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11. 둥지 위로 날아간 새 - 01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나고 말았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겨울은 끝이 나고, 어느새 봄이 찾아온 것을 깨달았다.
문득 정신이 드니, 사라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무척이나 밝다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대체 어째서일까. 아직은 밤이고, 하늘도 저리 어둡고 캄캄하건만, 나의 세상은 이토록 환하고 찬란하기만 할 것일까.
...그리고 나의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 중심에, 어째서 네가 서 있는 것일까.
네가 있는 나의 세상은, 더 이상 춥지 않았고, 더 이상 어둡지 않았다. 쓸쓸했던 나의 세계는, 과거의 옛 모습을 감추어버리고 말았다.
...많은 것을 잃어왔다. 줄곧, 무언가를 잃어오기만 한 인생이었다. 사실, 네가 구해주겠다는 그 말을 나는 믿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품었었던 희망은, 언제나 비극으로 끝을 맺어왔었으니까.
어쩌면, 나는 믿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토록 추악한 세상일지라도, 내가 행복할 수 없는 세상일지라도, 이 세상은 최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느끼고 있는 이 절망이, 언젠가는 희망으로 바뀔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믿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 같은 여자에게도 특별한 순간이 다가올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운명을 걸고 도박을 하였다. 네가 나를 구해줄 것이라는 믿음 하에, 나는 나의 인생을 네게 송두리째 바쳤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네가 중심에 놓임으로서 많은 것이 뒤바뀌게 되었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저 네가 중심에 놓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토록 아름답고 풍요로운 세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니까.
이제, 더는 아프지 않았다. 앞으로의 나는, 잃어버렸던 것들과 얻어나갈 것을 저울에 동등하게 달 수 있겠지. 앞으로 계속될 삶을 위해, 나는 모든 것에 웃음을 지으며 ‘안녕’이라고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아.”
기뻤다. 무엇이 기뻤냐면, 모든 것이 기뻤다. 그가 자신을 이리도 생각해 주고 있었다는 것이 기뻤고, 그가끝내 자신을 구해주겠다는 약속을 지켜준 것이 기뻤으며.
그의 손에,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못내 기쁘기만 하였다.
...어째서일까. 나는 지금 기쁜데, 이토록 기쁘기만 할지 언데, 나의 눈에서는 왜 눈물 밖에 흐르지않는 것일까.
네 앞에서는 언제나 예쁜 모습만 보이고 싶었는데, 눈물을 흘리는 이런 모습 따위 네 앞에서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설사 울더라도 정숙한 모습으로 눈물을 훔치고 싶었는데, 나는 어째서 이렇게 네 품 안에 안겨 엉엉 울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카인의 품에 안겨 엉엉 울던 사라는 이내 조금이나마 진정을 되찾은 듯 그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 자신의 얼굴을 한 차례 가다듬는다. 그래봐야 워낙 많이 눈물을 흘린 덕에 두 눈은 충혈이 되어 있고 아직까지도 훌쩍거리는 소리가 카인의 귀에 까지 들려오고 있었지만.
카인은 사라의 그러한 몰골을 보며 손수건이라도 건네주고 싶었지만 이내 자신은 원래 손수건 따위는 품속에 넣고 다니지 않는, 신사가 결코 되지 못할 인간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자각하고 말았다. 뭐, 사라 또한 손수건의 대용이라도 되는 듯 그의 앞섬을 눈물로 흠뻑 적셔놓았으니 따지고 보면 쌤쌤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미안해.”
그 뒤로도 한참이나 훌쩍거린 끝에, 사라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말은 바로 그것이었다.
“뭐가 미안한데.”
“나 때문에, 죽인 거잖아. 나 때문에, 네가 사람을 죽인 거잖아.”
사라는 카인의 가슴을 더듬더듬 매만지며 그리 말을 하였다. 본의가 아니었다만 어찌 되었건 간에 그 둘은 약혼 관계를 무려 몇 년이나 지속해왔던 사이였다. 사라는,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인간이 어떠한 인간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단 말이다.
사라가 아는 카인은, 결코 전사라고는 할 수 없는 남자였다. 검을 쥐는 것보다는 펜을 쥐는 것이 더욱 어울리며, 다른 누군가의 위에 서서 호령을 하는 것보다는 방 안에서 얌전히 책을 읽는 것을 더욱 선호하는 남자였다.
