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10.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 14
“헉... 허억...!”
달린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가득 찬 숲을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금방이라도 파열될 것만 같은 심장의 박동을 애써 무시한 채로, 중년인은 계속해서 앞으로 달린다.
“흐어억...!”
중년인의 등 뒤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느껴지는 것은, 금방이라도 그의 목덜미를 낚아챌 것만 같은 소름끼치는 기척과, 몇 초 후 그를 그대로 잡아 찢어발길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살기뿐이었다. 그렇기에, 중년인은 자신의 등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그에게, 그런 여유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세상 어느 누구라고한들, 자신의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자는 드문 편이었으니까.
“...하, 아....!”
두려웠다. 세르나드 백작가가 자랑하는 ‘사냥개’들의 우두머리가 된 이후, 중년인은 정말 많은 것을 보았으며 온갖 것을 경험해보았다. 오러를 사용하는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자와 검을 나누어 보았을 때도 있었으며, 손끝에서 온갖 경이적인 마법을 피워내는 마법사의 목덜미에 비수를 꽂아 넣었을 때도 있었다. 일반적인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보지 못할, 괴기하며 소름이 끼치는 광경을 목격하였을 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중년인의 시선으로 보아도, 방금 전의 눈과 같이 새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의 존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인 동시에, 불합리의 극치임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그가 익히 알고 있던 모든 상식과 궤를 달리하는 존재이자, 괴물 그 자체였다.
...아니, 저것은 괴물이라는 말로도 도저히 형용할 수가 없는, 상식을 뛰어넘은 무언가임이 분명하였다. 폭풍의 구현이었다. 사람의 몸으로서는 대항할 수조차 없으며 맞서는 것이허락되지 않은, 자연재해의 일종과도 같았단 말이다.
저것을 상대로는 그 어떠한 공격도, 반항도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뼈저리게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방금 전, 중년인은 그녀를 상대로 하여 전력을 다해 뇌전검 카르벨라를 휘둘러보았지만, 그녀가 마치 파리를 내쫓기라도 하듯 손을 한 차례 까닥이자 그의 공격은 전부 무력화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중년인은 하얀 머리 소녀를 향한 모든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겠지. 적에게 자신이 행하는 공격은 전혀 통하지 않으며, 적이 행하는 공격을 받으면 무조건 즉사라는 결론이 나온 시점에서, 그녀와 전투를 벌인다는 행위 그 자체가 어리석은 일에 불과했다. 중년인을 비롯한 사냥개들 전부와, 하얀 머리의 소녀의 사이에는 그 정도의 격차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도주하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자신의 등 뒤에서 사냥개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며, 중년인은 덮쳐오는 불안을 뿌리치기라도 하듯 이를 악물고 숲을 달려 나갔다.
...그리고, 숲의 저 편에서 들려오던 비명소리가 전부 사라져버리고 다시금 적막이 찾아왔을 때, 중년인은 본능적으로 깨닫고 말았다. 그와 함께 이숲에 발걸음을 내딛은 자들 중에서, 아직까지 목숨이 붙어 있는 자는 오직 자신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하.”
사냥개들이 전부 뒈져나간 것 따위, 전혀 애석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길거리에 잡동사니마냥 굴러다니는 고아들을주워다가 만든 소모품에 불과한 존재들이었다. 그런 비천한 것들을 희생하여, 세르나드의 고귀한 혈통인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사냥개들의 비명이 전부 사라진 시점에서, 그 괴물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였다는 점이다-!
“하... 하아...!”
그렇기에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심장이 파열할 것 같은 것을 애써 무시하며 달려갔다.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기척은 시시각각 그의 등 뒤를 쫓아 점차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 그의 기력이 다하는 순간, 단 한순간이라도 발걸음이 늦춰지는 그 순간, 사신은 그의 목덜미를 낚아채고야 말겠지.
느껴진다. 하얀 머리 소녀가 발하는 기척이, 여기까지 느껴진다. 그녀는 중년인에게 자신이 발하는 기척을 숨길 생각 따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애당초, 아리아에게 있어 이 모든 것은 여흥에 지나지 않았다. 사냥에 불과했다. 아리아는 마치 몰이 사냥이라도 하는 것 마냥, 중년인을 어느 한 구석으로 가도록 그를 유도하고 있었다.
자신이 몰이를 당하고 있다는 것 따위, 중년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다른 선택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저 괴물에 따라잡혀 일격에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몰이를 당하는 편이 그나마 낫지 않겠는가-
“.....!”
