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10.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 15
“...그런, 터무니없는...”
순간, 중년인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나머지 멍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말았다. 제국의 4대 공작가 중 하나인에스텔 공작가의 하나 뿐인 후계자의 입에서 저런 험악하다 못해 상스러운 소리가 튀어나온다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고작해야 그런 개인적인 동기를 이유로 삼아 ‘사냥개’들을 전부 몰살시켜버린 것이란 말인가?
“왜, 내가 설마 음지에서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세르나드의 ‘사냥개’에 대해 모를 것이라 생각했나? 어지간하면 목숨까지는 거두지 않으려 했지만, 너희 같은 종자들은 살아있을 가치가 없기에 전부 죽여 버렸다. 어차피 살아있어 봐야, 또다시 살업(殺業)을 저지를 것이 뻔한 것들에게 베풀 자비 따위는 없거든.”
“...그렇다면 왜 나를 죽이지 않고 이리 목숨을 붙여두고 있는 것이지?”
“나는 당장이라도 너를 쳐 죽여 버리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내 앞쪽에 순번이 밀려있는지라 그럴 수가 없더군.”
그리 말하며 카인은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사라의 얼굴을 힐끗하고 바라보았다. 그 순간, 사라는 카인이 자신을 왜 그리 바라보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카인.”
그는 지금,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는, 다름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대답을 구하고 있던 것이었다. 무엇을 원하냐고. 어떻게 하고 싶냐고. 그 누구도 아닌, 사라 세르나드라고 하는 한 명의 여인은, 지금 이 순간 어떠한 선택을 내리기를 원하는 것이냐고 그리 고하고 있었다.
“...아.”
문득, 깨닫고 말았다. 자신은 지금, 스스로의 인생에서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을. 이 순간, 그녀가 어떠한 선택을 내리건, 그녀는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혀가 바싹하고 마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중압감이 그녀의 어깨를 짓누른다.만약 자신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고개를 아래로 끄덕이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끝난다. 지금까지 자신을 구속하고 있던 쇠창살에서 해방되어 그토록 고대하던 자유를 맞이하게 되리라.
...하지만, 사라는 자신의 입술을 쉽게 열지 못하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을 보며 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숨을 한 번 쉴 동안 망설여도 보았지만, 끝내 그녀는 어떠한 말을 자아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해낼 수 없었다.
...아니. 정말 그것으로 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을 뿐이다.
여기까지 와서, 사라가 숙부라고 하는 사람에게 혈육의 정을 느끼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녀의 인생 속에서, 자신의 숙부라고 하는 사람은 그저 악몽에불과한 존재였다. 자신에게 관심조차 없는 아버지 대신, 그녀의 ‘훈육’을 담당한 숙부는 교육이라는 명분하에 자신에게 ‘체벌’을 일삼아왔다.
반항은, 꿈도 꾸지 못하였다. 사라는 누군가에게 반항을 하는 법을 배우기 앞서, 가장 먼저 체념하고 순응하는 법부터 익히고 말았다. 그렇게 십수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숙부의 싸늘한 눈초리만 보아도, 그 끝에 거북이처럼 움츠러드는 한심한 자신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사라! 감히, 네가 감히 세르나드에게서 받은 은혜를 이렇게 져 버리고자 하는 것이더냐!”
...그래, 지금처럼.
딱히 그것을 억울하다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저, 사라에게 있어 자신을 둘러싼 세상은 지극히 불합리한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어느 순간부터 당연하게 여기고 받아들이는 자신이 너무도 싫을 뿐이었다.
어릴 적, 그녀는 남몰래 참 많이도 눈물을 흘리고는 하였다. 그저 슬펐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상품’으로 낙점되어,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삶을 구가해야만 하는 자신이 너무도 비참하기만 할 뿐이었다.
