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10.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 09
‘...조금, 큰일이 난 것 같은데.’
사라가 지금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며,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알지 못할 사실이지만, 방금 전까지 이 방 안에 사라와 중년인, 그 둘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중년인이 방을 빠져나간 지금 이 순간, 방 안에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라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그녀의 방에는 사라뿐만이 아니라, 마법으로 스스로의 모습을 감춘 채 그녀를 몰래 지켜보고 있는 아리아가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놀랍게도 아리아는 현재 마법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대기를 굴절, 왜곡시킴으로서 다른 이들의 시계(視界)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체온, 기척과 같은 스스로를 구성하고 있는 정보를 암호화시킴으로서 어느 누구도 꿰뚫어볼 수 없는 완벽한 은닉을 하는 것에 성공하고 말았다. 이것은 카인이 ‘흐르는 별’을 이용해 스스로의 모습과 기척을 소실시키는 광경을 보며 영감을 얻은 아리아가 개발한 독자적인 마법이었다.
그 효용은 실로 놀라워, 중년인 역시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검사였지만 이 방 안에 자신과 사라를 제외한 다른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추호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아리아가 정작 속여 넘기고 싶은 대상인 비앙카나 황녀 같은 절대적인 강자에게는 그다지 효용이 없는 방법이긴 했지만.
‘...그것들의 눈을 속이지 못하는 이상 실패한 마법에 불과한데 무슨.’
황녀나 성녀는 그렇다 쳐도, 이제는 에스텔 공작가에 상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비앙카의 얼굴을 떠올리며 아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마음 같아서는 남몰래 죽여 버린 다음에 잘게 썰어 뒷산의 양지 바른 곳에 묻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계집이었지만, 카인이 직접 그녀에게 비앙카와 다투지 말라며 명령을 내렸으니 이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을 뿐이었다.
아리아에게 있어, 카인의 말을 거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니 어찌하겠는가. 그것들을 물리적으로 죽여 버릴 수가 없다면 남은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히는 일이긴 했지만, 그것들과 어떻게 해서든 상생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들에게 눈치 채이지 않고 카인을 독점하는 방법이었지만.
‘원래는 그것들 몰래 카인님과 단둘이서 놀러가려고 개발한 마법이었는데.’
이 마법을 개발하기 위해 ‘흐르는 별’을 사용하는 카인에게 여러 조언을 받았던 것이야말로 바로 크나큰 실책임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어지간한 암살자의 뺨은 후려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은신을 가능하게 만드는 마법을 개발했다는 것을 상기한 카인이, 혹시 모를 불상사가 일어날것을 대비해 사라를 암중에서 몰래 지켜보며 호위를 해달라는 부탁을 하였기 때문이다.
카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라의 안위를 걱정하여 아리아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은 실로 당연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데카라즈난 공작가에 당도한 이후 가장 처음 목격한 장면이 바로 사라의 숙부라고 하는 개자식이 그녀를 그 따위로 대하는 장면이었으니 말이다.
현재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관계가 되긴 하였지만, 그래도 과거의 사랑했던 여자인 동시에 그의 약혼녀였던 여인이다. 차라리 모르면 몰랐을까,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카인이 어떠한 대비책도 세우지 않은 채 사라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지 않겠는가.
...다만 한 가지, 그가 미처 계산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현재 사라의 암중 호위를 맡고 있는 장본인인 아리아는 정작 사라의 안위 따위에 대해서 일말의 흥미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카인이 아리아에게 ‘부탁’을 하였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지만, 애당초 아리아는 사라가 어떻게 되건 간에 관심조차 없었단 말이다.
아니, 정확히 말을 하자면 사라 세르나드 같은 계집 따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역겹고 짜증이 나 그 어떠한 관심도 가지고 싶지 않았다.
‘...카인님께서는, 사람이 너무 호인이셔. 자신을 배신한 저런 더러운 여자도 직접 감싸 안아 주시는 것도 모자라, 직접 나서서 보살펴 주시려고 하시다니.’
