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10.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 04
어느 날 저녁, 데카라즈난 공작과 그의 딸인 노엘은 식사를 마치고 난 후 입가심으로서 느긋하게 차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소공작인 페르젤은 해야 할 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기에, 데카라즈난 공작은 실로 오랜만에 자신의 딸과 단 둘이서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노엘은 자신의 아버지와 이리 단 둘이서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이 기쁘기는 하였지만, 동시에 공작이 자신에게 할 말이 있어 이리 부른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이리 앉혀두고 어떠한 질문을 던질 것 인지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짐작을 하고 있었다.
“노엘.”
“예, 아버님.”
공작은 노엘과 몇 가지 환담을 나눈 끝에, 드디어 본론을 꺼내들기 시작하였다. 공작의 진지한 태도에, 노엘 또한 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그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 자세를 바로 하였다.
“얼마 전, 연무장에서 에스텔 소공작과의 대련에 임하였다고 들었다. 그래, 네가 직접 본 에스텔 소공작은 어떠한 인물이었느냐?”
공작은 대련의 결과가 어떠하였느냐는 질문을 묻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세간에 떠도는 소문 중에 절반만이 사실이더라도 노엘이 그를 이길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가 딸에게 진정으로 묻고자 했던 것은, 노엘의 시점에서 바라본 에스텔 소공작의 인간상과 그에 대한 평가였다.
데카라즈난 공작 또한 에스텔 소공작과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그 결과, 그는 소공작이 꽤나 됨됨이가 바른, 상당히 괜찮은 청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일신상의 무력(武力) 또한 그만하면 나무랄 데가 없었으며, 가문 또한 데카라즈난 공작가에 비해 전혀 부족할 바가 없는 뼈대가 있는 가문이었다. 이제 공작에게 있어 남아 있는 것은, 당사자라고할 수 있는 자신의 딸이 그에 대해 어떠한 감정을 품고 있느냐, 이것뿐이었다.
“...에스텔 소공작님이 어떠한 사람이었냐는 말씀이신가요?”
공작의 갑작스런 질문에, 노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의 얼굴을 상기시키고 말았다. 노엘이 보기에, 에스텔 소공작은 그녀가 그리던 이상적인무인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는 강하였으며, 그 무력에 걸맞는 인성을 겸비하기까지 하였다. 거기다가, 그에 비하면 약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자신을 배려하는 매너까지 갖추고있는 인물이었다.
비록 그와 얼굴을 맞대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은 아니지만, 불행하게도 노엘은 한바탕 검무(劍舞)를 나눈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에 대해 파악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닌, 다소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여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콩깍지가 씌워져버리고 만 그녀의 눈에는 에스텔 소공작이 그저 좋은 사람으로만 비춰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 분은, 생각 외로 괜찮은 분이셨던 것 같아요. 아버님.”
공녀로서의 체면이 있었기에 노엘은 최대한 다소곳한 태도를 유지하며 대답을 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을 하는 노엘의 얼굴을 평상시에 냉랭한 표정과는 확연히 다른, 어딘가 다소 들뜬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에스텔 소공작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마다 확연하게 달라지는 딸의 모습을 보며, 그제야 데카라즈난 공작은 마음을 확실히 굳힐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와의 혼인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느냐?”
“...호, 혼인이요? 에스텔 소공작과, 저와의 혼인 말씀이신가요?”
“정확히 말하자면 에스텔 공작가와의 정략혼일 테지만 말이다.”
공작의 말을들은 순간, 노엘의 몸은 순간적으로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야기였을 뿐더러, 마음 속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던 욕망이 그대로 들켜버린 것과 같은 부끄러움이 그녀를 감싸 안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러 가지를 재어본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우선, 에스텔 소공작의 얼굴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굳이 미추를 논하고자 한다면, 그는 충분히 잘생긴 축에 속하였다. 노엘의 오라비인 페르젤이 원체 미남이었던지라 미의 기준이 꽤나 높은 노엘조차, 에스텔 소공작의 얼굴을 보며 그리 나쁜 감상을 느끼지는 못하였으니 그 또한 상당한 미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리라.
