상황을 거절해왔다. 하지만, 이렇게 재수 없이 정면으로 맞닥 드리게 된 이상, 이제는 도저히 너를 피할 수 없을 듯하다. 어차피, 루시안 폰 투르니젠이 에스텔 공작가에서 계속해서 머무는 이상, 언젠가 날을 잡고 이야기를 할 필요성을 느끼기도 했었으니까.
“미천한 계집이 투르니젠 공작가의 고귀하신 분을 뵙습니다.”
그리 말을 하며 사라는 자신이 걸치고 있는 드레스의 밑단을 살짝 들어 올리며 루시안을 향해 예를 표하였다. 하지만 그런 예를 다하는 동작과는 달리, 사라의 목소리는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허나 루시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지 사라를 향해 허겁지겁 말을 이어나갔다.
“사라 양. 사라 양이 어째서 이곳에서 이러한 모습으로 머무르고 계시는 것인지, 묻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 대답을 해주십시오. 혹시 저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몇 년 전, 리히텐부르크 백작이 개최한 연회장에서 처음 뵌 이후, 그 뒤로도 몇 번이고 마주했지 않았습니까? 혹시 기억이 나십니까?”
아아, 기억하다말다. 그것도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어찌 너를 잊어버릴 수가 있겠는가. 루시안 폰 투르니젠 또한, ‘사라 세르나드’를 구매할 ‘구매자’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너와 네가 마주했던 만남의 상당수가, 이쪽에서 의도한 만남이었는데 그 사실을 어찌 잊어버릴 수가 있겠는가.
“제 이름이 사라인 것은 맞지만, 저와 같은 하찮은 계집이 어찌 투르니젠 소공작님과 접점이 있었겠습니까? 필시, 소공작님께서 착각을 하신 것이 분명할 테지요.”
나는 이미 그 때의 ‘사라 세르나드’가 아니다. 그러니, 제발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어라.
사라의 단호한 부정에 루시안이 그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사라는 표정 하나 없는 냉막한 얼굴로 그를 한차례 바라보더니 이내 모습을 휙 하고 돌렸다.
“하실 말씀이 더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물러나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말을 하며 사라가 루시안에게서 떠나려고 하는 그 순간, 루시안은 사라의 손목을 급하게 붙잡고 말았다. 여인을 대하는 예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지만, 순간적으로 너무도 다급했기 때문이었다.
“사라 양.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사라 세르나드라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스스로가 사라 세르나드라는 사실을 그토록 부정하시는 것입니까?”
루시안의 그 말에, 사라는 하마터면 스스로의 표정을 무너뜨릴 뻔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루시안의 발언이, 사라는 그저 역겹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네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 따위 말을 지껄이는 것이란 말인가. 내가 ‘세르나드’의 성을 버리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얻기 위해, 무슨 희생을 감내하였는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루시안의 그 말에 사라는 아주 살짝, 눈썹을 위로 치켜뜨며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쉴 새 없이 요동치는 두 눈동자와, 한심하기 짝이 없는 면상이 그녀의 두 눈에 들어온다. 루시안을 구성하고 있는 어떠한 요소 하나조차도 그녀의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그래, 어느 것 하나 조차.
“...저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세르나드 백작가에는, 저 같은 비천한 계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귀한 아가씨가 한 분 계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 고귀한 인형으로 살아야만 했던 구차한 삶이었다. 나는 자유의지 따위 없는 꼭두각시였으며, 누군가에게 팔아 넘겨지기 위한 상품에 불과했었다.
“그리고 최근, 그 분께서 흔적도 없이 실종되셨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라는 ‘인형’이 한 명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 자유를 위한 탈출이었다. 그저 행방불명으로 처리 되는 것으로 족하다 생각했거늘, 내가 잘못 생각했었다. 그 날, 그 숲에서 ‘사라 세르나드’는 죽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자신을 기억하고 이렇게 질척하게 덤벼드는 남자 따위는 없었을 지도 모르는 노릇이거늘.
“소공작님께서 제게 어떠한 의도로 말씀하시는 것인지 알아들었습니다. 매우 건방진 일이기는 하지만, 하찮기 그지없는 저와 세르나드 백작가의 고귀한 그 분의 생김새가 아주 많이 닮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공작님께서 이런 하찮은 계집을 붙들고 존칭을 사용해주시는 것을 보니 말입니다.”
불쾌하다. ‘사라 세르나드’는 이제 과거의 망령에 불과하다. 과거의 나 따위, 제발 누군가가 알아보지 않아주었으면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전부 소공작님의 착각임이 틀림없다 생각합니다. 저는 본디 길거리에서 굴러다니던 하찮은 계집으로서, 에스텔 소공작님이 거두어주신 끝에 이곳에 있는 비루한 계집에 지나지 않습니다. 소공작님께서 말을 높일 대상도 아닐뿐더러, 이토록 배려를 해주실 대상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제게 승은(承恩)을 입히실 생각이셨던 것입니까?”
