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12. 흐르는 별 - 02
“...저하, 그리고 아리엘.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제게 설명을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대낮부터 에스텔 공작가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폭음에 놀라 현장으로 황급히 달려간 카인의 눈앞에 비춰지고 있는 그림은 실로 이상한 구도라고 칭할 수밖에 없는 기묘한 광경이었다.
“...히끅. 카, 카인...”
한 쪽에서는 가만히 듣고만 있는 사람이 다 서러워 질 정도로 훌쩍거리며 울고 있는 아리엘의 목소리가 장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언제나 정숙한 태도를 유지하며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우고 있던 아리엘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장면은 비단 카인뿐만이 아니라 평소에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장면임이 틀림없었다.
“...이런 뱀 같은 교활한 년이...”
그리고 다른 한 쪽에서는 서럽게 울고 있는 아리엘이 실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채로 그녀를 향해 자욱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는 아이리스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리엘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과 동시에 마치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카인이 이 자리에 들이닥치는 꼴을 보며 아이리스는 자신이 아리엘에게 거나하게 한 방 얻어맞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저 계집이 살모사와 같은 교활한 년이라는 것을 세상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주제에 한 순간이나마 방심을 해버린 자신의 잘못이 가장 크다고 해야할까.
이 되도 않는 역겨운 연극을 펼침으로서 아리엘이 얻는 것은 실로 많을 것이다. 보라. 저쪽에서는 스스로가 피해자임을 자처하는 교활한 계집이 눈물을뚝뚝 흘리고 있는 반면, 자신은 그 경위야 어떠하건 간에 저 계집을 향해 폭력을 휘둘렀다는 정황이 이리도 똑똑히 남아 있는, 명실상부한 사악하기 짝이 없는 악역이 되어버리지 않았던가? 제반 사정을 알지 못한 채 연극의 클라이맥스만을 감상한 유일한 관람객인 카인이 보기에 이보다 더 명확한 선과 악의 대립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리라.
설사 아이리스가 카인을 향해 지금까지 그들 사이에 오고갔던 대화를 숨김없이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카인은 아이리스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 구질구질한 변명을 늘어놓는다고만 생각할 뿐,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꿰뚫어보지는 못하겠지. 적어도, 저 쪽에서 아리엘이 계속해서 즙을 질질 짜고 있는 이상 진실이 밝혀지는 것은 요원한 일이겠지.
어쩌면, 카인은 아이리스라는 여자가 추하게 거짓만을늘어놓을 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르는 추악한 여자라고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지금 이 순간, 아이리스는 섣부르게 입을 열어 변명을 늘어놓지도, 그렇다고 다른 행동을 취하지도 못하는 이상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그래, 비유하자면 자신은 체크메이트와 같은 상황에 놓인 것이 틀림없으리라-
“...저하, 설마 아리엘을 향해 직접 손을 쓰신 것입니까?”
카인은 아리엘이 주저앉아 히끅거리며 울고 있는 땅바닥의 바로 옆에 선명하게 나있는, 대지를 아로 지르는 참혹한 흉터를 가리키며 그러한 질문을 던졌다. 아이리스를 바라보는 카인의 두 눈에는, 아주 약간이지만 그녀를 향한 책망의 시선이 담겨 있었다.
“저하. 저는 당사자가 아니니 저하께서 아리엘과 어떠한 대화를 나누셨으며, 그 과정에서 두 분 사이에 어떠한 마찰이 일어났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감히, 제 눈앞에 있는 결과만을 가지고 저하께 한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카인, 넌 저 빌어먹을 여자한테 속고 있는 거라고. 저 여자는 네 앞에서 지금 연기를 하고 있는 거라고.
“후우, 저하. 아리엘과 대화를 나누시며상당히 화가 나셨던 것은 이해가 가지만 이것은 조금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저하와 아리엘 사이에는 무력의 차가 심하지 않습니까? 저하께서는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절정의 검사이신 반면, 아리엘은 그저강한 신성력을 보유하기만 했을 뿐 본신의 힘은 강하다고 말할 수 없는 연약한 성직자이지 않습니까?”
“...연약한 성직자?”
카인의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말에 아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황당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말았다. 저 계집이 연약하다고? 체술(體術)로만 따진다면 자신보다 한참이나 앞설지도 모르며, 원정대 시절 두 주먹만으로 온갖 마물들의 머리통을 부수고 돌아다녔던 저 여자에게 과연 ‘연약하다’라는 말이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란 말인가?
‘내 앞에서는 무기를 쓰면 손맛이 느껴지지 않는다며 쫑알거리던 년이...’
그러고 보니 저 여자가 카인 앞에서는 왠지 모르게 새침이나 떨면서 그저 신성력으로 치유하는 모습만을 자주 보이더니, 그게 다 자신을 연약한 여자로 포장하려는 사악한 계략의 일환이었다는 것일까.