처음에는, 노력도 해보았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갈고 닦았다. 그저 스스로의 겉모습을 치장하는 것에만 유념을 두는 귀족가의 여식을 반면교사로 삼으며,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고자 하였다. 그렇게 자신이 쓸모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아준다면, 자신의 손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전부 소용이 없었다. 처음부터 저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원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반반한 몸뚱이 하나뿐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스스로를 갈고 닦고, 얼마나 많은 것을 쌓아올렸는지 따위, 처음부터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라는 자신의 눈물이 메말라버리고 말았음을 깨닫고 말았다. 그녀는, 그렇게 지쳐버리고 말았다.
“사라 세르나드! 너는 세르나드의 핏줄이다! 네가 세르나드의 이름 없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이냐. 지난 20년간, 얌전히 온실에서 화초마냥 길러진 네가, 바깥세상에서 홀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이냐! 자만도 유분수지!”
그렇게, 납득해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운명에 순응해버리고 말았다. 이것도 전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탄식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 현실과 타협을 해버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마음 속 한 구석에서, 남몰래 구원을 바라는 자신이 있었다.
어릴 적 읽은 동화책처럼, 왕자님이 자신을 구원해줄지도 모른다는 허황된 망상을 품고 말았다. 그것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왠지 모르게 그 망상에 가슴을 두근거리고 마는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기나긴 기다림 끝에 내 앞에, 네가 나타났다. 나의 약혼자, 그리고 나의 왕자님. 카인 폰 에스텔. 너의 존재는, 나에게 있어 하나의 기적으로 다가왔을 뿐이라는 걸, 너는 알고 있을까.
“사라. 네 선택을 원한다.”
그래, 무서웠다. 무엇이 무서웠냐면, 네가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간다는 것이 무서웠다. 네가 설사 나를구원해준다고 해도, 나라는 여자가 네게 있어 아무 짝에 쓸모도 없지 않을까라는 사실이, 무섭기만 하였다.
이제와, 네 옆에 거한다고 해서 네 옆자리를 탐할 정도로 뻔뻔스럽지는 않았다. 내게 있어 그럴 자격 따위, 애당초 없었다. 자신은 이미 너를 한 번 져버렸다. 너와 나눈 한 때의 약속을 아무렇지도 깨버렸다. 네가 내게 베풀어준 신뢰를, 먼저 져버린 쪽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단 말이다.
그가 지금 자신에게 내밀어 주는 이 따스한 손길조차, 자신과 같이 사갈 같은 여자에게는 너무도 과분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 이상으로 무언가를 탐하고자 한다면, 그 때부터는 너와 내가 함께한 이 따스했던 시간이, 결과적으로는 저주가 되어버리고 말겠지.
나는 그저, 한 발짝 떨어져 너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내 행복따위, 더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그냥, 네가 내 몫까지 행복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이, 너를 향한 나만의 사랑의 방식이었다.
그러니, 너에 대한 모든 마음은 가슴 속 아주 깊은 곳에 잠근 후, 소중하게 간직하고자 한다. 그저 바라기만 했던 소망에 고맙다는 말을 표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했으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과연 자신에게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기에, 그녀는 그 사실이 그저 무섭기만 하였다.
“...난.”
아무 것도 모르겠다.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태어나서부터 줄곧, 다른 누군가에게 속박되어 오기만 했던 인생이었다. 그런 자신에게 자유가 주어졌지만, 정작 자신은 자유를 눈앞에 두고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인지, 정말로갈피를 잡을 수 없을 뿐이었다.
터벅-
그리고 그런 사라에게 마치 신뢰를 부여하듯 그가 그녀의 곁에 살며시 다가와, 언젠가 입에 올렸던 그 약속을 다시 한 번 자아낸다.
“망설일 것 없어. 그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난, 어떠한 상황이든 네 편이 되어줄 것이니까.”
그리 말하며 그는 자신의 앞으로 한 발짝, 걸어 나선다.
