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8화 〉10.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 06 (88/201)



〈 88화 〉10.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 06

새삼스러운 이야기였지만, 데카라즈난 공작가는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富)를 자랑하는, 참으로 돈이 많은 가문이었다.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가문이 워낙 부유한 나머지 정원을 관리하는 것과 같은 사소한 일에도 많은 돈을 투자할 여력이 충분하다는 의미였다.

물론, 정원을 꾸미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본디  꾸며진 정원이란,  가문의 얼굴과도 같은 곳이었으니까. 다만, 데카라즈난 공작가와 같이 문자 그대로 돈을 쏟아 부으며 정원을 관리하는 가문은 굉장히 드물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정원, 아니 저택 뒤편의 후원 전체에는 바깥의 기온과는 상관없이 일정 온도를 유지시키는 마법이 걸려 있어 계절과 상관이 없는 꽃들이 화단 곳곳에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비앙카가 나를 납치했던 곳에도 이와 비슷하게 온갖 종류의 꽃들이 시간개념을 무시하고 피어 있기는 했지만, 내가 그 때 받았던 느낌과 이곳의 후원을 보며느끼고 있는 감각은 그야말로 천지차이였다.

비앙카는 타인에 대한 감수성이 없는 마법사답게 그냥 마구잡이로 꽃을 피어 올렸을 뿐이지만, 공작가에서는 한 송이의 꽃이 다른 꽃들과 함께 피어 있을 경우까지 전부 고려하여 화단이 최대한 조화롭게 보이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는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식사를 마치고 나서 홀로  아름다운 화원을 한 바퀴 둘러보며 산책을 하는 취미를 붙이게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리아와 함께 이곳을 함께 거닐고 싶었지만, 그녀는 현재 내가 따로 맡기고 있는 일이 있었기에 아쉽지만 혼자서 산책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라? 에스텔 소공작님이 아니신가요?”

“아, 데카라즈난 영애.”

그렇게 산책을 하던 와중, 나는 화원의 한가운데에서 데카라즈난 공녀와 마주하게 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놀랄만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집주인이 자기  화원을 거닌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공녀는 나를 향해 살포시 웃음을 지어보이더니 이내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오며 나를 향해 자그마한 목소리로 이리 속삭였다.

“소공작님. 만약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와 함께 후원을 한 바퀴 둘러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데카라즈난 공작가의 후원은, 제국에서도 절경이라고 소문이 난 실로 아름다운 곳이랍니다.”

“...함께, 말씀이십니까?”

공녀의 그러한 제안에, 나는 다소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화원을 한 바퀴 돌았을 뿐더러, 그리 친밀한 사이도 아닌 공녀와 함께 어색하기 짝이 없는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 될까요? 부탁드려요.”

그런 나의 기색을 눈치라도 챈 것인지, 공녀는 마치 뱀과 같은 기색으로 나의 팔을 나긋나긋하게 감싸 안았다. ...솔직히, 뿌리치려면 얼마든 뿌리칠 수는 있었지만, 그렇게 행동하기에는 상황이 다소 애매한 감이 있었다. 더군다나, 공녀는 어디까지나 나에게 호의로서 그런 제안을 던진 것이 아니던가? 이대로 무작정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거나 공녀를 밀어내기에는 그림이 별로 좋지 않았다는 의미였단 말이다.

“...알겠습니다.”

결국, 어쩔  없이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공녀와 함께 다시금 정원을  바퀴 산책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산책을 하는 내내 옆에서 공녀가 나를 향해  없이 무언가를 재잘거려 주었다는 것이었다. 혹시나 서로 간에 할 말이 없어 분위기가 어색해지지는 않을까 염려했던 나에게는 천만다행인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소공작님, 검술의 단련에는 진척이 있으셨나요?”

“예, 뭐. 다행히 영애의 도움도 있기에 조금이나마 소득을 얻은 것 같기도 합니다.”

“후후, 소공작님께 도움이 될  있었다니 정말 기쁘기 그지없는 일이네요.”

이런 식으로 우리 둘은 정말 별 거 아닌 잡담을 나누며 정원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그런데, 그 때였다. 갑자기 공녀가 내 얼굴을 힐끗하고 쳐다보더니, 갑자기 몸을 약간 틀어 나의 품 안으로 한 발짝 살그머니 걸어 들어왔다.

