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11. 둥지 위로 날아간 새 - 06
“좋아. 네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함부로 꺼낸 것에 대해서는, 사과하도록 하지.”
어차피, 그는 네 시시한 소꿉놀이용 ‘가족’이기 이전에 나의 하나 뿐인 반려자일 뿐이니까. 네가 아무리 용을 쓴다고 한들, 나야 말로 그가 평생을 약속한 여자라는 사실을 넌 평생토록 알지 못하겠지. 내 기준에서 보자면 넌 어차피, 그가 하룻밤 가지고 놀다 버릴 시시한 창부에 지나지 않으니까.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의 한 때의 ‘밤놀이’에 전혀 간섭한다는 것은, 참으로 운치가 없는 일에 불과한 일지어니.
“하지만, 내 얼굴에 상처를 낸 것만은 도저히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닌데?”
다른 건 몰라도 남은 일생에 걸쳐 카인이 아끼고 보듬어줘야 할 이 얼굴에 흉을 지게 한 것만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피잉-
아리엘의 귓가에 아주 희미한, 어떠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녀는 그 소리를 들으며, 무언가 팽팽했던 실이 당겨지는 것 같은 소리와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소리와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몸에서 무언가가 떨어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픔 따윈 없었다. 아리엘이 시선을 돌려 그것을 바라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왼팔이었다.
“...너.”
아리엘이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키리에를 바라보자, 키리에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리 답을 할 뿐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관용을 베푼 것이라 생각하는데? 네가 깜빡하고 있는 사실이 한 가지 있는데, 이곳은 엘프들의 거주지인 대수림(大樹林)이며, 나는 모든 엘프들을 통솔하는 지도자인 동시에 세계수의 수호자이기도 하다고. 그런 곳에서 감히 내게 살의를 뿜어낸 것도 모자라, 내 뺨에 상처를 입히기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짝에 쓸모없는 네 팔 한 쪽으로 용서해 주었으니 역시 나는 너무 착해빠진 것이 틀림없다니까.”
뭐가 그리 재밌는지 키리에는 킥킥 웃으며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아리엘의 왼팔을 힐끗하고 바라보았다.
“됐으니까 왼팔이나 주워서 빨리 갖다 붙이기나 하렴. 팔다리가 잘려나가도 가재처럼 새로 돋아나게 하는 것이 네 특기잖아. 하긴, 가재는 식용으로 쓸 수 있기나 하지 너는 그냥 징그럽기만 하다는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정말, 키리에 당신이나 아이리스나 다른 사람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드는데 정말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네. 아니, 살아온 연륜 탓인지 혓바닥을 놀리는 솜씨만 따진다면 당신이 조금 더 능수능란한 것 같기도 하고.”
어차피, 그 따위 상처 따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없앨수 있는 주제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키리에의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물론, 키리에가 관용적이라느니 착하다니와 같은 그딴 개소리가 틀린 말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현재 아리엘이 있는 곳은 대수림. 엘프들이 본연의 힘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는 축복받은 대지이며 더군다나 키리에의 뒤편에는 엘프들의 신수(神樹), 세계수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세계수의 수호자’라는 특성상, 키리에 엘 데나리스는 세계수가 위치해 있는 이 근처에서만큼은 전성기의 ‘겨울의 마녀’에 버금가는 힘을 내는 것도 가능할 터. 방금 전 키리에가 아리엘을 향해 말했던 대로, 자신을 향해 ‘관용’을 베풀어주었다는 저 건방진 말이 마냥 허언은 아닌 셈이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키리에와 정면으로 부딪히게 된다면, 굉장히 높은 확률로 그녀는 패배를 경험하게 되리라.
...그리고, 자신은 이곳에 놀러온 것이 아니었다. 키리에로부터, 반드시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단 말이다. 키리에와 같은 도둑고양이 같은 여자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것이 정말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는 편이 현명한 선택이었단 말이다.
우웅-
아리엘이 아무 말 없이 이를 악문 채로 자신의 왼팔을 주워들어 몸에 가져다 붙이자, 키리에는 그녀가 스스로의 몸을 치유하는 과정을 바라보며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이제야 정상적인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겠구나. 정말, 네가 처음부터 그리 야만적으로 나오지만 않았더라면 좀 더 우아하고 교양 있게 너를 대접해주었을 텐데.”