그 끝을 알 수가 없는 아리엘의 음험함에 아이리스가 몸을 부르르 떨고 있을 무렵, 카인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아직까지도 훌쩍거리고 있는 아리엘을 향해 몸을 돌렸다.
“괜찮으십니까, 아리엘?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아리엘의 두 눈에서는 절찬리에 즙이 흘러넘치고 있는 와중이었다. 회귀 전과 이번 생을 통틀어 아리엘이 우는 모습을 처음 보는 카인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사실, 남자라는 생물은 눈앞에서 여자의 두 눈에서 눈물이 새어나오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법이었다. 그것이 아리엘 정도의 미인이라면 그 효과가 더더욱 극대화되기 마련이었고.
“...히윽, 카인. 그러지 마세요. 황녀 저하께, 뭐라 그러지 마세요. 저하께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으세요. 전부, 제 잘못이에요. 히윽...”
“....네?”
순간, 아이리스는 아리엘이 더더욱 커다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 채고야 말았다.
“전부, 전부 제 잘못이에요. 흐으윽... 저, 저 같은 비천한 여자가, 제국 내에서 신분의 정점에 위치해 계신 고귀한 황녀 저하와 말을 섞는 것 그 자체가 무례했던 일이 틀림없어요... 죄송, 합니다... 황녀, 저하... 제가, 죄송...”
말을 하는 와중에 목이 메이기라도 한 것인지 아리엘은 몇 번이나 꺽꺽거리면서도 용케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의 목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서러운 울음소리는 자신의 알량한 신분만을 앞세워 순진무구한 성직자를 핍박했던 사악한 제국의 황녀와,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잘 것 없는 자신하나 때문에 이 일이 커지게 될 것을 두려워 가해자를 향해 잘못했다고 고개 숙여 사과를 하고 있는 가녀리고 힘없는 성직자의 대비되는 구도를 명확하게 잡아주고 있는 중이었단 말이다.
‘...아리엘, 이계집이 나와 정말 끝까지 가보려고 하는 것인가?’
아리엘의 주둥이에서 사죄를 가장한 모함이 튀어나오는 꼴을 보며 아이리스는 자신의 손을 부들부들 떨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눈앞에서 일어나는 광경이 그저 황당하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더욱 황당한 것은 이런 엿 같은 상황이 자신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엿 같은 현실이었다. 무력으로 맞붙는다면 상대도 되지 않을 년이 교활하게도 이 따위 방향으로 노선을 틀어 자신을 향한 공격을 감행하려 들다니!
“...히윽, 끄윽. 소란, 피워서... 죄송, 해요... 히끅. 다, 제 잘못, 이에요... 히윽...”
“.....”
그 와중에 이제는 정말 자신이 피해자라고 여기는 것인지 혼신의 메소드 연기를 펼치고 있는 아리엘.
“아리엘. 이제 진정하세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서럽게 울어 제끼는 아리엘을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것인지 카인은 아리엘은 살며시 안아주며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마치 어린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부모와 같은 모양새였다.
“...킥.”
그리고 아리엘이 카인의 품에 안긴 그 순간, 아리엘은 카인의 시야가 미치지 않은 곳에서 아이리스를 향해 피식하고 미소를 흘렸다. 그것은 아이리스를 향한 명백한 의미에서의 국지적 도발임이 틀림없었다.
“...이.”
부르르.
그 꼬락서니를 보아하며 아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아리엘을 향해 ‘하늘의 검’을 날릴 뻔했다. 아니, 그간 검술을 수련하며 쌓아온 정신 수양이 아니었다면 분명히 검을 휘둘렀으리라.
“...저하. 저하께서 아리엘과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쯤은 저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제도의 연회장에서부터 시작해서 에스텔 공작가에 이르기까지 둘이 얼굴만 마주했다면 서로를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기 바빴는데.
“하지만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이렇게 물리적 상해를 입힐 지도 모르는 일은 자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 입장에서 보자면, 저하나 아리엘이나, 모두 지난 1년간 생사고락을 함께한 소중한 사람들이니 말입니다.”
“...히끅, 저는, 카인의, 말에 따르도록 할게요. 히윽.”
펑펑 울어제끼는 와중에도 옆에서 시누이마냥 카인의 말에 추임새를 넣는 아리엘.
...후회했다. 무엇을 후회 하냐면, 저 계집에게 검을 휘둘러 반 토막을 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차라리 저 계집을 베고 나서 카인에게 이러한 말을 듣는다면 억울하지라도 않았을 것을.
“...내 명심하도록 하지.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네.”
다음부터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저 계집을 끌고 가 족쳐버릴 것이니까.
카인을 향해 그리 말을 하며 아이리스는 아직까지도 카인의 등 뒤에 숨어 고개만을 빼꼼 내민 채로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고 있는 아리엘을 싸늘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개 같은 년. 어디 한 번 해보자 이 말인가.
