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10.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 08
데카라즈난 공작가의 저택, 사라가 머무는 방의 앞.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문 앞에 선 채로, 카인과 사라는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카인은 현재, 달랑 셔츠 하나만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왜냐하면, 사라의 옷이 비로 흠뻑 젖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 앞에서 그녀의 그러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둘러주었기 때문이었다.
‘...카인.’
사라는 현재, 자신의 옷이 비에 흠뻑 젖은 사실 따위보다 자신이 카인의 외투를 걸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신경이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착각일수도 있었지만, 이외투에는 그의 체취가 은은하게 묻어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혹시, 나한테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니겠지?’
이 외투는 엄연히 카인의 것. 나중에 카인에게 이 외투를 돌려주었을 때, 카인이 외투를 받아들며.
- 사라, 이 외투에서 왠지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라는 말을 한다면 그대로 기절해버릴 지도 모르기에, 사라는 더더욱 외투로 자신의 몸을 꽁꽁 싸맬 수밖에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의 외투에 물기라도 잔뜩 묻혀서 나중에 빨아서 되돌려준다는 핑계를 대고 오늘은 돌려주지 않으려고.
그런 사라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카인은 정말로 그녀가 걱정이 된다는 눈초리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곱게 자란, 허약한 귀족가의 여인이 세찬 비를 저렇게 흠뻑 맞았는데 걱정이 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라, 그럼 편히 쉬어. 괜히 아무렇지도 않은 척, 멀쩡한 척 자존심 세우다가 나중에 몸살 앓을 수도 있으니까, 오늘은 절대 무리하지 말도록 해.”
“...카인. 내가 애니? 아니면, 네가 우리 엄마니? 아니, 우리 어머니도 너처럼 그렇게 꼬치고치 간섭은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사라가 왠지 모르게 뾰로통한 어조로 답을 하자, 카인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전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 뭘 보는 거야...?”
사라는 자신도 모르게 두 팔로 스스로의 몸을 감싸 안았지만 유감스럽게도 카인이 보고자 한 것은 흠뻑 젖은 나머지 안쪽이 훤히 비춰 보이는 그녀의 굴곡 쪽이 아니었다.
카인의 시선이, 그녀를 한 차례 훑는다. 그녀의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으며,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오직 두 볼과 이마에만 불그스름한 기색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저체온증의 초기 증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주 지랄 맞은 증상이지.’
카인 또한 원정대에서 1년간 혹독하게 구른경험이 있었기에 저체온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겨울의 마녀를 토벌하기 위해 제도에서 에스텔 공작령으로 가까이 다가 갈수록, 눈발은 더더욱 거세지고 추위는 날이 갈수록 혹독해져만 갔다. 하늘에서 주먹 만한 우박이 우수수 떨어지거나 인간의 키를 가볍게 훌쩍 뛰어넘는 기록적인 폭설이 내려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날도 부지기수였다.
비앙카가 마법으로 그들의 체온을 안정시켜주거나, 혹은 아리엘이 신성력으로 그들을 치유해주지 않았다면 카인은 아마 에스텔 공작령에 도달하기도 전에 동상으로 손가락 발가락이 전부 잘려나가 밥숟가락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었으리라.
여하튼, 원정대에 속해있던 인물 중저체온증에 걸리지 않았던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몸이 허약한 축에 속하던 비앙카는 말할 것도 없고, 신체 능력 하나는 괴물 같던 황녀마저 몸져누울 때가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만큼, 대륙에 휘몰아친 겨울은 끔찍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자신이 아픔을 겪어보았던 전적이 있는 만큼, 카인은 사라가 진심으로 걱정이 되기만 할 뿐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라는 과거 그의 약혼자였다. 한 때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가 끙끙 앓아눕는다는 상황이 반갑게 느껴질 리가 없었단 말이다.
“...좌우지간, 몸조리 잘했으면 좋겠다. 나중에 네가 아프다는 말은 별로 듣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 말하며 카인이 자신에게서 아무 망설임없이 몸을 돌리자, 사라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뒷모습을 붙잡고 말았다.
“...카, 카인...!”
“왜 그래? 아직 할 말이 남았어?”
그를 불러 세우기는 했지만, 막상 그에게 할 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라의 입에서는.
“...이, 이 외투는? 어떻게 할 거야? 정말 안 가져가도 돼?”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바보 같은 말밖에 흘러나오지 않을 뿐이었다.