아리아는 카인의 그 어떠한 점도 용인하고 이해하며 배려해줄 수 있었지만, 그가 과거의 여자와 얽히게 된다면 평소와는 다르게 굉장히 유유부단하고 인정이 넘치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기억을 잃은 자신을 거두어 주고, 전속시녀로 삼아 가까이에 두기까지 하였으니 응당 자신을 가장 사랑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째서 자꾸 이상한 계집들을 곁에 두려 하는 것인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특히 그 중에서도 사라 세르나드 같은 계집은 악질 중의 악질이라 할 수 있었다. 비록 이제는 없었던 일이 되기는 했지만, 이미 루시안 폰 투르니젠과 한 차례 배를 맞댄 전적이 있는 계집이 아니던가?
아리아는 에스텔 공작가에 거하고 있는 루시안 폰 투르니젠의 멍청한 낯짝을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아리아는 루시안이 정말로,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히 카인에게 시비를 건 것도 모자라, 그에게 상처까지 입힌 전적이 있는 인간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루시안과 사라는 실로 천생연분 같은 관계가 아닐 수가 없다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자기 주제는 순순히 파악하고 있으니까.’
아마 그것이 사라 세르나드의 유일한 장점이 아닐까. 그 비앙카는 말할 것도 없고, 별의 별 잡것들이 카인을 향해 뼈다귀에 눈이 돌아간 개처럼 덤벼드는 와중에, 사라 세르나드는 카인에게 꼬리를 치지 않는 유일한 여자였다. 그러한 장점조차 없었더라면, 아리아는 결단코 사라의 호위를 맡는 것을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리라.
...그리고 지금, 아리아는 사라가 스스로 숨을 죽여 가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광경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그깟 가랑이 한 번 벌리는 게 뭐가 어렵다고 저리 유난을 떠는 건지. 어차피 한 번 해본 일이니, 두 번째는 별 거 아닐 텐데.’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가랑이를 벌려본 경험이 없었던 것 같기도하다. 사실, 사라가 경험이 있건 없건 그 따위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긴 했다. 왜냐하면.
- ...사라.
방금 전, 사라와 그녀의 숙부가 나누었던 대화를, 카인 또한 전부 듣고 있었기 때문에.
아리아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마법으로 모습을 감춘 채 그녀를 호위하고 있긴 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말로 만약을 대비한 일이기도 했다. 최악의 상황, 무력(武力)으로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상정한 대처방안이었단 말이다.
카인과 사라가 거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제국의 4대 공작가 중 하나인 데카라즈난 공작가였다.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부와 위광을 지니고 있는 이곳에서, 데카라즈난 공작의 허락 없이 검을 뽑아드는 행위는 그들의 위세에 정면으로 도전을 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아리아가 사라를 몰래 지켜보고 있던 목적은 오직 하나, 카인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불상사가 일어났을 경우, 한 시라도 빠르게사태를 파악하고 카인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사라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정이었을 뿐, 카인이 그녀에게 직접 ‘부탁’을 한 일에 대하여 결코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방금 전, 사라가 그녀의 숙부가 얼굴을 마주하였을 때부터 아리아는 쌍방향 송신이 가능한 마도구를 작동시켜 카인에게 현재 이 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대화를 들려주었으며-
- …….
그 결과, 그녀의 하나 뿐인 주인은, 현재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많이. 아니, 엄청나게 많이.
****
콰득-
아리아의 예상대로, 방금 전 사라의 방에서 오고가는 대화를 전부 들은 카인의 입에서는, 그저 헛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화를 내고, 거세게 분노한 나머지, 이젠 너털웃음밖에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주먹을 너무 강하게 쥔 나머지 피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픔 따위 보다 거센 분노가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데카라즈난 공작가나 에스텔 공작가의 체면이고 뭐고 전부 다 때려치우고 당장 세르나드 백작가로달려가 저 개만도 못한 것들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적어도 사라의 숙부라고 하는 개자식의 주둥이를, 반으로 찢어 놓고 싶었다.
알고 있었다. 데카라즈난 공작가에서 사라가 자신의 숙부라고 하는 인간에게 저따위 취급을 받는 그 순간부터, 뒷구멍으로 그녀가 겪어야 하는 고초가 자신은 상상도 하지 못할 수준이라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었다.
