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7화 〉11. 둥지 위로 날아간 새 - 09 (107/201)



〈 107화 〉11. 둥지 위로 날아간 새 - 09

“...이, 이건 괜찮으려나...?”

교역 도시 이스타드의 중심부에 위치한 화려한 숙소의 한 가운데. 아리아는 전신 거울 앞에  채로 자신이 무슨 옷을 입어야  것인지에 대해 극심한 고민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데이트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하나 뿐인 주인인 카인과의 데이트. 거기다가 오늘 있을 데이트의 배경은 다름아닌 축제 현장이었으며, 이곳에는 자신과 카인의 데이트에 대해 훼방을 놓을 지도 모르는 잡것들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즉, 잠시 후에 있을 데이트는 온전히 자신과 카인, 둘 만이서 쌓아나갈 오붓한 시간이라는 의미였다.

‘...만약, 어쩌면 오늘 이야기가 잘 풀리게 된다면...’

어쩌면 분위기에 취해버린 카인이, 비앙카 델 카스타나에게 했던 것 마냥 자신을 안아줄지도 모른다. 품어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어떠한 일이 일어날 지에 대해 조금  구체적으로 상상을 해보자면-

“.....”

약간이지만 얼굴에 열이 올라 버렸다. 갑자기 의욕이 샘솟기 시작한다. 우선 카인과의 데이트의 첫 단추를 잘 끼워 맞추는 것은 바로 제대로 된 의상을 고르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되기 마련. 오늘 하루, 아리아라는 여인은 카인의 옆자리에 서 있는 하나뿐인 파트너였다. 장차 에스텔 공작가를 이어 받게  카인에게 결코 누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단 말이다!

짐을 풀어 헤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옷들을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한지 수 차례. 결국 아리아는 최종적으로 곳곳에 프릴이 달려 있으며 끈으로 뒤편을 고정시키는 검은색 플리츠 드레스를 몸에 걸친 후 스스로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 드레스는 과거 제도(帝都)에서의 연회를 대비해, 카인이 아리아에게 선물해주었던 드레스였다.

‘혹시 알아봐 주실까?’

아리아가 생각하기에, 검은색 플리츠 드레스를 택한 이번 선택은 정말 낭만으로 가득 찬 선택임이 틀림없었다. 카인과의  번째 데이트를 장식하는 옷이 바로 그가 자신에게 선물해준 첫 번째 드레스라니!

“...음, 아리아.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때였다. 아리아의 뒤편에 서서 그녀가 하는 행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기만 하던 사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흔들고 말았다.

“아리아의 선택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 드레스는 아리아에게 아주 잘 어울리니까말이에요. 다만...”

“...다만?”

영문을 모르겠다는 아리아의 반문에, 사라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설명을 이어나간다.

“드레스가 너무 귀여워요. 그렇게 곳곳에 프릴과 리본이 달려 있는 드레스라니. 그 드레스, 소공작님께서 아리아에게 직접 사주신 드레스라고 하셨죠?   당시 소공작님께서 아리아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 살짝 알 것 같기도 하네요.”

보나마나, 아리아를 자신이 보살펴야만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고 이런 드레스를 선물했던 것이겠지. 드레스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아리아의 외모는 설사 길거리에 굴러다니던 거적데기를 입혀 놓더라도 그것을 패션으로 승화시킬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사라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아리아가 카인과의 데이트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였으니까.

“그렇게 프릴과 리본으로 장식되어 있는 드레스는, 대체로 어린 소녀들에게 입히는 드레스에요. 그런 드레스를 입고 데이트에 나섰다가는, 소공작님과의 관계에 어떠한 진전도 없을 것이 분명해요.”

아마, 지나가는 사람 또한 카인과 아리아를 보며 데이트가 아니라 삼촌과 조카 정도의 관계라고 생각할 지도 몰랐다. 아리아의 외모는 1년 전과 비교해 많이 성숙해지긴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풋풋한 구석이 남아있었으니까.

“아리아. 소공작님께 한 명의 여자로서 보이고 싶었던 것 아니었나요?”