또한, 그는 여타 무례하기 짝이 없는 귀족가의 요즘 젊은이들과는 다르게 행동 하나하나에 사려가 깃들어 있었고 언뜻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의 이면에는 그녀를 향한 배려가 숨어 있었다. 그만하면, 성격적인 측면에서도 나무랄 데가 없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결정적으로, 그는 강하였다. 노엘 자신보다 훨씬 강하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노엘 폰 데카라즈난이라는 여인의 본질은 바로 무인이었다. 무인에게 있어 자기 자신을 상징하는 정체성이란 오직 스스로가 일평생에 걸쳐 쌓아올린 무(武) 그 자체가 아니었던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에스텔 소공작은 자신을 차지할 자격이 차고 넘친다고 말할 수 있었다. 예로부터 승자는 패자에게서 모든 것을 가져갈 권리가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는 자신을 꺾었으며, 자신은 그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에스텔 소공작은 자신을 취할 권리가 충분하고도남았다.
딱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이 있다면 에스텔 소공작에게는 여성과 얽힌 소문이 너무나도 많다는 점인데-
‘뭐, 그다지 상관없지 않나?’
노엘은 에스텔 소공작의 얼굴을 떠올려보더니 이내 무언가를 납득이라도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확실히, 여성편력이 복잡하다는 수준을 넘어서 난잡하다는 감상이 들 정도이긴 했지만 원래 잘난 남자의 옆에는 여자들이 득실거리는 것이 ‘상식’ 아니던가.
거기다가, 과거 시점이라면 몰라도 현재의 그의 옆에는 여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사라 세르나드와는 파혼을 했으니 이미 흘러간 과거라고 할 수 있으며, 그녀에게 건방지게 굴던 하얀 머리 여자는 잘 쳐봐야 측실 같은 존재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비앙카 델 카스타나와 약혼을 하기 직전까지 갔었다 했지만, 이내 정체불명의 습격으로 인해 약혼 그 자체가 흐지부지 되었다고 들었다.
황녀가 그에게 관심을 가져 에스텔 공작가를 들락 거렸다는 소문도 있긴 했지만, 설마 그것이 남녀 사이의 호기심에서 발로한 관심은 아닐 것이다. 어찌 한 명의 남자가 이토록 단기간에 그리 많은 여자들을 꼬실 수가 있겠는가?
결정적으로, 노엘은 자신이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름답다는 소리를 지긋지긋하게 들어본 몸이었으니까. 설마 자신이 다른 여자에게 밀릴 지도 모른 생각은 쉽사리 들 지가 않았단 말이다.
‘어차피, 결혼을 해야만 한다면 에스텔 소공작도 그다지 나쁜 선택은 아니지.’
순식간에 계산을 끝마친 노엘이 데카라즈난 공작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명백한, 수긍의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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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어요. 공작님.”
데카라즈난 공작의 집무실. 공작의 부름을 받은 사라가 집무실에 들어서자, 데카라즈난 공작은 웃으며 그녀를 환대해주었다.
“어서 오게나, 세르나드 영애. 사전에 별다른 기별도 없이 이리 갑작스럽게 영애를 오라 가라 한 것에 대해서는 미리 사과를 하도록 하지.”
“아니에요. 공작님의 부름이라면 전 언제든 환영이랍니다.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으니 안심하셔도 돼요.”
안 그래도 데카라즈난 공작가까지 왔는데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 것이냐는 숙부라는 인간의 잔소리가 지긋지긋하던 찰나였다. 이렇게 공작과 단 둘이서 만남을 가졌다는 말을 듣는다면 당분간은 그녀에게 별 말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였으니, 이 만남은 그녀에게 있어서도 이득이라 할 수있었다.
“흠, 다름이 아니라 영애에게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네. 구체적으로 말을 하자면, 에스텔 소공작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은 것이라네.”
“예?”
“아, 오해는 하지 말도록 하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 영애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에스텔 소공작은 어떠한 인물인 것인지, 그의 평소의 됨됨이가 어떠한지, 그런 사소한 신변잡기에 대한 사항이니 말일세.”
데카라즈난 공작의 해명 아닌 해명에, 순간적으로 사라의 두 눈에는 의아함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런데, 어째서 제게 그러한 질문을 하시는 것인가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에스텔 소공작이 현재 이곳에 머무르고 있건만 왜 그러한 질문을 자신에게 하는 것이란 말인가?
사라의 질문에, 데카라즈난 공작은 사라를 향해 쓴웃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이러한 질문을 소공작 본인에게 하기는 좀 부담이 되었다네. 그리고, 영애라면 개인적으로 소공작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이러한 질문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뭐, 공작의 말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사라 세르나드라고 하는 여인은 카인 폰 에스텔이라고 하는 남자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기는 하였으니까. 그래, 카인과 ‘전 약혼자 사이’라는 구질구질한 관계로 묶여 있다는 사소한사실만 제한다면 말이다. 한 때 약혼 관계에 있던 남자에 대한 신상명세를 묻는 질문 따위, 원래는 그다지 달갑지 않아야 정상이겠지.
