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2화 〉10.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 10 (92/201)



〈 92화 〉10.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 10

어느 날 밤, 사라는 자신의 방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 밤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아.”

날씨가 이제 완연한 봄이 된 것도 모자라, 여름이 가까워지고 있건만, 밤의 기온은 아직 다소 쌀쌀한 감이 있었다. 여름이 다 되어 가는 이때에 으스스한 한기를 느끼며 밤하늘을 구경하는 것 또한 나름대로 운치가 있는 일이라 생각을 하였기에, 사라는 자신의 어깨에 자그마한 담요 하나만을 걸친 채로 달을 쳐다보았다.

밤하늘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별과 달이 떠올라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아아, 그래.’

사라는 떠올리고 말았다. 언젠가, 자신은 저렇게 아름다운 밤하늘을 구경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저렇게, 휘영청한 달과 하늘을 밝히는 반짝이는 별을 보며 감동을 느꼈던 적이,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그래, 지금으로부터 몇 달 전, 제도(帝都)의 연회장에서 그를 우연히 마주하고, 남몰래 밀회(密會)를 약속하며, 인적이 없는 한밤중의 테라스에서 그를 향해 은밀한 이야기를 속삭이던 무렵.

더 이상 어디론가 도망칠 수조차 없는 궁지에 몰려 있던 탓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말의 기대를 품고 그에게 모든 것을 걸어보자는 심정으로 도박을 하던  무렵.

지금처럼, 그를 사랑하기는커녕 그를 향한 어떠한 신뢰조차 가지고 있지 않던 그 때 그 무렵.

밤하늘의 달과 별이 관객이 되어주는 와중에, 테라스에서 그와 서로의 숨결이 맞닿는 것을 느끼며, 안타까운 한숨을 내흘리던 그 때도 분명, 이렇게 아름다운 달이 그들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와서는, 그와 관련된 기억이라는 보잘  없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에게 있어너무나도 소중한 추억이 되어버린  때의 기억을 반추해보며, 사라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이고 말았다.

...어째서일까. 그와 관련된 기억을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꺼내어 차근차근 돌아볼 때마다, 사라는 자신의 마음이 조금씩 들뜨는 것 같은  기분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름다움을 동경했다 생각했지만, 사실 아름다운 것은 어디에나 있었다. 사라 세르나드라는 여자에게 있어, 카인과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이야말로 찬란한 아름다움 그 자체였던 것이다.

약간이지만, 후회가 들기도 하였다. 만약, 이렇게 후회할 줄 알았더라면, 진작 그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을. 그와 더 많은 추억을 쌓았을 것을. 그와 많은 것을 함께해 보았을 것을.

...그를 조금 더 일찍, 그리고 많이 사랑해보았을 것을.

하지만, 이제는 너무 늦어버리고 말았다. 조만간, 모든 것은 끝을 맺을 것이다. 자신이 그를 어찌 여기건, 그를 향해 어떠한 마음을 품고 있건 간에 상관없이, 그녀의 여정은 곧 막을 내리게 된다.

방금 전, 사라의 숙부라고 하는 인간이 기별조차 없이 그녀의 방에 들어와 이런 말을 남기고 갔기 때문이다.

- 오늘 새벽, 데카라즈난 소공작의 방을 찾아가거라. 이미 모든 준비는  맞추어 두었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나의 사랑스러운 조카의 각오밖에 없지.

- …….

- 현명한 선택을하리라 믿는다, 사라.  똑똑한 계집이니,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이해하고 있을 테지?

도대체 어떠한 준비를 해두었다는 것인지, 그리고 어떤 더러운 수작을 부려놓았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보나마나, 귀를 씻어내고 싶을 정도로 더러운 말이 튀어나올 것이 뻔하겠지. 그리고, 설사 그것에 대해 알아봐야 별 소용이 없기도 하였고.

숙부가 그녀에게 별 다른 설명없이 저러한 말만 던지고 떠났다는 것은, 정말 자신이 데카라즈난 소공작의 침실에 들어서서 그를 향해 다리를 벌리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의미일 테니까.