사라가 조용히 타이르듯 아리아에게 그리 말을 하자, 아리아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걸치고 있던 드레스를 천천히 벗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이 드레스는 카인이 자신에게 처음으로 선물해준 무언가였는데...

그러한 아리아의 싱숭생숭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라는 자신의 짐가방 안에서 드레스 하나를 꺼내들었다. 전체적으로 새하얀 색감의, 어깨가 전부 노출되어 있는 오프숄더 드레스였다.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사놓고서 단 한 번도 입지 않았던 드레스였지만, 왠지 모르게 아리아에게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사라가 건네준 드레스를 걸친 아리아의 모습이 사라의 눈에 비춰진다. 마침 숙소에 설치되어 있는 마법조명 아래에 반사가 되어, 아리아의 새하얀 어깨와 팔이 환하게 비춰지고 있었다.

“...잘, 어울리네요.”

사라는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말을 중얼거리고 말았다. 같은 여자인 사라가 보기에도, 새하얀 드레스를 걸친 아리아의 자태는 실로 아름답기만 할 뿐이었다. 아리아의 전체적인 자태에서는, 어딘가 모르게 존귀한 기품이 새어져 나오고 있었다. 사라는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존귀한 느낌을 주는 여인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제도의 연회장에서 제국의 황녀인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를 바라보았을 때, 이런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었단 말이다.

‘...그러고 보니, 기억을 잃어 자신의 출신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였지.’

혹시 그녀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귀족가의 사생아 출신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평범한 여인이 어찌 저런 기품을 가질 수 있는지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았다. 저러한 기품은, 후천적으로터득할 수 있는 무언가가 절대 아니었으므로.

“여기에 앉아보세요. 아리아.”

사라는 전신거울 앞에 의자를 하나 놓아두며 아리아로 하여금 그곳에 앉게  후, 그 앞에 서서 아리아의 머리카락을 차근차근 빗어주기 시작하였다. 아리아의 새하얀 머리카락은 흡사 은을 녹여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될 정도로 매끄럽고 아름다웠지만, 평소에 제대로 된 관리를 하지 않은 것인지 어딘가 모르게 단정치 않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사라는 한  가문의 시녀들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을 그대로 떠올리며 아리아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매만지기 시작하였다.

스윽-

아리아의 머리카락은 정말 보드랍고 푹신한 느낌을 안겨다 주고 있었다. 사라는 아리아의 머리를 천천히 빗어주며, 자신이 그녀에게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을까에 대한 약간의 고민을 거친 끝에, 아리아에게 무엇을 해줄  있을지 떠올리고 말았다.

이내 마음을 굳세게 먹은 사라는, 스스로의 목소리가 떨려나오지 않도록 유의를 하며, 아리아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소공작님께서는, 시끌벅적한 것을 그리 즐기지 않으세요. 그러니 축제기간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사람들이 많은 곳은 피하는 것이 좋아요.”

기억한다. 과거, 카인이 자신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을 때 그러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다. 카인은 함께 밖을 거니는 것보다는, 둘이 함께 앉아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것을 더욱 좋아하였다. 그와 함께했던 그 때의 추억을, 지금 여기서 다시 한  되살려 본다.

“소공작님께서는, 야채를 그리 즐겨 드시지는 않으신답니다. 만약에식사를  일이 생긴다면, 최대한 그 쪽은 피하시는 것이 좋으실 거 에요.”

기억한다. 너와 식사를 함께하곤 하던 그  그 시절, 너는 내 앞에서 멋진 모습만 보이려고 잘 먹지도 못하는 아채를 입에 꾸역꾸역 넘어 삼키곤 했었지. 나중에 에스텔 공작님에게서 네가 실은 입이 짧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찌나 웃었던지, 아직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다.

“소공작님께서는, 아닌 척 하시지만 손을 잡는 것을 좋아하세요. 기회가 된다 싶을 때, 손을 살며시 마주 잡으면 아마 뿌리치시지는 않을 거에요.”