“...입 다물고 빨리 대답이나 해. 내 아이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그 감언이설은, 대체 무슨 의미로 했던 말이지?”
“역시, 넌 자신의 모든 것을 여신께 귀의한 성직자라 떠들고 다니는 주제에 이런 순간에는 네가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에 충실하기만 하구나. 뭐, 좋아. 그러한 모순 또한, 상당히 향기롭고 감미롭게 느껴지기도 하니까.”
“.....”
“그래,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키리에는 마치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할머니마냥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그러니까 인간들이 신화시대(神話時代)라고 부르던 그 당시, 지상에 네 여신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니?”
“봄의 아르벨, 여름의 클라리스, 가을의 세피아, 겨울의 아리아. 이 네 명의 여신을 말하는 거야?”
신화시대에 지상에 여신들이 현현하여 인간들을 보살폈다는 것은 비밀이랄 것도 아닌 사실에 불과했다. 당장 성전을 펼쳐보기만 하더라도 바로 첫 페이지에 그러한 내용이 담겨 있었으니까. 다만 천 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 그것은 단순한 신화의 영역에 걸쳐 있는 이야기로 남아있을 뿐.
“그러면, 네 명의 여신 중 현재는 봄의 여신 아르벨만이 남아 있는 이유는 알고 있니? 또한, 다른 세 여신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어버린 이유에 대해서는?”
키리에의 말에, 아리엘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눈살을 찌푸린다. 이 여자는 지금 자신과 신학(神學)과 관련해서 토론이라도 해보려는 작정인 것일까.
“성전에 의하면, 여신 아르벨을 제외한 나머지 세 여신은 지상에 따스한 봄만을 남기기 위해 스스로 귀천(歸天)하는 방향을 선택했다고 나와 있어. 또한, 여신 아르벨께서도 자신의 아이들의 성숙한 성장을 위하여 믿음의 증표인 신성력만을 남긴 채 하늘 위에서 모습을 감추고 우리를 굽어 살펴보고 계신다던데.”
아리엘의 그 말에, 키리에는 그만 까르르 웃음을 짓고 말았다.
“순진하구나, 아리엘. 설마 너는 그 말을 진심으로 신용하고 있는 것이니?”
“뭐?”
“차근차근 생각해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헛소리잖아. 사계절 중 봄만을 남겨 지상을 따스하게 만든다고? 사계절의 윤회란 반복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지니는 법. 차갑고 추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이 있기에 비로소 녹음이 싹을 티우는 봄이 더욱 빛나 보인다는 것을, 어째서 너희들은 그리도 쉬이 간과하고 마는 것일까.”
키리에의 그러한 말 속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세 여신이 정말로 귀천하였다면 어째서 지상에는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남아 있는 것이지?”
키리에의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그러한 질문에, 아리엘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런 건 전부 신화에 불과한 이야기야. 법황국에 있는 어떠한 성직자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이야기라고. 애당초 성전이라는 것이 다 그래. 비유와 은유를 섞어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전하려고 하지. 내가 보기에 세상에 존재하는 여신은 오직 아르벨 한 분 뿐이야. 애당초 다른 여신들이 존재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잖아.”
“글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키리에는마치 신탁을 내리는 예언자인 것 마냥 엄숙한 태도로 아리엘을 마주하였다. 키리에의 두 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우리는 알고 있지. 성전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영원한 봄’ 같은 것은 경험해 본 적이 없지만, 그와 비슷한 현상이 세상에 곧 도래하게 된다는 것을 말이야.”
키리에의 그 말에, 아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삼키고 말았다. 그래, 그녀 또한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던가. 끝나지 않는 계절. 계속해서 불어 닥치는 눈보라. 결코 끝이 존재하지 않는,영원한 겨울.
“너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일 테지만, 회귀의 끝에서, 결코 끝나지 않는 겨울은 예외 없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지. 그렇다면 대체 왜, 갑자기 아무런 전조도 없이 ‘영원한 겨울’이 시작되고 마는 것일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아리엘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겨울의 마녀.”
“맞아. 앞으로 몇 년 뒤, ‘겨울의 마녀’는 지상에 강탄(降誕)하게 되고, 우리에게 끝없는 절망을선사할 예정이었지. 이번에는 과거가 너무나도 많이 바뀌어버린 나머지, 그런 미래가 닥쳐올까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
“그럼 여기서 한 가지 질문. ‘겨울의 마녀’는, 대체 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일까. 그녀는 어째서, 대륙에 영원한 겨울을 불러일으킨 것일까.”
