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2화 〉11. 둥지 위로 날아간 새 - 04 (102/201)



〈 102화 〉11. 둥지 위로 날아간 새 - 04

“...어라, 설마 들킨 건가?”

같은 시각, 현재 카인이 있는 데카라즈난 공작령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대수림(大樹林)에서, 그와 이어져 있는 ‘끈’을 통해 그의 모습을 엿보고 있던 키리에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마지막 순간 카인이 내뱉은 말도 그렇고, 어디까지나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착각이 아니겠지.’

확실했다. 방금 전, 카인과 키리에는 분명히 서로의 시선을 한 차례 교환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카인은 분명, ‘끈’을 통해 자신을 엿보고 있는 키리에의 존재를 눈치 챘던 것이리라. 카인과 키리에의 사이에 이어져 있는 ‘끈’은 키리에에게서 카인에게만 일방적으로 적용되는 편리한 무언가는 아니었으니까.

현재 카인과 키리에 사이를 잇고 있는 ‘끈’은 그들의 종족 간의 차이를 뛰어 넘어 한 쌍의 반려로 묶이게 되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증표. 비록 여러  시간이 되감기며 그들 사이의 연결 또한 많이 약해지기는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결속  자체가 끊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의식하고 있지 않겠지만, 아마 카인이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또한 ‘끈’을 통해 키리에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녀의 모습을 엿보는 것이 가능하겠지.

“이런, 이번에는 내가 많이 조심성이 없었던 것일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이번 생애에서 그가 언제나 곁에 데리고 다니는 하얀 머리 소녀, 아리아의 힘이 그토록 강력해졌다는 것을 미처 계산하지 못했었다. 하얀 머리의 소녀가 데카라즈난 공작가의 숲에 펼쳐 놓은 공간 왜곡 결계가 카인과 키리에의 사이를 잇고 있는 ‘끈’의 연결 또한 일시적으로 약화시킬 정도로 강력한 성능을 자랑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단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반려자가 펼치는 활약상을  눈 뜨고 놓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키리에는 어쩔 수 없이 일시적으로 그와의 연결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카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통해 자신과 키리에가 연결 되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말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키리에가 연결을 통해 그의 모습을 훔쳐보았듯,  또한 키리에와의 연결을 타고 그녀의 기억 몇 가지를 훔쳐보기까지 했으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그 여자와 관련된 기억이라니.”

카인이 보았던 것은 홀로 ‘겨울의 마녀’에 대적하였을 때의 아이리스  데브하르트의모습. 그리고 카인은 키리에로부터 그 때의 그 기억을 끌어올린 것에 그치지 않고  여자의 모습을 자신의 심상(心象)으로 삼아  검술을 현세에 구현시키기까지 하였다. 그 말인 즉 슨, 카인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라는 여자의 검술을 자신의 이상(理想)으로 삼고 있다는 말과 동등한 의미였다는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은 섭섭하기까지  일이었다. 자신의 일생동안 헌신을 다하겠노라고 맹세를 바친 인생의 하나뿐인 반려자가, 스스로의 심상으로 삼은 것이 하필이면 다른 여자의 검술이라니!

기본적으로 키리에라는 여자는 카인에게 그다지 간섭을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그것이 여자 문제라면 더더욱 간섭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키리에에게 있어 세상의 모든 것은 전부 한 때의 흘러가는 바람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를 둘러싼 여자들과 아웅다웅하는  자체가 품위가 떨어지는 일이라 생각을 하고 있었으므로.

인간의 수명은 짧다. 극히 유한하다. 달이 차면 기울고,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넘기지 못하는 것이 세상의 섭리라지만, 엘프인 키리에가 보기에 인간의 일생은 그보다 더욱 부질없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인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아이에서 어른이 되고, 어른에서 노인이 되며, 끝내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생명 그 자체에는 어떠한 의미도 없었으며,  끝은 만물에 공통되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덧없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인간은 하루살이의 삶을 바라보며 정말 부질없노라고 비웃곤 하였지만, 키리에가 보기에 인간과 하루살이 사이에는 별 다른 차이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둘 모두, 시간의 섭리에 귀속되어 죽음에 도달하기 위해 살아가는 생명이라는 공통점만이 존재하였으므로.