기억한다. 너와 약혼식을 치른 후, 어른들 앞에서 약혼자의 티를 낼 때마다, 너는 내 손을  하고 잡는 것을 좋아했다. 너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내 손을 잡은 네 손에 힘이 살며시 들어가 있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소공작님께서는...”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어느새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너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누군가와 나누고 있자니, 지난날 너와 함께했던 시간과 기억과 추억이, 이토록 생생하기만 하게 느껴진다. 마치, 금방이라도 흘러 넘쳐버릴 것만 같이.

그  당시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 넘겼던 시간들이었지만, 어째서 지금은 이렇게 손만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이 아른 거리는 것일까. 지금의 내가, 이토록 공허하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스스로가 추하기 짝이 없게 느껴졌다. 그 날, 그 숲에 그에게 구원받은 이후 자신은 스스로에게 굳세게 맹세하지 않았던가. 그를 마음에서 놓아주기로. 더 이상 그를 생각하지 않기로. 평생, 그에게 속죄하면서 살아가기로.

그런데, 어째서 나는-

“카인, 아니, 소공작님... 아니, 그러니까 카인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어느새  수가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리고 말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의 언어가 되지 못하고 그저 신음성이 되어 허공에 나풀거리기만  뿐이었다.

어째서, 나는 아직까지 너에 대해 이렇게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과거의 나는, 너와 함께했던 그 시간들을, 시시하기 짝이 없던 시간이라 생각했었던 것이 분명한데.

지금의 나는, 어째서 네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이 취향인지, 무엇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지.

그런 시시한 것들만 잔뜩, 잔뜩 떠올리고 있음에도, 이리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일까.

“...소, 공작, 님은...”

카인, 나는 널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데, 혹시너는 나에 대한 무언가를, 조그맣게나마 기억을 해주고 있을까.

네게는 과연, 나라는 여자가 어떠한 의미로 남아 있는 것일까.

“...그 분, 께서는...”

카인. 사실은 말이지, 나는 아리아가 부러워. 그것도, 너무도 부러워. 그녀는 현재, 오직 자신의 능력만으로, 네 옆자리에 있을 자격을 성취해내고 말았으니까.

...실은, 내가 그 자리에 있고 싶었다. 아리아 대신, 내가 네 옆에 서 있고 싶었다. 그렇게 되지 못한 자신이, 너무도 싫기만 하였다.

한 때는 자유를 그토록 원하였건만, 이제와 자유가 싫어졌다.

차라리 새장 안에 갇힌 새였을 시절의 ‘사라 세르나드’라면  옆자리에 있을 자격이 충분하지 않나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돼. 그것을 위해, 그가 무엇을 희생했는지 잘 아니까.

아리아의 머리카락을 빗어주던 그녀의 손이 질투심으로 인해 부들부들 떨려온다. 추했다. 눈앞의 이 하얀 머리 소녀는, 어떠한 잘못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마음이 터무니없이 약해빠진 것에 불과할 뿐.

금방이라도 터져 나오려는 무언가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사라는 떨려오는 입을 가까스로 떼어낸다.

“아리아. 카인, 아니, 소공작님을...”

말이 나오지 않는다. 목구멍에 무언가가, 얹힌  같다. 그녀는 가까스로 목울대를 넘기며, 말을 내뱉을  있었다. 말하기 싫었지만, 해야만 하는 그 말을. 저미어오는 가슴의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을 한다.

무섭다. 아리아가 자신과 같이 되지 않도록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과, 카인이 정말  소녀를 사랑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공존한다. 정체를 알  없는 검은 무언가가, 가슴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대체-

“...잘, 부탁드려요.”

마지막 남은 모든 인내심을 그러모아, 사라는 아리아를 향해 힘없는 미소를 짓는다.

사라라는 여인은, 카인이라는 남자가 언제나 행복했으면 한다. 다른 건 몰라도, 그녀는 한 점의 거짓도 없이, 카인의 행복을 기원하기만  따름이다.

그러니, 그가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 설사, 자신이 그의 옆에 서지 못할 지라도. 그의 옆에 다른 여자가 있을지라도. 그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다른 여자가 될 지라도. 그것 하나면, 충분했다.

...그래. 그거 하나면, 그녀는 충분했다.

그래,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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