...그것은, 지금까지 아리엘이 회귀를 반복하며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회귀 중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겨울의 마녀’는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지. 말하자면 그녀는, 필연적인 존재이자, 현상이며, 일종의 업보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겠지.”
키리에의 말에, 아리엘의 눈초리에는 슬슬 짜증이 감돌기 시작한다. 키리에가 신이 나서 나불거리는 저 따위 이야기와, 자신이 진정으로 듣고자 하는 이야기에는 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이란 말인가?
“그래서? 이제 그만 잡소리는 집어 치우고 본론으로 넘어가면 안 될까?”
“아리엘, 넌 정말 성격이 급하기도 하구나. 그 따위 성질머리를 지니고 있는데 너를 자상하고 온화하다고 믿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정말 불쌍하기만 할 따름이야. 특히, 카인이라던가.”
키리에는 아리엘의 향해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질문. 아리엘, 네게는 네가 주축이 되어 회귀를 했던 세상의 기억만이 남아 있겠지? 예를 들어 아이리스가 주축이 되어 회귀를 했던 세상의 기억 따위는, 네게 없겠지?”
“...그 따위 기억, 애당초 가지고 싶지도 않아.”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만을 아껴주고, 자신만을 사랑해주어야 할 카인이 다른 여자에게 꼭 달라붙어 다른 여자를 사랑해주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말이지, 나는 기억을 가지고 있어. 네가 주인공이었을 때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주인공이었을 때도, 그 때의 기억을 전부 가지고 있다고.”
“...그래서, 지금 자랑이라도 하려는 건가? 아니면, 그만큼 나이를 더 먹었다고 연륜을 뽐내고 싶은 거야?”
아리엘의 뾰로통한 말에, 키리에는 킥하고 웃음을 짓는다.
“아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나는 어째서, 너희들과는 다르게 모든 기억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그리 말하더니 키리에는 자신의 뒤편에 있는, 그 높이가 어지간한 산맥을 뛰어넘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나무를 힐끗하고 쳐다보았다.
“...세계수?”
“그래, 세계수는 모든 시공에 이미 현현하고 있는 존재. 그리고 나는 그 수호자로서 세계수의 은혜를 받고 있는 존재. 설사 시간이 뒤로 되감긴다고 할지라도, 나는 세계수의 수호자인 이상 자신의 연속성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이란다.”
“그런데?”
요약하자면, 결국 세계수의 수호자인 자기가 잘났다는 뉘앙스인 자기자랑에 불과한 말일 뿐이지 않은가?
“의외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구나? 세계수가 모든 시공에 현현하고 있다는 말은, 다시 말해 일정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세계수가 기록하고 있는 당시의 시공 기록을 이 세계에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말이란다.”
“...일정 조건?”
“그래. 예를 들어, 우리 겨울 원정대가 단 한 차례의 예외도 없이 겪었던, ‘필연적 현상’을 열쇠로 사용한다던가... 말이지.”
수차례의 회귀 속에도 한 차례의 예외도 없이 원정대가 맞이해야만 했던 현상. 그 원인. 그것은 바로-
“겨울의 마녀...”
아리엘의 탄식과도 같은 깨달음에, 키리에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리고 지금이라면 십 년 뒤에 ‘겨울의 마녀’가 출현하는 것을 굳이 기다릴 필요도 없지.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그녀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잖아?”
키리에의 말에 아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눈과 같은 하얀 머리를 지닌 채 이 세상에 겨울을 흩뿌렸던 그 악몽 같은 존재는 지금-
“아리엘, 네 아이를 다시 한 번 보고 싶다고 했지? 그렇다면 네가 할 일은 아주 간단해.”
키리에의 요사스러운 말이 아리엘의 귀를 어지럽혀 간다. 그녀의 말은 너무나 달콤한 나머지, 도저히 귀를 뗄 수가 없는 치명적인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네 손으로 에스텔 공작가의 계집, 그가 '아리아'라는 이름을 붙여준 여자를 잡아온 후, 그 여자를 세계수에 제물로 바쳐 버려.”
다시 한 번, 말이 이어진다.
“그 계집의 미래를 부숴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