“나중에 돌려주면 되지. 그런 건 됐으니까, 얼른 방에 들어가서 쉬어.”
끝까지 자신을 위로하는 말만을 남기며, 그는 이내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나, 뭐하는 거지...”
정말, 스스로가 한심하기만 할 뿐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늙어 죽을 때까지 그의 곁을 맴돌기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
끼익-
사라가 약간이지만 지친 듯한 기색으로 방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야 다른 사람의 눈치를볼 것 없이 편히 쉴 수 있나 생각을 하였지만,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방 안에는 이미 선객이 자리를 잡고 있던지 오래였다.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이제야 방에 들어오는 것이더냐?”
“...숙부님.”
방의 한가운데에서 그녀의 숙부, 게일 세르나드가 의자에 앉아 마치 방의 주인인 것 같은 거만한 태도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어처구니가 없구나. 넌 정신머리가 있는 것이냐, 아니면 부족한 것이더냐.넌 우리가 이곳에 놀러온 것이라 착각이라도 하고 있는 것이더냐?”
단 한 마디의 예고도 없이 조카의 방에 들어왔음에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조카에 대한 원색적인 힐난뿐이었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할 말이 있어 그녀의 방을 찾아 왔건만, 하필 그 때 사라가 자리를 비우고 있었기에 한참동안이나 그녀를 이곳에서 기다려야만 했다는 사실 뿐이었다.
사라의 옷이 흠뻑 젖어 있거나, 그로 인해 그녀의 얼굴이 파리하다거나, 추위로 인해 몸이 오슬오슬 떨리고 있는 조카딸의 모습 따위,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도구’로서의 사라 세르나드였지,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사라 세르나드 따위, 그의 관심 밖이었으니까.
“...죄송, 합니다. 숙부님.”
중년인의 실로 건방지기 이를 데 없는 말에도, 사라는 자신의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묵묵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저런 인간에게 자신의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실로 치욕스런 일이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저 인간의 손에는 현재-
“뭐, 되었다. 네가 알량한 외모만 믿고 천방지축처럼 굴어대는, 맹랑하기 그지없는 계집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차라리 그 반반한 얼굴만 아니었더라면, 이런 중대한 일에 너를 데리고 오지 않았을 것을.”
중년인이 혀를 끌끌 차며 그녀를 향해 터무니없는 모욕을 행하였음에도, 사라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을 하며 숙부의 폭언을 한 귀로 들으며 다른 한 귀로 흘러내었다. 아니, 흘러내려고 노력하였다.
괜찮다. 익숙한 일이다. 세르나드 백작가의 가주이자 자신의 아버지라는 인간이, 눈앞에 있는 저 인간에게 자신의 ‘훈육’을 담당하게 한이후부터, 그가 자신에게 행한 일 중 이 따위 모욕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불과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참고 견디면 되는 일이다. ...그래, 참자. 이 순간만 어떻게 해서든 넘기면 되는 일에 불과할 지어니.
“그건 그렇고, 사라. 데카라즈난 소공작을 유혹하는 일은 어찌 되어 가느냐? 비록 데카라즈난 소공작에게 약혼녀가 있다고는 하지만, 네 몸뚱아리라면 그를 유혹하는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리 말을 하며 중년인은 실로 게슴츠레한 눈초리로 그녀의 전신을 힐끗 바라본다. 흡사 전신을 핥으며 지나가는 듯한, 그 역겨운 시선에 사라는 본능적으로 생리적인 혐오감을 느끼고 말았다. ...실로, 소름이 돋는다. 자신의 하나뿐인 조카를, 저리도 음탕하고 음흉한 눈길로 바라볼 수가 있는 것인지.
이 순간, 숙부라고 하는 인간이 자신에게서 어떠한 대답을 원하는 것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그녀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가문을 위해, 자신의 조카딸이 마치 홍등가의 창부마냥 남자를 유혹한 끝에,수중에 넣기를 노골적으로 강요하고 있던 것이었다.
“...숙부님.”
아아, 만일 과거의 나였더라면, 저런 구역질나는 제안 따위, 순순히 받아들였을 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다른 곳에 비싸게 팔려가기 위해 가꾸어 진 몸뚱이 따위,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데카라즈난 소공작에게 순순히 다리를 벌렸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는.”
- 걱정되니까. 이렇게 바깥에 비가 쏟아지는데, 네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어?