최근 들어 검술을 꽤나 열심히 단련하였는지 대륙에 이름난 강자들을 연이어 격파하였다는 소문을 전해 듣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사라가 기억하고 있는 카인은 어디까지나 유약한 문인 그 자체였단 말이다. 결정적으로, 카인이 행한 것은 어디까지나 결투의 연장선상에 불과했다. 그가 사람을 죽였다는 말 따위, 사라는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그는 자신의 숙부를 죽였다. 지금까지의 불살(不殺)을 깨트릴 만큼, 카인은 사라를 대신해 화를 내주었고, 그녀를 대신해 대신 맞서 싸워주었으며, 끝내 대신 그를 죽여주었다.
...사실은, 그러한 사실에 살짝 기쁘기도 했다. 그와 같이 얌전하고 순한 남자가, 나를 위해 그토록 분노했다는 사실에, 사라의 심장은 살짝 설레기도 하였다.
허나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감정은 오직 하나, 죄책감뿐이었다.
‘전부 나 때문이야.’
사라의 눈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였다. 나는 네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건만, 지금까지 살면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을 그가, 자신 때문에 결국 누군가를 죽이고 말았다. 그녀가 알기로,사람이 누군가를 처음 죽인다면 겉으로는 멀쩡해보여도 그 죄책감이 엄청나다고 하였다. 그러니 카인 또한, 겉으로는 자신을 위로해주고 있을 지도 몰라도 속으로는 끙끙 앓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 아마 확실하겠지. 그는, 상냥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니까.
한편 그렇게 혼자서 끙끙 앓는 사라를 보며, 카인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미래에 공작령을 다스리는 한 명의 영주로서 몇 명의 죄인을 손수 처형해보았을 뿐만 아니라, 빈사상태의 ‘겨울의 마녀’에게 냉큼 달려가 그녀의 심장에 검을 꽂아본 경험이 있다고 자랑스레 떠들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난 정말로 괜찮은데.”
10년 뒤의 미래에서 회귀했다는 사실을 밝히지 못하는 이상 카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결국 이러한 궁색한 변명뿐이었고, 그렇게 서로 간의 오해는 깊어져 갈 뿐이었다.
“아니, 내가 괜찮지 않아.”
그리 말을 하며 사라가 마음속으로 무언가를 굳게 다짐할 무렵, 카인은 이러한 주제로 더 이상 대화를 나누기 싫다는 듯 빠르게 화제를 돌린다.
“그건 그렇고, 너는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할 거냐니?”
사라가 카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해 하고 있자, 카인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근차근 설명을 해나간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갈 예정이냐고. 어디 한 번 네 인생 계획에 대해 들어보고 싶어서 그래."
"...내, 인생 계획?"
“공식적으로 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에게 납치를 당한 후,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식으로 처리가 될 예정이니까. 행방불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가짜 시체를 하나 만들어서 사망자로 처리를 해줄 수도 있어.”
아리아라면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일 감쪽같은 시체를 만드는 것 따위 정말 일도 아닐 테니까.
“그러니, 이제 널 구속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이제 온전히 너의 의지대로 모든 것을 행동해도 괜찮다고. 너는 온연히,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까.”
“그러니 네가 앞으로 만들어나갈 미래의 계획에 대해 어디 한 번 들어보고 싶은데. 나한테 그 정도는 말해줄 수 있지 않나?”
카인이 장난스럽게 하는 말에, 사라는 그만 멍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말았다.
“...자유?”
자유. 그래, 그랬다. 자신은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다. 무엇이든 내 뜻대로 할 수 있고, 나의 의지대로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나의 마음이 가는 곳이면 이제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 자유에 대해 그토록 갈망을 하였지만, 정작 자유를 얻은 이후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닿을 수 없기에 갈망하고 있던 것에 불과했다. 그래, 손에 넣을 수 없기에 더욱 아름다운 것이 있는 것처럼, 밤하늘의 별이 손이 닿지 않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그녀 또한 결코 얻을 수 없는 자유에 대하여 그저 애타게 바라기만 해왔을 뿐이었다.