...그래, 따지고 보면 아주 간단한 이야기에 불과했다. 데카라즈난 소공작의 침대 위에 올라선 후, 그와 관계를 맺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새벽이 지난다면, 모든 것이 끝나게 될 것이다.

그녀를 향한 가문의 은근한 압박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는  수 없는 번뇌 또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카인을 향해 남몰래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그에 대한 이 연심 역시, 끝을 고하게 되겠지.

...사실, 사라에게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밝히지 못할, 소녀 같고 부끄러운 소망이 한 가지 있었다.

사라는, 아이를 가지고 싶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낳고 싶었다. 사랑하는 남자와 쏙 빼닮은 아이를, 낳고 싶었다. 그렇게 낳은 아이를, 사랑으로 보듬어 주고 싶었다.

아이가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사랑하는 남자와, 아이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남들이 그러하는 것처럼, 평범하게 살아가고, 평범하게 사랑하고, 평범하게 행복하게 싶었다.

그렇게 사랑하는 남자와, 사랑하는 아이와 함께 하며, 함께 늙어가고, 언젠가는 할머니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결코 이루어질  없는 꿈이 되고 말았다. 자신 같은 여자가 결코 꾸어서는 아니 되는, 사치스런 꿈이 되고 말았다.

“...카인.”

한숨이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약간이지만 슬펐다. 그 때와 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그와의 약혼식 날, 언젠가 나누었던 약속을 상기해버리고 말았다.

그와 약혼식이 치러졌던 바로 그 날, 카인과 사라는 한 가지 약속을 맺었었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서로의 삶이 다하는 그 날까지 오직 당신만을 바라보겠다는, 어느 날의 맹세를 떠올리고 말았다.

알고 있다. 그것은 그저 약혼식 때 의례적으로 나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약속에 불과했다.

일이 여기까지  이상, 그와 자신이 맺어질 수 없다는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그 때 너와 나눈 그 맹세가 떠오르는 것일까.

...남몰래, 상상해버리고 말았다. 지금  순간, 마치 동화책 속에 등장하는 왕자님 마냥, 그가 자신 앞에 나타나 자신을 위기 속에서 구해준다는, 그러한 상상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고, 자신은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옛날 이야기마냥, 모든 것이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다는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아주 잠깐이지만 해보았다.

“...킥.”

자신이 하였지만 너무나 말도 안 되는 그 상상에, 사라는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리가 없었다. 결국 자신은 세르나드 백작가에서 길러낸 하나의 ‘상품’에 불과하며,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다리를 벌리고, 교태어린 미소를 지으며, 아양을 떨며 살아가야 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자신이, 홍등가의 창녀와 다를  대체 무어냐며, 사라는 자조어린 미소를 지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자신 같은 여자에게, 사랑하는 남자와 맺어진다는 일은 역시 너무 과분한 소원이었던 것일까-

“...네가, 보고 싶어.”

눈가에 맺힌 무언가를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 마냥 슬며시 닦아낸다. 울어봐야, 질질 짜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래, 웃자. 차라리 웃자.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웃도록 하자.

비록 자신의 비루한 몸뚱아리는 다른 이들에게 팔아 넘길 지라도, 자신의 이러한 마음 만큼은 결코 꺾이지 않을 것이라 굳은 맹세를 하며, 사라는 다시금 심호흡을 하였다.

방 한 켠에 걸려 있던 시계를 돌아본다. 이제시간이 되었다. 이제 떠나야할 시간이었다.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뱉으며, 사라는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아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어떠한 이의 음성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그렇게 하였을 테지.

“사라.”

창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챈 그 순간, 그녀의 입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열려 그의 이름을 자아내고 말았다.

“...카인.”

시선을 천천히 들어올려, 창가를 바라본다. 방금 전까지 그녀가 밤하늘을 바라보던 창가 쪽에, 그가 비스듬히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어째서 그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일까. 왜 하필, 이 때 나타난 것일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으려고   때에 자신에게 와준 것일까. 혹시 이건 꿈인 것일까. 마음이 허약해지고 만, 자신이 바라보는 망상인 것은 아닐까.