다음 순간, 그의 등 뒤에서 실로 무시무시한 살기가 폭사한다. 그와 동시에, 대지 그 자체가 비명을 토하듯 부르르 진동한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인가 하며 중년인이 자신의 두 눈을 질끈하고 감은 바로 그 순간-
“...아?”
살기는, 이내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마치, 그런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마냥. 모든 것은, 그가 꾼 한 차례 백일몽이었다는 것 마냥.
“.....”
그제야 의식이 돌아온다. 제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어느 공터에 도착을 해있었다. 이 장소야말로, 하얀 머리 소녀가 자신을 몰아넣고자 한 그 종착점임이 틀림없을 터. 그렇게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중년인의 시야에, 그가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어느 한 여인의 모습이 들어오고 말았다.
“...사라...!”
자신의 사랑스런 조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중년인을 둘러싸고 있던 세계가 비일상에서 일상으로 다시금 전환이 되고 말았다. 사라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중년인이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분노였다. 그래, 모든 것이 저 빌어먹을 조카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저 반반한 얼굴 하나만을 제한다면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저 계집 때문에, 지금 자신이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만 것이었다.
애당초 사라가 데카라즈난 공작가에서 납치 따위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이 숲에 들어오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며, 그 괴물과 조우해 사냥개들이 몰살당하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전부, 저 계집 탓이었다. 모든 것이 다-!
“...아주, 팔자가 좋구나. 이런 곳에서 여유 있게 노닥거리기고 있기나 할 정도이니.”
아리아에게 쫓기느라 체력이 전부 방전된 중년인의 목에서는, 갸르릉거리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체력이 떨어져 있다는 사실 따위, 이제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중년인은 지금 화가 아주 많이 나있었으며, 때마침 분풀이를 할 대상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점이었다.
“...숙부님. 결국 여기까지 오셨군요. 저 하나를 쫓자고, 그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이곳에 당도하셨군요.”
사라가 어딘가 울적한 눈빛을 하며 중년인을 올려다보자, 중년인은 자신의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이리 답을 하였다.
“그래, 세르나드가 너라는 ‘상품’을 그리 쉬이 잃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사라,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우리가 너라는 계집을 이토록 가치 있게 피워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말이다. 적어도, 너를 가장 최적의 순간에, 가장 비싸게 팔아치우기 위해서는, 벌써부터 손아귀에서 놓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리 말하더니 중년인은 무언가를 눈치 채기라도 한 것 마냥 이내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크흐흐, 그나저나, 네 태도는 아주 담담하기 그지없구나. 누가 보면 네가 납치를 당한 것이 아니라 이곳에 산보라도나온 것처럼 아주 여유로워. 그래, 마치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이 네가 모두 의도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
사라가 중년인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중년인의 눈썹이 거꾸로 치켜 올라간다.
“역시, 그랬군. 사라, 네가 아주 돌았구나. 고작해야 가랑이 한 번 벌리기 싫다고, 저런 괴물까지 끌어들였던 것이더냐? 정말 귀엽기 짝이 없구나. 네 철딱서니 없는 행동 덕에, 세르나드 백작가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내가 이런 곳에서 이런 수모를 당해야만 네 속이 시원했더냐? 어!”
중년인이 열화와 같은 분기(憤氣)로 인해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채 자신의 앞에 성큼성큼 다가왔음에도, 사라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며 이리 말을 할 뿐이었다.
“...숙부님. 그래도 그간 함께해 온 혈육의 정이라는 것이 있으니, 마지막으로 충고를 드릴게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발걸음을 돌려 이 숲을 빠져나가도록 하세요. 그렇게 한다면, 굳이 숙부님을 뒤쫓지는 않을 것이라 약속드릴게요.”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당당하였지만, 실은 목소리의 끝이 살짝이지만 떨려나온다는 사실을 감지하며, 중년인은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 계집, 겉으로는 담대한 척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을 보며 겁에 질려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 앞에서 아무리 감추려고 용을 써봐야, 눈치를 채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단 말이다.
...왜냐하면 중년인이야말로, 지난 십수년 간 사라의 ‘훈육’을 담당해온 사람이었으니까.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는, 자신이 압도적인 강자임이 틀림없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중년인의 몸에 활력이 돌기 시작한다.
“...건방진...!”
중년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오른다. 이제 대화 따위 더는 필요 없었다. 우선, 따귀를 몇 대 정도 후려갈겨 저 건방진 태도를 교정한 이후에, 차근차근히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를 시작해 볼까-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하였지만, 정말 쓰레기 같은 새끼가 아닐 수 없군. 자신의 조카딸을 향해, 그 따위로 밖에 행동하지 못하는 것인가?”
