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11. 둥지 위로 날아간 새 - 02
“...네 자유를, 앞으로 나를 위해 살아가는 일에 사용하고 싶다고?”
“예,소공작님.”
나의 질문에 단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즉답을 하는 사라. 나는 그녀의 대답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던 나머지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직시하고 말았지만, 나의 시선을 받고 있음에도 그녀의 표정은 어떠한 미동도 일으키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그녀는 진심인 것 같았다.
“.....”
사라의 두 눈에는, 번민 따위 보이지 않았다.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 그녀는 온전한 자신의 의지 하에, 자신이 택한 선택을 나에게 종용하고 있던 것이었다.
“...어째서?”
결국, 나의 입에서는 이런 얼간이 같은 말밖에 튀어나오지 않았다. 기껏 얻어낸 자유였다. 그토록 많은 것을 내버려두고 온 끝에 쟁취한, 소중한 자유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녀가 여행이라도 떠날 것이라고생각했었다. 지금까지 세르나드 백작가 안에 갇혀 새장 속의 인형과 같은 삶을 살아온 그녀였다. 나는 그녀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사라 세르나드라고 하는 한 명의 여인은 자신이 보지 못한 바깥의 넓은 세상을 동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쉬이 눈치 챌 수 있었단 말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내린 선택은 내게 있어 참으로 의외였단 말이다. 그녀는 어찌하여, 기껏 얻어낸 자유를 걷어차고 다시금 누군가의 밑에 종속되는 길을 택한 것일까. 내가 알고 있는 그녀는, 한 번 얻어낸 자유를 자신의 손으로 걷어차버릴 여인이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글쎄요.”
나의 질문에, 사라는 그저 애매모호한 웃음만을 지을 뿐, 내게 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깨닫고 말았다. 내가 아무리 캐물으려고 해도, 그녀는 내게 결코 대답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스스로의 의지로 택한, 이 이야기의 결말이라는 것을.
이내 나는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깨닫고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무래도 에스텔 공작가에 군식구가 한 명 더 늘어났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여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손으로 사라를 구해내었으니, 이 자리에서 그녀를 매몰차게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총관 영감이 좋아서 환장하는 모습이 벌써부터 상상이 가는데.'
수입은 그대로인 반면에 먹여살려야 하는 입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었으니 이번에 돌아간다면 나를 향해 어떤 잔소리를 퍼부을 것인지 막막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건 그렇고, 사라.”
“예, 에스텔 소공작님.”
사라가 나를 향해 방실방실 웃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자,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고 말았다.
“그런데 그냥 예전처럼 반말을 써주면 안될까? 솔직히 말하자면 네가 내게 존댓말을 사용하는 모습은 영...”
도무지 익숙지가 않았다. 아니, 앞으로 살아가며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지난 세월, 그녀와 약혼관계를 유지하며 서로를 향해 말을 터놓고 대화를 한 것이 무려 수년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녀에게 새삼스럽게 존댓말을 듣는다니. 만약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이 광경을 본다면 이건 흡사-
‘내가 특이한 취향을 가진 놈이 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잖아.’
...뭐, 그 속사정이 어찌 되었건 간에, 나는 사라에게서 존댓말을 듣는 것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단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게 있어 사라는 그냥 사라일 뿐, 세르나드의 성을 지녔으니 버렸으니 같은 것은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비록 이제는 신분 차가 막심하게 되었을지라도 그에 연연하지 않고 서로를 향해 말을 터놓는 좋은 친분 관계를 유지할 수 있-
“싫어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을 내놓는 사라.
“...아니, 그러면 적어도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을 때만이라도 말을 터놓는 건 어떻게 생각 하...”
“싫어요.”
“.....”
대체 어째서 내게 존댓말을 사용하기를 이리도 고수하는 것일까. 원래 반말을 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면 반색을 하고 좋아해야하는 것이 정상 아니던가? 아무래도, 예전과 같이 그녀와 말을 터놓고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앞으로 불가능한 일인 것 같았다...
“...그러면, 에스텔 공작가에서 따로 도맡고 싶은 직책 같은 건 있어?”
나를 향한 말투에 대한 문제로 사라를 설득하는 것은 지극히 요원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이내 반쯤 체념을 한 상태로 그녀에게 그리 질문을 던졌다. 처음에는 그냥 에스텔 공작가의 시녀의 직책을 내릴까 생각을 하기도 했건만,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그녀와 같은 고급인력을 한낱 시녀로 부려먹는 것은 인력의 낭비임이 틀림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글쎄요, 저는 시녀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요.”
사라는 눈웃음을 살살 치는 것과 동시에 나의 한쪽 팔을 살며시 끌어안았다.
“...너, 지금 뭐하는-”
“단, 소공작님의 전속 시녀 말고는 하지 않을래요. 저, 이래 뵈도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은 엄청 자신이 있거든요. 세르나드 백작가에서 배운 것이라고는, 이렇게 상대방을 내조하는 방법만 죽어라 배웠었거든요. 뭐, 이제는 이런 식으로 밖에 써먹을 때가 없지만 말이에요.”
뭐가 그리도 유쾌한지 사라가 킥킥거리는 웃음을 짓더니 이내 나의 품 안쪽으로 살그머니 한 걸음 걸어 들어오며 이리 말을 하였다.
“봐요, 지금도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잖아요. 아무래도 소공작님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수적으로요하는 그런 사람인 것 같네요.”
사라는 방금 전의 격전을 치르며 엉망이 되어 있던 와이셔츠의 주름을 펴주며 귓가에 그러한 말을 속삭였다. 그녀의 손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는, 마치 마법과 같이 단정하고 깔끔한 자태로 변모하고 만다.