“...아.”

꿈이 아니었다. 틀림없었다.  사람은 틀림없이, 카인이었다.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고 말았다. 하고픈 말은, 산더미처럼 많았다.하지만, 그녀의 혀끝에서 나오는 말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왜, 온 거야?”

그가 너무도 보고 싶었지만, 동시에다른 남자에게 팔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에게 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사라 세르나드라는 여인은 카인  에스텔에게, 마지막까지 좋은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었단 말이다.

“왜 왔냐니. 그야, 너를 빼돌리려고  거지.”

“뭐?”

그의 여상한 어조의 대답을 듣는 순간, 사라의 심장은 다시  번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순간, 네가 정말로 나를 구원해줄 지도 모른다는 행복한 망상에 다시금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그를 향한 쓴소리였다.

“무모해. 정말로, 무모해. 카인.”

기쁘다. 그가 자신을 생각해주는 것이 너무도 기쁘다. 나를 구해주겠노라고 했던 그 날의 약속을, 이렇게 지키러 와주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기쁘다.

...하지만, 걱정된다. 이건, 미친 짓이었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세르나드의 사냥개가 얼마나 집요하고, 악착같은지. 만약 자신이 그와 함께 이곳에서 도망친다면, 그들은 반드시 자신을 쫓아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분명 다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죽을 지도 모른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은 버틸 수가 없었다. 그가 상처 입게 될지도 모르는 미래 따위, 너무도 싫었다. 그러니-

“...카인. 이제 와서 네가 나설 자리 따위, 어디에도 없어. 난 어디까지나 나의 의지로, 이곳에 있는 것이니까.”

최대한 냉정하고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사라는 카인을 향해 축객령을 내린다.

“내가 언제, 너보고  구해달라고 한 적이 있었니?”

사실, 네가 이렇게 와줘서 정말로 기뻤다.

“됐으니까 돌아가. 너도 알다시피 데카라즈난 소공작은 무척 잘생긴 사람이잖아? 그러니, 그의 첩으로 들어가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닌 것 같아. 원래, 귀족들의 결혼이란 이렇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니까.”

사실, 언제부터인가 너를 사랑해버리고 말았다.

“미안하지만, 전에 네가 했던 말은 없었던 걸로 하자. 그러니, 더는 나에 대해 신경 쓸 필요는 없어. 그러니, 누가 보기 전에 어서  방으로 돌아가.”

사실, 네가 나를 구해주었으면 한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지독한 이기심인 것이 분명하겠지. 자기  명만 불행해지면 끝나는 일에, 그를 끌어들이기 싫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라는, 자신보다 그를 우선시 여기게 되어버리고 말았으니까.

그리고 사라의 싸늘한 태도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며 카인은-

“...아.”

사라의  손을 붙잡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허리에 가져다 대며,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됐으니까 불평은 나중에 다시 하도록 해. 지금은 억지로 경보 마법을 정지시켜놓았지만, 조만간 다시금 작동이 시작될 거다. 그러니 꼬리가 따라 붙기 전에, 빨리 탈출하도록 하자. 밑 준비는 대충 끝내 놓았으니까, 승산은 충분해. 그러니, 잔말 말고 따라와.”

“...카, 카인...!”

마치 공주님마냥 그가 자신을 번쩍 안아들자, 사라는 수치심으로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손발을 아등바등거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내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고개를 푹하고 숙이고 말았다.

"가자, 사라. 오늘로서, 너를 옭아매고 있는 악몽은 내가 끝을 내줄테니까."

그리 말을 하는 카인은멍하니 바라보며, 사라는 자신의 입술을 살짝 깨문다.

“...바보 같기는, 이런 노력 따위, 전부 헛수고로 끝날 것이 분명한데.”

그리 말을 하면서도, 사라는 카인의  안으로 자신의 몸을 살짝 기울여올 뿐이었다.

마치, 어딘가가 정말 행복하기라도 한 것마냥.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