하지만, 필멸자에게는 필멸이 예정되어 있기에 깨닫는 지혜가 있다던가. 확실히 그 말 대로였다. 인간은 열정을 지니고 있다. 욕망을 지니고 있다. 극히 유한한 삶을 구가하기에, 스스로의 의미와 가치를 증명하고자 하며 자신의 삶을 각박하게 여기고 한시라도 살아있을 내일을 위해 살아가려 한다.

키리에가 그러한 사실을 깨달은 것은, 카인  에스텔이라는 한 남자를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녀는 알고 있다. 그녀는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몇 번이고 카인의 뒷모습을 보며, 언제나 찰나의 반짝임을 보여주는 카인의 모습에 깊게 매료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끝에 그를 사랑하게 되어 버렸으며, 그를 일생의 반려로서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카인은 키리에를 알게 됨으로서 필멸자가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운명에서 벗어나 버리고 말았다.

키리에의 반려가  카인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시간축에서 반쯤 벗어나버린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 또한 키리에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살아왔던 시간보다 더욱 기나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며, 그 안에서 한없는 지루함과 무수한 권태를 맛보게 될 것이다.

앞으로 그와 키리에가 함께 구가해나갈 시간에 비하자면, 현재의  시간은 정말로 자그마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찰나의 깜빡임에 지나지 않는다. 비앙카 델 카스타나가,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가, 아리엘 티에르가 그와 어떠한 추억을 만들어갈지라도, 그와 몸을 섞은 끝에 그의 아이를 낳을지라도, 그 끝에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지라도, 그녀들이 행할  있는 어떠한 용을 쓸지라도-

그것은 전부, 한 때의 유희에 지나지 않다. 시간의 사토 속에 매몰되어, 빛이 바래게 된 나머지, 끝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기억으로 전락하게 될 허망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단 말이다.

그리고  끝에는, 오직 키리에  데나리스라고 하는 여인만이 카인의 곁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겠지. 그것도, 영원토록.

...허나, 아이리스의 존재가 그의 심상에 각인되었다함은 그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카인이 그 때 보았던 그 ‘아이리스’를 심상에 각인했다함은 그녀의 일검을 스스로가 도달해야하는 이상으로 삼았다는 의미. 설사, 언젠가 아이리스가 죽어  세상에서 사라진다 할지라도, 그녀와 함께 했던 기억이 전부 의미를 잃어버릴 정도로 아득한 시간이 흐를지라도.

카인이 이상으로 삼은 아이리스의 모습은, 그의 마음속에서 앞으로 영원토록 살아 숨 쉬어 나가겠지. 그리고 그 추억이 기초가 되어, 그의 모습을 점차 변화시켜 나가겠지. 왜냐하면 ‘아이리스’의 모습은 이미, 카인의 가슴에 완전히 새겨진 끝에 그의 반신(半身)이 되어버렸으므로.

“...이럴 줄 알았다면, 활 대신 검에 더욱 열중할 것을 그랬나.”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있는 만큼 검을 휘두르는 것에도 일가견이 있는 그녀였지만 이제와 그의 스승이 되어주지 못한 사실에 대해 후회하기에는 이미 너무나 늦어버리고 말았다. 애초에, 카인이라는 인간은 활보다는 검이 더 어울린다며 어줍잖은 충고를 던졌던 사람은 다름 아닌 키리에 본인이었으니까.

결정적으로, 현재 시점의 카인은 키리에의 존재를 상당히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굳이 생명기를 불태워 오러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국면에서 결과적으로 수명을 낭비한 행위는, 자신을 엿보고 있는 키리에를 향한 경고이자 엄포였음이 틀림없겠지.

...하지만, 키리에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어차피, 그녀에게 있어 넘쳐 흐르는 것이 바로 수명이었으며, 고작해야  개월 정도의 수명을 지불한 끝에 영원토록 그녀의 뇌리에 남을 카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면 실로 남는 장사가 아닐 수 없었으니까.

“남편이 바깥에서 큰일을 하는데 아내 된 몸으로서 내조 정도는 해야 하는 법 아니겠어?”