“...어떤가요? 소공작님. 이 정도면, 저도 상당히 쓸모 있는 여자가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
솔직히 말하자면, 감명을 받고 말았다. 무늬만 전속 시녀이지, 1년이 다 되어 가는 시간동안 죽어라 전속 시녀의 업무를 배웠던 아리아보다 훨씬 더 깔끔하고 정갈한 손놀림이었다. 사라의 말대로, 에스텔 공작가에서 그녀보다 전속 시녀의 임무를 더 능숙히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지.
하지만.
“...음, 그게...”
유감스럽지만 내 전속 시녀 자리는 이미 선객이 있으니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는 것은 어떻냐는 말을 꺼내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우우웅-
나와 사라가 서 있던 바로 앞 쪽의 공간이, 갑작스럽게 일렁이기 시작한다.
“안 돼! 절대로, 안 돼!”
그러한 말과 함께 이 자리에 어떠한 예고도 없이 ‘출현’한 사람은 다름 아닌-
“카인님! 저 여자의 정신 나간 제안에, 정말로 고개를 끄덕일 생각은 아니시죠?”
아리아였다.
...그것도, 아주 많이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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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일렁이는 것과 동시에, 하얀 머리 여자의 날씬한 자태가 갑작스레 출현한다. 일련의 광경을 바라보며, 사라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당혹스런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말았다.
“고, 공간전이(空間轉移)?”
사라 또한 백작가의 영애로서 여러 교육을 받았기에 마학(魔學)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시간과 공간. 그것은 현 시대의 마학으로서는 결코 간섭할 길이 없는 신의 영역이 아니던가. 그런데 공간에 직접적으로 개입을 하는 대이적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행사할 수가 있다니!
물론, 사라가 공간전이에 놀라건 말건 그 따위 사실은 아리아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아리아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눈앞의 저 암캐가 자신의 자리를 탐낸다는 사실 뿐이었다.
‘저 빌어먹을 년이!’
아리아는 사라의 반반한 면상과 카인을 향해 ‘전속 시녀의 직책을 달라’라는 말을 내뱉은 저 혀를 서슬 퍼런 눈길로 바라보고 말았다. 은혜도 모르는 년 같으니! 지금 자신과 카인이 대체 누구 때문에 오밤중에 이런 생고생을 하고 있는 것인지 뻔히 알고 있는 주제에 감히 저 입에서 저 따위 말을 서스럼 없이 내뱉는 심보가 아주 역겹게 느껴지기만 할 뿐이었다. 적어도, 아리아에게는 그리 느껴질 뿐이었다.
‘그 때 저격으로 공녀가 아니라 저 여자를 노렸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현재는 카인이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와중이었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카인의 앞에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착하고 귀여운 아리아’로 남아 있어야 했었으니까.
대신, 아리아는 카인을 향해 고개를 휙 하고 돌리며 울먹이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카인은 그녀의 이러한 표정을 보면 마음이 약해지기 일수였었다.
“카인님! 저 여자의 정신 나간 제안에, 정말로 고개를 끄덕일 생각은 아니시죠?”
결코 그럴 수는 없다. 카인의 가장 가까운 옆에 있으며 그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바로 자신이 되어야 하건만!
“...음, 그게 말이지...”
하지만 카인은 아리아의 말에 섣부르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애꿎은 머리만 긁적이고 말았다.
“이번 기회에 전속 시녀를 그만 두는 것도 괜찮지 않나?”
“...예?”
순간, 아리아의 얼굴과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설마, 카인님께서는 나 같은 것은 이제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그게, 아리아 너는 내 전속 시녀일 뿐만이 아니라 에스텔 공작령의 전속 마법사이기도 하잖아. 최근 들어 아리아 네가 그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느라고 개인적인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좀 걸려서. 차라리 전속 시녀의 업무만큼이라도 사라에게 넘긴다면 네가 좀 더 편해지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
카인의 그러한 말에 아리아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내 개인적인 시간이 부족해 보인다고? 내가 편해지길 바란다고?
카인의 그러한 마음 씀씀이는, 아리아를 정말로 기쁘게 만들었다. 그가 자신을 생각해준다는 사실 그 자체는 아리아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기분은 울적하기 그지없기도 하였다. 정말, 웃기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아리아에게 있어 자신의 기쁨은 자신의 주인인 카인의 기쁨뿐이었단 말이다. 처음에 그녀가 마법을 배우려고 한 동기는 오직 하나, 카인의 도움이 되기 위함이었으며 나중에는 그의 옆에서 얼쩡거리는 비앙카라는 이름의 바퀴벌레를 밟아 죽이기 위해 배운 것에 지나지 않았단 말이다.
아리아에게 있어 마법 따위, 카인에 비하면 그 어떠한 가치도 존재하지 않았단 말이다. 그의 도움이 되기 위해 마법을 배운 것이었건만, 정작 그 마법 때문에 그의 옆에 있지 못한다면 마법을 배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흐응.”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아리아의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라는 입으로 의미심장한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이래 뵈도 눈치 빠른 여자라고 자부하고 있는 몸이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카인의 전속 시녀가 되고 싶다고 그에게 말을 하였던 것이지만, 그 날 보았던 저 하얀 머리 소녀가 자신의 선배 되는 격 되는 인물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기요, 선배님.”
사라는 고개를 푹하고 떨구고 있는 아리아의 곁에 살며시 다가가더니 그녀의 어깨를 톡톡 건드리며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이기 시작하였다.
“저희 잠시 대화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아리아를 향해, 사라는 실로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아무래도 선배님과 저 사이에서는, 나눌 이야기가 꽤 많은 것 같아서요.”
비유하자면, 그것은 간교한 뱀 한 마리가 순진한 어린양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는 듯한 장면 같았다.
...적어도, 카인의 눈에는 그리 비추어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