그녀는 이미,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세상 그 자체에 염세적이던, 과거의 그녀는 이미 온데 간데 사라지고 없었단 말이다. 이제와 새삼스레 그를 독차지 하고자 하는 욕망을 갈구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가원하는 것 따위, 예나 지금이나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동경하고 말았을 뿐이다. 이런 자신 따위를 위해,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뻗어준, 그의 곁에 조금이라도 더 머무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라는 버팀목에 조금이라도 더 의지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자신 따위라도, 그 정도는 허락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 이상의 무언가는 바라지도 않았으며, 자신이 바라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와 같은 남자에게, 자신 같은 여자 따위,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저는, 그러지 않을 거 에요. 숙부님. 데카라즈난 소공작을 유혹하는 일 따위, 결코 할 수 없어요.”
“...뭐라고?”
“다른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사랑을 속삭이며, 그를 유혹하는 일만은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마음 속 깊은 곳에 다른 남자를 품어버리고 말았으니까. 비록 그 사랑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지만, 더 이상은 그를 향해 어떠한 후회도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녀는 단호히, 숙부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명백한, 반대의 의사표명이었다.
순간, 이 방 안에 싸늘한 적막만이 흐를 뿐이었다. 중년인은 얼굴에 실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어더니, 그 얼굴은 이내 분노로 가득 찬 얼굴로 변화한다.
“...하. 오늘따라, 말이 꽤나 많구나, 사라.”
중년인은, 분기를 참지 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온다. 숙부의 팔이 서서히 올라간다. 숙부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사라는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하고 감고 말았다.
저 사람은, 언제나 그랬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자신보다 한참 어린 조카딸에게조차 거리낌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그런 사람이었다. 곧이어 닥쳐올 폭력을 상상하며, 사라의 손이 아주 약간, 떨리고 말았다. 폭력으로 인한 아픔보다, 저 따위 남자에게 폭력을 당하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너무 한심하였다.
“...교활한 것 같으니.”
...하지만, 저 남자의 손은 그녀의 뺨을 때리지 않았다. 아니, 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르나드 백작가라면 몰라도, 데카라즈난 공작가에서 조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리스크가 너무도 큰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안 되지, 그래, 안 되고말고. 다른 곳은 몰라도, 네 얼굴만은 도저히 건드릴 수가 없구나. 소중한 ‘상품’인데, 언제 데카라즈난 소공작을 홀릴지 모르는 소중한 자산인데. 그렇지 않더냐 사라?”
숙부의 손이, 사라의 목줄기를 따라 어깨를 거쳐 그녀의 뺨에 이르는 부분을, 아주 살며시 어루만진다. 그의 손길은, 언젠가 그녀를 위하던 카인의 손길과는 무척이나 달랐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역겨웠다. 그가 자신의 살갗을 어루만질 때마다, 사라는 마치 수 마리의 뱀이 자신의 전신을 기어가는 듯한 소름끼치는 감각을 맛보아야만 했다.
“도도한 척, 비싼 척 굴지 말거라. 사라. 너 스스로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넌 그저, 상품이다. 세르나드에서 값지게 길러낸, 장식품에 불과한 존재란 말이다. 그걸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주제에, 이제와 다리 벌리는 것을 주저하면 어찌 하자는 것이더냐.”
“.....”
“뭐, 귀여운 조카딸이니, 하루 정도는 시간을 주마. 그 시간동안, 곰곰이 생각을 좀 해보려무나. 대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네게 있어 좋은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알아서 판단 하거라.”
그녀를 향해 끝까지 끈적끈적한 눈초리를 거두지 않던 중년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를 향한 비웃음만을 남긴 채, 그녀의 방에서 유유히 빠져나갔다.
“...아.”
숙부가 방을 빠져나간 순간, 전신에서 힘이 탁하고 풀리고 만 사라는, 이내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카, 인...”
무서웠다. 방금 전, 사라는 숙부에게 처음으로 '반항'이라는 것을 해보았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녀는 결국 저 남자에게 어떠한 항변도 하지 못했다.
아픔 따위가 무서웠던 것이 아니다. 저 남자가 두려웠던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두려움으로 인해, 결국 저 남자의 말을 따르겠다고 할 지도 모를 자기 자신이 두려울 뿐이었다.
"...미안해..."
결국 사라는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사라 세르나드라고 하는 여인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