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7화 〉10.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 05 (87/201)



〈 87화 〉10.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 05

사라와 데카라즈난 공작이 예의 그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마치고  며칠 뒤, 사라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움켜잡은 채 저택의 뒤편을 홀로 산책하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바람이라도 쐬며, 스스로의 머리를 식히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그  공작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다시금 떠올리기만 하면, 사라는 자신의 머리가 너무도 복잡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머리가 아팠다. 어떻게 본다면, 짜증이 나는  같기도 하였다. 스스로조차 자신이 어떠한 상태에 놓여있는 것인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날 이후 아무리 자기 자신을 진정시키려고 해도,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말일까.’

그 날, 공작은 사라에게 이리 말하였다. 조만간, 카인과 데카라즈난 공녀의 혼담을 추진해볼 계획이라고. 에스텔 공작가에 매파를 넣어보는 일 또한, 고려해보고 있는 중이라고-

‘...아니겠지. 그냥, 한 번 꺼내본 말인 것이 분명하겠지.’

그녀 또한 카인과  차례 약혼을 치러본 경험이 있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무릇 혼인이란, 공작이 그녀에게 말했던 것처럼 번갯불에 콩을 구워먹듯 성사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카인과 사라가 약혼을 하게 된 배경에, 에스텔 공작가와 세르나드 백작가의 여러 정치적 권익이 오고 갔던 것 마냥 두 가문 사이에 이루어지는 중요한 ‘거래’가 바로 혼인이라는 행사의 정체였단 말이다.

조금 노골적으로 표현해 보자면, 혼인이란 각 가문의 자식을 담보로 하여 이루어지는 일종의 장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의 4대 공작가쯤 되는 대단한 가문이라도 결코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4대 공작가쯤 되는 가문이기에 더욱더 혼인을 맺는 것에 있어서 신중을 기할 것임이 분명하겠지.

확실하였다. 데카라즈난 공작이 자신의 딸과 카인 사이의 정략혼을 고려하고 있다는 그의 말은, 말 그대로 ‘고려’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단 말이다. 만약, 공작이 진지하게 그들 사이에 정략혼을 추진하려 마음을 먹었더라면, 그녀를 불러 그 따위 질문을 던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애당초 외부인이나 다름없는 그녀에게 에스텔 소공작과 데카라즈난 공녀가 약혼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고급정보를 뭐하러 던져주겠는가?

이리저리 재어보아도 그들 사이에 정말 혼담이 성사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모든 것은 자신의 기우에 불과할 터였다. 공작이 툭하고 던진 한마디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자신이 그저 한심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 이성적으로 생각을 한다면, 분명 사라의 추측이 옳은 것이 분명하겠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 속에서는 말도 안 되는 망상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되풀이되고 있었다.

만약, 정말로 어디까지나 만약의 일이었다. 현실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일어나서는 아니 되는 일이긴 하지만, 카인이 데카라즈난 공녀와의 정략혼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면? 과거, 에스텔 공작가가 세르나드 백작가의 ‘부유함’이라는 요인을 바라보고 카인과 사라의 약혼을 성사시켰듯이, 이번에도 데카라즈난 공작가의 드높은 위세와 공녀가 가져올 막대한 지참금에 현혹되어 카인이 혼담을 받아들이기로 한다면?

...말도 안 된다. 사라가 아는 카인  에스텔이라는 남자는, 고작해야 물질적인 무언가에 현혹되어 그런 중대한 결정을 쉽사리 내릴만한 경박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사라는 카인이 자신의 영지민들에 대해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지 너무도  알고 있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는 전형적인 귀족이었다. 나쁜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영지민들을 그저 세금을 창출하는 수입원으로 생각하는 여타 탐욕스런 귀족들과는 달리, 그는 영지민들을 긍휼히 여기고 아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 마치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것과 같은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는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과거, 카인의 개인적인 면모를 전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사라 또한 카인의 그러한 모습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그러한 면모마저 없었더라면 사라는 진작 그를 향한 모든 마음을 거두어 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의 약혼 관계 또한 더욱 빠른 시일 내에 파탄이 나버리고 말았겠지. 애당초, 세르나드 백작가에서는 에스텔 공작가와의 약혼 관계를 오래 유지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사라에게 있어 카인의 그러한 면모는 불안 요소가 되기만 할 뿐이었다. 사라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현재의 에스텔 공작령은, 물질적으로 많이 빈곤한 상태라는 것을. 그런 에스텔 공작령을 향해, 데카라즈난 공작이 물질적 지원을 미끼삼아 그에게 정략혼을 청한다면? 그래도 그는 데카라즈난 공녀와의 혼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뿌리칠 수 있을까?