“...영애...? 이건 무슨...?”

“쉿. 가만히 있어주세요, 소공작님.”

나의 귓가에 대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리 속삭이던 공녀는, 아주 느릿하기 그지없는 움직임으로 나의 어깨에 살며시 팔을 두른다. 마치 멀리서 누군가 이 광경을 본다면, 우리가 밀회를 가지고 있는 연인 사이라고 착각하기  좋은 자세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는 것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나와 공녀 사이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져 간다. 그녀의 부드러운 체향이 나를 간지럽히는 것과 동시에, 우리 둘의 얼굴이 맞닿으려고 하는  찰나의 순간-

탕-!

나의 뒤편에서 한 줄기 소음이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이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마법과도 같은 침묵은 순식간에 깨져 버리고 말았다.

“...아.”

순간, 흐릿해졌던 나의 이성이 다시금 돌아온다. 내가 다소 놀란 눈으로 공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는 나를 향해 배시시 웃으며 나를 향해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놀라게 해드렸다면 죄송해요. 다만, 소공작님의 어깨 위에 이러한 것이 묻어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신경 쓰였을 따름이랍니다.”

그리 말을 하며 공녀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거미줄 하나를 내게 보여주었다. 그랬었나. 방금 전, 내 어깨 위에 묻어 있던 거미줄을 떼어주려고 공녀는 나를 향해 그리 살며시 다가왔던 것이었나.

“...저기, 공녀님.”

“예, 소공작님.”

나는 아직도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는 공녀를 향해  가지 질문을 던졌다.

“방금 전, 제 뒤쪽에서 무슨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까?”

나의 그러한 질문에, 공녀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나를 향해 이리 답을 할 뿐이었다.

“글쎄요, 저는  모르겠는데요? 아마, 커다란 쥐새끼 한 마리가 부리나케 도망이라도 친 것이 아닐까요?”

****


‘...어째서?’

대체 어째서일까. 현재 사라는, 자신이 행하고 있는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어째서, 저만치에서 걸어오는 카인과 데카라즈난 공녀의 모습을 보고, 기둥 뒤의 스스로의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그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 마냥, 저들 앞에 나서도록 하자. 나는, 어떠한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그런 내가, 이렇게 쥐새끼와 같이 몸을 숨길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리라-

‘...아.’

...하지만, 그녀는 끝내 저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지 못하였다. 아니,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생각은 오직 하나 밖에 없었다.

카인은 정말, 공작이 말한 대로 데카라즈난 공녀와의 혼담을 받아들인 것일까?

그들은 그렇게, 미래를 함께하기로 약속한 관계가 되어버리고 만 것일까-

...물론, 속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데카라즈난 공작은 사라를 향해 ‘조만간 혼담을 넣어볼 생각’이라고 말을 하였을 뿐이지, 실제로 그에게 혼인을 주청하였다고는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저들은 단순히 지나가다가 우연히 이곳에서 서로를 마주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 모든 것은 우연일지도 몰랐다. 아니, 이성적으로 생각을 한다면, 그러한 추론이야말로 현재의 상황을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단 하나의 정답임이 틀림없겠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말로 만약의 일이기는 하였지만, 그녀가 떠올린 망상이 정말 사실이었다면? 카인이 데카라즈난 공작의 혼담을 받아들였다면? 그 결과, 저들이 정말 미래에 혼인을 약속한, 연인 관계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저들이 마주한 것은, 사실은 이곳에서 한 때의 단란한 시간을 보내기로 약조했던 것이라면?

“...하, 아...”