그래, 어차피 나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마음 먹었으니까. 좋아. 전쟁 시작이다. 빌어먹을 계집 같으니.
****
“...오늘따라 공작가가 굉장히 소란스럽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
에스텔 공작가의 별채 부근. 그곳에 위치한 연무장에서 에스텔 공작가의 훈련을 봐주고 있던 루시안이 호기심을 참지 못해 그리 중얼거리자 그의 옆에 서 있던 기사 중 한 명이 그를 향해 답변을 해주었다.
“소공작님께서 데카라즈난 공작가에서 오랜만에 돌아오셨다더군요. 소공작님에 대한 환대의 준비를 하느라 이토록 번잡한 소음이 울려 퍼지는 듯 합니다.”
“흠, 에스텔 소공작이 드디어 돌아온 것인가.”
하긴, 데카라즈난 공작가로 떠난 지 벌써 수개월이 흘렀는데 이쯤 되면 돌아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기는 했었다. 더군다나, 최근에 데카라즈난 공작가에서 일어난 거대한 ‘소동’을 생각해본다면 더더욱 그곳에 마음 편히 남아 있을 수만은 없었겠지.
‘...사라 양.’
자신의 영원한 짝사랑 대상이 괴한에게 납치가 되었다는 가슴 아픈 소식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며 루시안은 자신 앞에 모여 있던 기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겠다. 남은 시간은 각자 재량껏 훈련에 임하도록.”
에스텔 소공작이 다시금 공작가에 복귀를 하였으니 식객인 자신 또한 카인에게 다가가 안부 인사를 전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일터. 또한, 카인이 데카라즈난 공작가에서 대체 무엇을 얻어가지고 온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었고.
그렇게 루시안은 카인을 만나보기 위해 기사 한 명만을 대동한 채로 살그머니 연무장을 빠져나와 본성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걸어가려고 하였지만 그 전에 그의 눈길을 사로잡는 어느 한 여인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
루시안이 있는 곳에서는 여인의 뒷모습 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러 꽃들을 배경으로 삼아, 여유로운 태도로 화원을 감상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실로 한 폭의 그림과 같다는 생각이 들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루시안은, 저 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왠지 모르게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여인의 뒷모습과 매우 닮았다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럴 리가 없었다. 그 여인은 저기 보이는 저 여인처럼 흑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양과 같이 빛이 나는 금발의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에스텔 공작가에 저러한 여인도 있었나?”
자신도 모르게 멈춰 서서 여인의 자태를 바라보고만 있던 루시안의 입에서 의문이 섞인 질문이 튀어나오자, 그의 옆에 있던 기사는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순순히 대답을 해주었다.
“아, 저 여인 말씀이시군요. 저도 방금 전에 들었는데, 소공작님께서 공작가로 복귀하는 와중에 거두어들인 인재라고 들었습니다. 장차 공작가의 재무관 역할을 맡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더군요.”
“그런가.”
과연, 저 여인의 정체는 자신이 익히 알고 있던 어느 여인이 아니라 카인이 이곳에 데려온 귀중한 인재였던 것이다. 어디를 보아도 제국의 4대 공작가 중 하나인 투르니젠 공작가의 적자(嫡子)인 자신이 신경 쓸 만한 여인은 아니었다. 그러니, 이대로 무시하고 걷던 길을 마저 걷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루시안은 어째서인지 저 여인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어째서일까. 어째서 저 여인의 뒷모습이,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여인의 뒷모습과 이토록 겹쳐서 보이는 것일까. 대체, 왜.
“...저, 공자님? 어디를 가시는 것입니까? 지금 소공작님께 가는 길이아니었습니까?”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그러한 목소리를 무시한 채, 루시안은 흑발을 한 정체불명의 여인을 향해 조심스레 다가갔다.
한 발짝, 그리고 한 발짝 다가설 때마다, 저 여인의 뒷모습을 이 눈에 선명히 새겨 나갈 때마다 루시안의 심장은 더욱더 세차게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틀림없었다. 설사 평민들이나 입는 후줄근한 옷을 입을 지라도, 머리카락의 색이 바뀔지라도, 짝사랑하던 여인의 뒷모습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그건 그냥 병신이 아니던가. 만약, 만약 자신의 생각이 들어맞는다면 저 여인은 필시-
“...응?”
그리고 자신의 등 뒤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진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차린 것인지, 흑발의 여인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등 뒤에 있던 그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하고 말았다.
“.....”
마치 무기물을 바라보기라도 하는듯한 차갑기 없는 저 눈동자. 오밀조밀하며 아름답기 짝이 없는 저 얼굴. 그리고, 미소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자신이 익히 알고 있던 그녀라는 것을, 루시안은 확신할 수 있었다.
...설마, 설마 했지만. 정말로, 그녀였던 것이다. 그녀는, 살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서서,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루시안의 입에서는, 결국 얼간이와 같은 말이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사, 사라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