얼마 전까지의 사라였다면, 분명 카인의 말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하였겠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이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해왔던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망설일 필요 따위, 없었다. 왜냐하면 방금, 그녀에게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 생겨나고 말았으니까. 그래, 정말로.
“...카인.”
사라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카인, 우리가 제도에서 만났을 때의 일, 혹시 기억나?”
“그래, 기억나지.”
“그러면, 너와 내가 테라스에서 나누었던 대화 또한 기억이 나겠네?”
“그것도, 당연히 기억이 나지.”
어찌 기억이 나지 않을 수가 있으랴. 그에게 있어 첫사랑이자 고고의 대상이었던 사라 세르나드가, 사실 타인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뒤편에서는 그토록 암울한 사정을 끌어안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거늘.
“그러면, 네가 나를 향해 마지막에 했었던 말 역시 기억하고 있겠네.”
“...그래, 기억하고 있지.”
그 때의 자신은, 분명 사라를 향해 이렇게 말을 했었다.
- 사라, 나를 위해, 죽어줄 수 있어?
“그거 대체, 나한테 무슨 의미로 말했던 거야?”
사라의 그러한 질문에, 카인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비록 자신이 했었던 말이지만, 이렇게 그녀의 입으로 다시 듣게 되니 꽤나 오글거리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별다른 의미를 가지고 했던 말이 아니기도 하였고.
카인이 그러한 말을 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저, 사라의 각오를 알아보고 싶었다.
그 때의 사라는, 참으로 절박해보였다. 어딘가 모르게 궁지에 몰려 있는 듯 했으며, 자신이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간절함이 가득하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카인에게 있어서도, 세르나드 백작가와 정면으로 부딪힌다는 것은 상당히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10년 전으로 회귀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이었던지라, 당시의 아리아는 지금과 같이 대마법사의 경지에 올라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에스텔 공작가의 귀여운 시녀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카인은 도저히 그녀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버림받은 강아지마냥 자신을 향해 처량한 눈길을 보내오는 그녀를, 도저히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녀를 향해 물었다. 만약 내가 너를 받아들인다면, 너는 현재 네가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내게 올 수 있냐는, 그러한 각오를 그녀에게 물어보았던 것이었다.
“그 때, 나는 네게 대답을 돌려주지 못했었지.”
사라는 자신의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날카롭게 벼려져 있는 한 자루의 단검이었다.
“그 때 하지 못했던 대답, 조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네게 돌려줄게.”
그리 말하며 사라는 자신의 목덜미 뒤에 단검을 가져다 대더니-
툭-
자신의 기다란 머리카락을,아무 망설임 없이 잘라내었다.
사락-
허리까지 내려오던 길이를 지니고 있던 그녀의 머리가, 단숨에 목덜미까지의 내려오는 단발 정도의 길이로, 변하고 말았다.
“...사라, 너.”
그리고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며, 카인은 순간적으로 그녀를 향해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여인이 스스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낸다는 의미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의 정인을 향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의미의 증표로서 맡기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겠노라고 하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맹세.
“카인, 아니 에스텔 소공작님.”
사라는 이제까지 없었던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여 나간다.
“소공작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는 세르나드의 성을 버렸습니다. 지금의 저는 세르나드 백작가의 영애가 아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한 명의 비천한 여인에 지나지 않아요.”
그러니 네게 말하고 싶다. 다른 어떠한 순간도 아닌 진정한 자유를 얻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나의 온전한 의지 하에, 나는 네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소공작님께서는 제게 자유를 선사해주셨죠.”
비록 네가 나의 것이 될 수 없을 지라도, 일평생 너를 보며 홀로 괴로워 할 지라도, 그렇게 평생을 아파할 지라도. 나의 이 마음을 네게 결코 닿지 않을 지라도.
“제가 얻은 자유를, 저는 에스텔 소공작님을 모시면서 사용하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실 수 있나요?”
나는, 네 곁에 있고 싶을 뿐이다.
네가 날 돌아보지 않아도 괜찮아. 그저, 이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마지막으로 전할게. 마지막으로 말할게.
카인.
너를 사랑해. 앞으로도 영원히. 그리고, 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