자신도 모르게, 숨이 가빠져온다. 가슴이 또다시, 저릿하게 아파온다. 지금 당장, 아무도 없는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결코 이대로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래,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야만 했다. 저들이 과연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인지, 이렇게 남몰래 만나 저 둘이서 무엇을 하려 하는지, 이 두 눈에 담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끝에, 방금 전 자신이 했던 상상이, 망상으로 격하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더 이상은, 아파하고 싶지 않았다. 편안해지고 싶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부과한 변명은, 그녀가 행하려는 음습하고 저열한 모든 행동을 정당화시켜주고 있었다. 사라는, 자기자신이 아니라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자신도 모르게, 숨을 크게 죽인다. 혹시 저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들킬까봐, 최대한 몸을 숙이고 웅크린다. 공녀라면몰라도, 카인에게 자신의 이런 초라한 모습을 들키기는, 너무나 싫었다. 스스로가 너무 비참하고,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

그들의 소리가, 점점 멀어져간다.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졌음을 눈치 챈 그녀는, 아주 살짝 고개를 내밀어, 손을 마주잡은  나란히 화원을 산책하고 있는 카인과 공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

둘의 모습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다. 카인은 말할 것도 없었고, 데카라즈난 공녀의 자태는 같은 여자인 사라가 보기에도, 무척 아름답기만 할 뿐이었다.

그랬다. 그들은, 어울렸다. 어느 누가 보아도, 현재 그들의 모습을 본다면 연인 관계의 남녀임이 틀림없다고 말을 할 것임이 분명하였다.

...그리고, 사라는 그것이 싫었다. 그냥, 너무도 싫었다.

이야기소리가 들려온다. 거리가 너무 멀어 저들이 대체 어떠한 대화를 나누는 것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 소리의 중간 중간에는, 희미한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아아, 그랬다. 저들은 웃고 있었다. 저들은 즐거워하고 있었다.

어쩌면, 저들은 이미 연인관계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가 되어, 그저 서로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저들은 결혼을 하기로 약조하였는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의 미래의 동반자가 되기로 약속하였는지도 모른다. 지금 저들은, 미래를 함께할 청사진을 꾸리는 것으로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랬다. 공녀의 웃음과 행복은, 사라에게 있어서는 슬픔과 절망이었다.

'...아아.'

나는 이토록 절망스러운데. 이토록 고통스러운데. 카인과 공녀는, 저곳에서 저토록 즐거워하고 있는 것인가. 대체, 어째서. 대체 왜.

이렇게 몰래 숨어 저들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이 너무도 추레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저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 끝에는, 오직 추악한 질투만이 깃들어 있을 뿐이었다.

대체 자신은 어째서, 그와 파혼을 했었던 것일까. 만약, 그와 자신이 지금도 약혼을 유지하고 있었더라면, 지금도 연인 관계에 있었더라면, 미래를 함께 하기로 약조했던 관계였다면!

...그랬다면, 지금 저 자리에 있는 것은 자신이었을 텐데. 그의 옆에서 웃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었을 텐데. 언제까지고 그의 옆자리를 독점할 수 있었을 텐데!

‘.....!’

그리고,  때였다. 갑자기 공녀가, 그의 품으로 파고든다. 갑자기,  남녀 주위의 분위기가 일변한다. 서로가 서로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본다. 사라의 심장이 두근거린다. 금방이라도 파열할 듯, 미친 듯이 쿵쾅거린다. 카인과, 공녀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진다. 공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흔들린다. 공녀의 살짝 벌려진 붉은 입술이, 그의 입술을 향해 다가간다. 그렇게, 두 남녀의 입술이 맞닿으려고 하는 찰나-

탕-!

 이상은, 지켜볼 수가 없었다. 몸을 돌린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 것도 떠올리지 않고, 그녀는 도망이라도 치듯 어딘가를 향해 달려갔다.

“...하.”

달리고, 또 달렸다. 쉬지 않고 달렸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어떠한 인적도 없는 곳에 도달해서야, 그녀는 겨우 멈춰서고 숨을 돌릴  있었다.

“우... 으...”

사라의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어쩌서 나는, 이토록 아파야만 하는 것일까. 차라리 몰랐다면. 그에게서 애정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면.

그랬더라면, 지금 자신은 이토록 아픔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누구를 향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증오가, 점차 사라를 사로잡아간다.

끝없는 절망의수렁 속으로, 그녀는 하염없이 침잠해나간다.

그렇게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은 모든 빛을 잃은 채, 무채색으로 변화하고 말았다.

세상은, 참으로 슬픔만이 가득하기만  뿐이었다.

...적어도, 사라에게는 그러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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