‘...아니야. 카인이, 그럴 리가 없어.’

두려웠다. 그가 다른 여자와 혼인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왠지 모르게 생살이 찢겨나가는  같은 고통을 느끼는 자신이 이곳에 있었다. 그저 상상만 했을 뿐인데, 가슴이 너무도 아파 견딜 수가 없는 자신이 이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그녀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사태란, 카인과 데카라즈난 공녀가 진정으로 사랑에 빠지게 될 지도 모른다는 일이었다.

‘...아니야.’

문득, 상상해버리고 말았다. 만약, 정말로 카인과 데카라즈난 공녀가,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게 될 지에 대하여.

처음에는 정략혼이라는 관계에서 출발한, 사무적이며 딱딱한 관계였다. 하지만,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산책을 거닐고, 함께 많은 것을 더불어 나가며, 그들의 사이는 점차 가까워져 가기 시작하였다.

‘...아니야.’

어쩌면, 그것은 무척 사소한 차이에 불과할 지도 몰랐다. 단지, 가까이서 지낸 시간이 길었던 만큼 둘 사이의 허물이 없어진 것에 불과할 지도 몰랐다. 다만, 카인이 데카라즈난 공녀를 향해 조금 더 따스하게 대해주며, 공녀 또한 그러한 카인이 싫지만은 않은 듯 수줍은 듯이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 광경은, 마치 너무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천생연분을 보는 듯 하였다. 그들의 모습은,참으로 아름답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싫어.’

서로를 낯설어하던 한 쌍의 남녀는, 그렇게 가까워져 갔다. 처음에는 서로를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것조차 쑥스러움을 느끼곤 하였지만, 그들 사이에 많은 시간을 공유해나갈수록 점차 장벽은 허물어져 갔다. 어느새 서로의 손끝이 살짝 스치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아 하게 되었으며, 함께 산책을 할 때면 카인이 공녀의 손을 살포시 잡아주고는 하였다. 공녀는 카인의 듬직한 손길을 느끼며 자신의 얼굴을 살짝 붉히곤 하였지만, 막상 또 그리 싫지만은 않은 듯 그의 손을 마주잡을 따름이었다.

‘...싫다고.’

그렇게 남녀는 점차 연인이 되어갔다. 어느 누가 보아도,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는 완벽한 연인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대하는 음색은 너무도 따스하기만 하였다. 날이 갈수록 점차, 둘만의 시간은 늘어가기만 하였다. 손을 마주잡고, 서로를 포옹하는 것도 모자라, 그들은 입을 맞추기에 이르렀다. 서로의 혀가 서로의 입 안을 탐닉하는 그 광경을 몰래 바라보며, 저들은 연인 사이니까 어쩔  없다고 자위하는 자신의 추레한 모습이 비춰질 뿐이었다.

‘...그만해.’

연인 관계의 남녀 사이에, 드디어 결혼이 성사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성사된 결혼이었지만, 동시에 그들 사이에는 오직 사랑만이 깃들어 있을 뿐이었다. 사라만을 제외한 모든 하객들이, 선남선녀의 결혼을 축하해주기만 할 따름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홀로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듯 어두운 눈동자로 그들을 바라보는 사라의 얼굴은, 실로 볼썽사납기 짝이 없을 뿐이었다.

‘제발.’

공작으로서의 정장을 입은 카인과,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공녀가, 서로 반지를 교환한다. 카인은 자신의 왼손에 끼어져 있던, 한 때의 약혼반지를 헌신짝처럼 빼서 내던지는 것과 동시에, 공녀에게서 받은 결혼반지를 왼손 약지에 끼운다. 카인이 내던진 약혼반지는, 마치 쓰레기마냥 결혼식장 구석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사라는 바닥에서 내뒹구는 그와 자신의 약혼반지를 보며, 마치 저 반지의 처지가 현재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그러지 마. 제발.’