키리에가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의 행동을 열심히 합리화 시키고 있을 무렵, 그녀의 옆에서 키리에를 향한 왠지 모를 뾰족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강타하고 말았다.

“...갑자기 왜 영문 모를 혼잣말을 중얼중얼 내뱉는 것이죠? 나이를먹을 대로 먹은 나머지, 드디어 정신이 돌아버리기라도 한 것인가요?”

참으로 운치가 없으며, 키리에를휘감고 있는  여운을 단번에 날려버리는 듯한 저 싸가지 없는 말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그녀의 반려인 카인과 아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으며, 그녀가 넌지시 던져본   마디에 만사를 제쳐두고 대수림까지 허겁지겁 달려온 성녀, 아리엘 티에르였다.

키리에의 눈치를 실로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없는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말에, 아리엘을 바라보는 키리에의 눈길이 절로 사나워진다. 자신에게 있어 카인과 관련된 추억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지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지금 이 순간 느끼고 있는 여운을 이 따위로 망쳐놓다니-

“정말,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구나. 세계수와 연결이 되어 있는 수호자는, 정신이 불로(不老)가 되는 은혜를 입는단다. 정말, 이래서 무식하면 입이라도 다무는 편이 낫다는 속담을 상기하게 된다니까.”

“어이가 없네요. 모르긴몰라도 속담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살아왔을 당신은 속담을 들먹일 자격이 없는  아닌가요? 아, 속담 자체가 옛날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니까, 세상 누구보다 옛날 사람인 당신에게는 어울리는 것이려나?”

“너야 말로 함부로 나이를 운운해서는 아니 되지 않을까? 육체적인 나이는 다른 여자들과 비슷하지만, 정신적인 나이만을 따지면 다른 여자들보다 훨씬 많잖아.  보통의 인간 기준에서 본다면 이미 아줌마나 다름이 없는 나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넌 회귀에 감사해야 해. 그 나이  먹고도 대외적으로 젊은 처녀 행세를  수 있으니까.”

키리에가 이죽이면서 하는 말에 아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이래서, 대수림에 오기 싫었던 것이다. 아리엘의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 아리엘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 심지어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아리엘 본인보다 더욱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이다.

아리엘은 그 사실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이라고  수 있는 황녀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 앞에서도 고개를 빳빳히 쳐들 수 있으며, 세상에 다시없는 대이적을 자아내는 비앙카 델 카스타나와 정면에서 격돌하는 일이 일어날지라도 단  치의 망설임도 없이 주먹을 치켜  자신이 있건만, 유독 저 나이를 몇 살이나 쳐 먹은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키리에 엘 데나리스 앞에서 만큼은 강하게 나갈 수가 없었단 말이다.

자신보다 강해서가 아니었다. 늙다리를 존중하자는 예의범절이 뼛속 깊이 박혀있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여자의 입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자신과 관련된 이상한 말이 튀어나오는 것이 극히 꺼려질 뿐이었다. 특히, 그 말이 카인의 귓가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런데 예전부터 느낀 사실인데,  저한테는 반말을 하는 거죠? 아이리스에게는 존댓말을 꼬박꼬박 사용해 주는데 말이죠. 설마 인간 세상의 권력에 빌붙어 단물이라도 빨고 싶어서 그러는 것인가요?”

아리엘의 그러한 빈정거림에, 키리에는 의외로 고개를 순순히 끄덕인다.

“뭐, 네가 그렇게 바라본다면 그렇게 해석을  수도 있겠구나.  설마 내가 인세의 예의범절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생각을 하는 거니? 오랜 세월을 살아갈수록 필수적인 것은 완고한 고집이 아니라 세상을 받아들이는 유연성이란다. 그녀는 제국의 유일한 황녀이니, 내가 존댓말을 써준다고 해서 나의 격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수 있지. 그리고-”

“...그리고?”

“데브하르트의 혈통에게는, 나의 존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단다. 이제 와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긴 하지만.”

“하지만 넌, 나의 존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지. 그래서 나는 네게 존대를 쓰지 않는 것이란다. 아리엘 티에르.”

키리에는 실로 재미있다는 듯 킥킥 웃으며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않니? 고작해야 남자 하나 때문에 세상을 통째로 멸망시킨 네게, 내가 과연 존중을 보낼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