승은이라는 적나라한 말에 루시안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도련님의 작태를 바라보며, 사라는 속으로 혀를 한 번 차고 말았다. 아무래도, 음흉한 속내를 품고서 자신에게 접근을 했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마음에 든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었지만.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투르니젠 소공작님.”
‘투르니젠 소공작님’이라는 단어에 특히 악센트를 넣으며, 사라는 이번에야말로 루시안에게서 모습을 돌렸다.
그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옮기던 사라는, 어느새 머리끝까지 올랐던 열이 조금은 내렸음을 인지하며 살짝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화도 나고 짜증도 많이 났던 나머지 엄연한 소공작의 신분인 루시안에게 말을 좀 건방지게 한 경향이 있는 것 같아 후회가 되기도 하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루시안을 향한 자신의 건방진 말투 때문에 카인에게 해가 갈지도 모르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참았어야 했나. 아니, 참았어야 했다. 나 같은 여자 하나 때문에, 그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은 정말 싫었건만-
그런데, 그 때였다.
“...사라, 세르나드.”
그것은,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사라의 귓가에는 왠지 모르게 마치 천둥과도 같은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간다. 그 시선의 끝에는, 어느 한 여인이 벽에 자신의 몸을 삐딱하게 기댄 채로 사라를 쏘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는 구면이지. 그렇지 않은가?”
사라 또한 잘 알고 있는 여인이었다. 아니, 잘 알 수밖에 없는 여인이라 표현하는 것이 적당하리라. 그녀가 어찌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제국의 유일한 황녀,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를-
“제국의 달을 뵙습니다.”
사라가 황급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음에도 황녀의 표정은 변할 기색을 비추지 않는다.
“인사는 되었다. 사라 세르나드. 카인이, 너를 이곳에 데리고 온 것인가?”
원래는 가만히 있으려고 했다. 저 여자가 원하는 대로, 없는 사람처럼 취급을 해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저 광경을 보아하니 한 마디를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사라 세르나드가 루시안 폰 투르니젠에게 꼬리를 치는 모습만큼은, 도저히 가만히 흘러 넘길 수가 없었다.
“...저는, 사라 세르나드가 아닙니다. 저는 소공작께서 데려온...”
사라가 더듬거리며 변명을 하려 하자, 황녀는 그녀의 말을 중간에서 뚝 하고 잘랐다. 더 이상의 변명은 용인하지않겠다는 추상과도 같은 태도였다.
“농은 적당히 하거라. 사라 세르나드. 이 내가, 너를 잊어버릴 것이라 생각했던가?”
머리색과 눈동자 색이 변해도, 인상이 미묘하게 변해도, 그 끝에 이름을 버리더라도, 이 내가 너를 잊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 날, 제도의 테라스에서 너와 카인이 어떠한 밀회를 가지고, 어떠한 밀어를 속삭였는지, 내가 이 두 눈 안에 똑똑히 담아내었거늘. 어디서 내게 거짓을 속삭이려고 하는 것이더냐. 사라 세르나드.
“...저하, 저는 그저 미천한계집에 불과합니다. 소공작님과는 어떠한 관련도-”
사라의 다급한 변명에, 황녀는 스스로의 입가를 아주 살짝 들어 올리고 말았다.
“아니, 있다. 그것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차라리 어떠한 관련도 없었으면 좋았으련만.
- 경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나? 약혼녀였던 여자가, 다른 사내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보고도 그녀를 용서할 수 있는가?
- ...사랑했으니까요. 그리고, 이제는 다 끝난 일인데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는 이리 말했었다. 그녀를 사랑했다고. 그리고 어쩔 수 없는 노릇이노라고. 하지만 그리 말을 하는 그는, 결코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아니,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무척이나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단 말이다.
...그것이 싫었다. 그렇기에 나는 저 여자가 싫었다. 네게 아픔을 안겨준, 저 여자가 싫었다.
“한 가지 충고하지. 사라 세르나드.”
사라의 속내를 잘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일부로 ‘세르나드’라는 말을 강조한다. 마치, 죄인에게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라도 찍는 것 마냥.
“카인을 져버릴 예정이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그리 말을 하거라. 과거의 네가 그리하였던 것처럼, 카인의 곁에 있다가 투르니젠 소공작에게로 갈아탈 작정이라면 지금부터 그 속내를 드러내란 말이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너는 어째서, 너를 한 번 배신한 여자를 이리도 가까이 거둔 것일까. 배신당해봤으면서, 이 여자에게 왜 믿음을 주는 것일까. 대체, 어째서.
“그것이 힘들다면, 과거와 같이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곁에 있다가 그를 배반할 생각이라면-”
“너는 결국, 너는 네가 그토록 증오하는 그들의 피를 이어받았음을 증명하는 꼴밖에 되지 않을 테지.”
사라를 향한 황녀의 목소리에, 비웃음 따위 없었다. 그저 어떠한 결의와, 엄숙한 심판만이 깃들어 있을 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라를 뒤로 한 채, 황녀는스스로의 신형을 돌린다. 사라 세르나드를 향해, 자신 같은 여자가 이런 말을 할 자격 따위 없다는 자조어린 비웃음을 흘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