말로 떠드는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자신이 행하고자 하는 모든 죄를 함께 짊어주겠노라고 말없이 고하는 그의 등은, 참으로 씩씩할 따름이었다.
“참고로 한 가지 말해두지. 나는 저 새끼를 죽일 거다. 설사 사라 네가 나를 말린다고 할지라도, 나는 기필코 저 새끼를 죽여 버리고 말거다. 너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니야. 그저, 나와 에스텔 공작가를 모욕한 저 새끼를 살려둘 수는 없기에 그러는 거다. 그러니, 네게 전가될 책임 따위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사라.”
“...그게 뭐야...”
자신에게선택을 맡긴다고 해놓고서는, 이미 결론을 단정 지은 듯한 실로 엉망진창인 그 말에, 사라는 그만 웃음을 지어버리고 말았다.
...거짓말. 사실, 나 때문에 그리 화가 난 것이면서.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무력한 나를 대신해, 그렇게 화를 내주고 있는 것이면서. 카인의 그러한 억지에, 사라는 자신의 가슴을 아려쥐고 말았다. 자신을 향하고 있는 그의 마음씀씀이에,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말았다.
“...카인.”
아아, 따스했다. 너무도 안온했다. 자신은 그로부터, 어딘지 모를 편안함을 느껴버리고 말았다. 비록 자신이 그의 곁에 서는 것이 허용되지 않음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찰나의 순간만큼이라도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에게 기대고 싶었다. 이 순간을, 온전히 독점하고 싶었다.
그러한 그의 마음을 느끼며, 사라는 비로소 자신의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응, 부탁해. 카인...”
사라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카인은 중년인의 배를 걷어찼다. 그 발길질이 어찌나 거셌던지 중년인은 무려 땅바닥을 세 바퀴 반이나 구르고 나서도 그 아픔을 해소하지 못하고,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바닥에 누워 숨을 거칠게 몰아쉬기만 할 뿐이었다.
“크헉! 커허...! 감히, 감히...!”
자신을 증오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 따위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 넘기며, 카인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중년인을 향해 무언가를 내던진다.
쩔그렁-
그것은, 뇌전검 카르벨라와 포션이었다. 중년인이 허리춤에 차고 있었지만, 그가 꼴사납게 바닥을 구르며 어느새 흘려버린 그것을, 카인은 다시 그에게 되돌려 준 것이었다. 포션은, 아리아가 혹시 모르는 사태를 대비해 그에게 들려준 물품이었고.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이냐. 카인 폰 에스텔...!”
중년인이 숨을 헐떡이며 그를 향해 질문을 던지자, 카인은 무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검을 들어라. 그리고, 자세를 잡아라. 발목을 치유하고 싶다면, 치유할 시간을 주지.”
“...뭐?”
카인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여기서 너를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너를 단순히 벌레 짓이기듯 죽인다고 해서, 모든 것이 매듭지어진다는 의미는 아닐 테지.”
일이 결착을 짓기에는 그에 합당한 무대가 필요한 법. 카인은 십수년간에 걸쳐 중년인에게 고통을 받아온 사라가 보기에, 납득할 수 있는 종막을 맞이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지금 중년인을 죽이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심장에 검을 꽂기만 하더라도, 지금까지 사라를 공포로서 옭아매고 있던 저 남자는 손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지.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너무 편안한 죽음이자, 사라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허망한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비록 중년인이 개자식일지라도, 저자는 이 자리의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무대에 올라선 후, 자신의 죄과에 걸맞는 폐막을 맞이해야만 했다. 한 점의 아쉬움도 남지 않는, 그런 결말 만이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지금껏 고통으로 얼룩져온 사라의 인생에 대한 예우였으니까.
미련이라는 것을 알았다. 스스로가 너무도 어리석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억지를 부리고픈 마음뿐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지금은 억지를 부려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거기서 가만히 지켜보도록 해, 사라."
오늘 밤, 나는 너를 진정한 의미에서 구해주도록 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