또한, 세르나드 백작가에서 사라라고 하는 여인을 그저 다른 가문에 잘 포장하여 떠넘기기 위한 ‘상품’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그 따위로 취급하는 세르나드 백작가가 개새끼라는 것쯤은,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단 말이다.
...하지만, 그저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저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 실체를 목격하는 것에는, 결코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하고 있었다. 설마 자신들의 입으로 귀족을 자처하는 것들이, 스스로의 혈관 안에 푸른 피가 흐르고 있노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저렇게 저열한 행동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부글부글 들끓는 속을 애써 진정시키려 들며, 카인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아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아리아.”
- 예, 카인님.
“미안하지만, 네 힘을 좀 빌릴 수 있을까.”
카인의 말에, 아리아에게서 당연하다는 듯 대답이 돌아온다.
- 제 모든 것은, 카인님에게서 비롯된 것이에요. 그러니 저는 언제나, 카인님의 힘이 되어 드릴 것이랍니다. 그러니 그런 질문은 하지 않으셔도 되....
“아니, 방금 전에 내 말은, 그러한 의미가 아니었어. 아리아.”
카인은 차갑게 가라앉은, 하지만 아리아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을 눈빛을 한 채로 그녀를 향해 나지막하게 말을 하였다.
“카를 영감의 하나 뿐인 제자인 아리아, 에스텔 공작령의 전속 마법사인 아리아가 아니라.”
“진리에 닿고 그를 규명한 대마법사, '아리아'로서의 본격적인 힘을 사용해줄 수 있냐, 그리 묻고 있는 거란다. 아리아.”
- …….
아리아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어찌 보면 허를 찔린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당황스러워 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카인 또한, 아리아에게서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알고 있었다. 아리아가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상당부분 힘을 감추고 있다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굳이 나서서 그를 지적할 필요는 없다 생각하고 있었다. 아리아가 자신의 힘을 감추고 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며 언젠가 자신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약속하지 않았던가. 아리아라는 여자는, 카인에게 언제고 힘이 되어준다며, ‘그 때의 아리아’가 그에게 약속해주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원래 카인은 아리아에게 커다란 무리를 요구할 생각이 없었다. 사라를 구해내는 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카인이 수립한 사라를 구해내는 작전에 있어, 아리아의 도움이 필수적인 부분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데카라즈난 공작가, 그리고 세르나드 백작가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무런 힘도 없는 여인 한 명을 몰래 빼돌리는 일에 불과했다. 물론, 저들에게 있어 사라는 귀중한 ‘상품’인 만큼 사냥개들이 필사적으로 따라붙겠지만, 회귀한 이후 끊임없이 단련한 검술과 ‘흐르는 별’, 그리고 지금까지 꽁꽁 감춰둔 채로 드러내지 않은 여러 가지 패들을 잘만 활용한다면 충분한 승산이 있는 싸움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부족했다. 그저 사라를 빼돌리는 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했다. 사라 세르나드를 가두고 있는 쇠창살에서 그녀를 빼내고, 자유를 부여하는 것만으로는 그녀를 둘러싼 악몽은 끝을 맺지 않을 것 같았다. 적어도, 숙부라고 하는 저 개자식을 쳐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하였다.
그녀에 대한 동정이라 봐도 좋고, 단순한 분풀이라고 해도 좋았다. 카인은 그냥, 더 이상 인내심을 발휘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에 불과했으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아리아의 도움이 필요했다. 인세를 벗어난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상식을 가볍게 뛰어넘는 기량을 갖춘, 아리아의 마법이 필수적이었다.
- ...카인님, 제가 전에 말씀드렸었죠?
한참의 침묵 끝에, 아리아에게서 흘러나온 대답은.
- 저는 언제나, 카인님의 편이 되어 드릴 것이라고요. 이 몸은 당신만의 것이랍니다. 그러니, 당신의 뜻대로 하시길. 저는 언제나, 당신의 곁에 서 있을 테니 말이에요.
명백한, 긍정의 표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