기우뚱-
그런데 다음 순간, 중년인의 시야가 옆으로 기울어 버리고 말았다. 지평선이 옆으로 기운다. 사라는 지금 이 순간에도, 땅을 똑바로 딛고 서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의 시야는 땅바닥 쪽으로 처박히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아.”
아니었다. 지평선이 옆으로 기울어 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냥, 자신의 한 쪽 발목이 잘려나가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볼썽사납게 앞으로 넘어져 버렸다는, 그런 사소한 일에 불과했던 것이다.
“으아아아아아아!”
아프다. 발목이 잘렸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니, 흡사 발목이 불타오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대체 왜 자신이 이런 곳에서 이 따위 아픔을 느껴야만 하는 것이란 말인가. 대체 왜!
“거 참, 웃기는 새끼네. 너는 아무 망설임 없이 사라의 뺨을 후려갈기려 했던 주제에, 고작해야 발목 하나 잘렸다고 염병을 떠는 거냐? 자고로 자신의 아픔을 잘 아는 자만이 타인의 아픔을 헤아릴 수 있다고 하는 소리가 있던데, 네 꼬라지를 보아하니 그건 정말 헛소리였던 것이 분명한 것 같군.”
발목을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는 중년인의 바로 옆에서, 사람의 신경을 거스르는 듯 키득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아픔을 참아내며 가까스로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중년인 또한 익히 잘 알고 있는 한 청년의 모습이 서 있었다.
“...카인 폰 에스텔...! 네놈...!”
중년인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자, 카인은 피식하고 웃으며 중년인의 손가락 하나를 발로 지그시 밟아버렸다.
뚜둑-
“크아악!”
“혓바닥이 꽤나 짧은 걸, 게일 세르나드. 네 앞에 있는 사람은 제국의 넷밖에 없는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다. 그 나이 쳐먹고 세르나드 백작가에서 분가도 하지 못한 채, 고작해야 뒷구멍으로 분리수거나 하고 다니는 패배자가 함부로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에는 서로간의 신분차이가 너무 난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냐?”
자신을 향해 그러한 말을 던지는 카인의 모습을 보며, 중년인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꽉 깨물고 말았다. 그래, 이제야 머릿속에서 무언가 퍼즐이 짜 맞추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방금 전, 스스로를 에스텔 공작가의 시녀라고 그 괴물. 그 괴물은 분명, 자신에게는 섬기고 있는 주인이 있다는 말을 내뱉었었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한 흰소리인줄 알고 그냥 무시하였건만, 자신의 눈앞에 카인 폰 에스텔이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이상, 인정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사라는 납치한 주범, 세르나드의 사냥개를 몰살시킨 그괴물의 주인. 그리고 자신을 이곳까지 몰아넣은, 사라 저 계집애의 배후에 있던 진정한 흑막은 바로-
“...전부, 네가 꾸민 일이었던가. 카인 폰 에스텔.”
“똑똑하기도 하군. 여기까지 와서야 눈치를 채다니.”
카인이 마치 조롱이라도 하듯 그 사실을 순순히 인정을 하자, 중년인은 카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숨을 헐떡이고 말았다.
“...네 목적이 뭐지? 진정한 목적이 대체 무엇이지? 설마 데브하르트의 사주를 받고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인가? 겉으로는 얼간이인척 하고 다니던 것도, 전부 이때를 위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위장하고 다녔던 것인가?”
“.....”
얼간이라는 말에 카인은 잠시 발끈하고 말았지만, 이내 무언가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데브하르트? 설마 황실을 뜻하는 건가? 황실이 여기서 왜 나오는 건데?”
“크흐, 여기까지 와서도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인가? 에스텔이 데브하르트가 길들인 개에 불과하다는 것은 모두가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 에스텔 공작가 같은 한미한 가문 주제에 그런 괴물을 휘하에 두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어여쁨을 받는다는 증거가 아니겠나?”
중년인이 헐떡이며 그런 말을 하자, 그제야 중년인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한 카인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난 또 뭐라고. 아무래도 뭔가 대단하고 거창한 음모라도 상상한 모양인데, 내 진정한 목적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 불과해. 그냥 개인적인 동기에 불과하다고.”
“...개인적?”
세르나드 백작가와, 에스텔 공작가 사이에 사적인 원한이 남아 있었던 것인가? 대체 어디에?
“네가 엿같아서.”
“...뭐?”
순간, 중년인은 카인이 자신에게 내뱉은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와, 세르나드 백작가가 사라에게 대하는 태도가 너무 좆같은 나머지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나도 어디 한 번 똑같이 해 본 거라고. 이 개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