마침내, 두 가문 사이에 결혼이 성사된다. 모두의 축복 아래, 두 개의 입술이 교차하며 부드러운 숨결이 서로의 얼굴을 간지럽힌다. 하객들은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향해 환호와 박수를 보낸다. 오직 사라만이, 그들을 바라보며 질투와, 절망과, 증오와, 후회가 범벅이 된 일그러진 얼굴을 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카인.’

가슴이 저미어온다. 어째서, 어째서 자신은 지금 저들의 결혼식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일까. 만약, 만약 자신이 그와 파혼 따위 하지 않았더라면, 그와 약혼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해나가고 있었더라면, 가문의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그에게 사랑한다고 매달렸었더라면!

“아아아아아악!”

끝내 버티지 못한 사라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망상이었다. 전부 망상이었고, 상상에 불과했다. 만약, 카인과 공녀가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게 되어, 결혼까지 도달하게 된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지게 될까를 가정한, 상상에 지나지 않았단 말이다.

...하지만, 아팠다. 그저 단순한 상상이었음에도, 모든 것은 자신이 꾸며낸 망상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음에도, 가슴이 욱신거리기만 하였다. 아니, 실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방금 전에 했던 상상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전부 그녀가 지닌 약함이며, 그녀의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있던 자신의 어둠이었던 것이다.

“...하.”

우스웠다. 스스로가 너무도 못나보였다. 고작해야 그따위 머저리 같은 망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가슴이 저미어 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거늘, 어쩌다가 자신이 이렇게 추한 여자가  것일까. 대체 어쩌다가. 대체 왜.


난, 네가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의 품에 안기는 꼴을 보는 것은, 정말로 싫어.

- 그러니, 이제 그만 일어나. 내가 아는 너는, 그렇게 약한 여자가 아니었잖아.

“...나,쁜 놈...”

뇌리를 스쳐가는 어느 한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사라는 쪼그려 앉아 무릎에 자신의 얼굴을 파묻어 버리고 말았다. 전부 다,  남자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그 남자가 원인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머저리가 되어 버린 것도, 그의 얼굴만 떠올려도 가슴이 쿵쾅거리게 되어 버린 것도, 다른 여자와 함께 있다는 상상만 하면 심장이 후벼 파듯 아파오게 되어 버린 것도, 전부  남자가 원인이었다.

...하지만, 사라는 끝내 그를 탓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전부 자신의 잘못이었기에.

그를 탐탁지 않아  것도 자신이었으며, 그가 자신을 사랑할  그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도 자신이었다. 그의 침대 위에 하얀 머리 소녀가 있는 것을 보며 그의 해명을 들으려 생각지도 않았던  또한 자신이었으며, 세르나드 백작가로 달려가 그와 파혼을 하고 싶다며 말을 꺼낸 것도 자신이었다.

그래, 모두 자신이 원인이었으며, 자신이 택한 선택으로 말미암아 벌어진 결과였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이 이토록 아파하는 것도, 슬퍼하는 것도, 후회하는 것도 자신이 감당해야  몫이리라. 자신은 벌을 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때, 그를 보답받지 못할 짝사랑 속에서 아파하게 했던 원죄를 지금 다시 그대로 돌려받고 있는 중이리라.

자신은, 그에게 있어 참으로 나쁜 여자였으니까.

그런데, 그 때였다. 어디선가, 남녀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려온다.

“아, 소공작님. 이런 곳에서 뵙네요. 후원에는 어떤 일로 오신 것인가요?”

“...데카라즈난 영애?”

카인과, 노엘 폰 데카라즈난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서로를 마주하게 된 장면을 목격하고 만 것이다.

순간, 그녀는 숨이 그대로 멎는 듯한 감각을 맛봐야만 했다. 저곳에 서있는 이들을 향해 무어라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무언가가 걸린 듯 입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았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이내 그녀가 주저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당황한 사라는, 자신도 모르게 가까이에 있던 기둥 뒤에 자신의 몸을 숨기고 말았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 지도 몰랐다. 어째서 몸을 숨기는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와 공녀가  둘이서 있을 때, 대체 무엇을  것인지 알고 싶다는 음침하고 역겨운 욕망만이, 그녀의 마음을 잠식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지금 순간, 사라 세르나드는 너무도 추했고, 음험했으며.

참으로 불행하기만 한.

한 명의 여인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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