하지만, 공작이 자신에게 그러한 질문을 하는 순간, 사라는 왠지 모르게 들뜬 기분을 맛보고 말았다. 그 이유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누군가가 자신에게 그런 사적인 질문을 던질 정도로 자신은 카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묘한 충족감이 전신을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 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무슨 이야기를 해야,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며, 자신과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었는지 확실히 알려줄 수 있을까.
떠오른다. 그와 처음 마주했을 무렵부터 시작해서, 결국 파혼에 이르기까지, 그와 있었던 많은 일들이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그 때만 하더라도, 그는 참 못나 보이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외모만을 바라보고, 자신을 향해 심장이라도 빼서 건넬 것 같이 굴던 그 때의 그는, 그녀의 겉모습에 홀딱 반해 그녀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수많은 멍청이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런 한심한 남자가 정녕 자신의 약혼자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는 많이 변하였다. 우선, 그는 많이 점잖아졌다. 몇 달 보지 않은 사이에 나이를 10년 정도는 먹은 것처럼, 행동 하나하나에서 진중함이 묻어나왔다.
또한, 그는 책임감이 생겼다. 약혼 관계이니 무작정 자신을 좋아해 달라하던 과거와는 달리, 그녀가 처해있는 상황을 누구보다 빠르게 파악하고 난 후 그녀를 구해주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무엇보다 멋있어졌다. 자신을 구해주겠다고 속삭이며 그녀를 꼭 안아준 그 순간, 그녀는 그대로 심장이 파열해버릴 것 같은 두근거림을 맛보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반칙이었다. 그 어떠한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너를 구해주겠노라고 선언하는 남자를 향해, 반하지 않고 배길 수 있는 여자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건 어디까지나 여담이긴 하였지만, 사라는 앞에서 자신을 리드해주는 남자가 취향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카인의 모습에 대해 차츰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왠지 모를 부끄러움 탓에 더듬거리며 말을 하였지만, 어느새 그녀의 가슴은 차츰 달아오르기 시작하여,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공작을 향해 들뜬 것 마냥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사라의 입에서 카인 폰 에스텔의 칭찬 일색이 흘러나오는 광경을 보며, 데카라즈난 공작은 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원래 한 때 연인 사이였던 남녀가 헤어지게 된다면 그 둘의 사이는 빈말이라도 좋다고 표현할 수 없게 변모하는 법. 하지만 보라. 현재 사라 세르나드의 입에서는 카인 폰 에스텔에 대한 장점만이 흘러나오고 있지 않고 있는가.
역시, 그 둘이 헤어지게 된 이유가 카인 폰 에스텔의 외도 때문이니 어쩌니 하는 것은 헛소문에 불과했던 것이다. 사실, 정략혼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성사되는 결혼이니 만큼 깨어지기도 무척 쉬었다. 이렇게 잘 맞는 한 쌍의 남녀가 파혼을 하게 된 이면에는 정치적 목적이 개입하였던 것이 분명하리라-
“그쯤이면 충분한 것 같네, 세르나드 영애.”
공작은 사라를 향해 푸근하게 웃으며 이리 말을 하였다.
“덕분에 마음을 굳히는 것에 큰 도움이 되었어. 영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표하고 싶네.”
“...제가, 공작님께 도움이 되다니요?”
공작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라를 향해, 그제야 공작은 자신이 사라를 향해 그러한 질문을 던졌던 의도를 밝혔다.
“아, 그러고 보니 영애에게 미리 말을 하지 않았었군. 내가 에스텔 소공작의 일상적인 면모에 대해 알고 싶어 했던 까닭은, 소공작과 나의 하나뿐인 여식의 혼담을 추진해보기 위해서였다네.”
“...예?”
그 말을 들은 순간, 사라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한 때 약혼 관계였던 영애가 그리 말할 정도라면, 에스텔 소공작은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이겠지. 조만간 빠른 시일 내에 에스텔 공작가에 매파를 넣어볼 생각이라네. 그것도 아니라면 소공작과 직접 혼담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데카라즈난 공작이 껄껄거리며 내뱉는 말을 들으며, 사라는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의 주먹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공작의 입에서 ‘혼담’이라는 말이 새어나오자마자, 그녀는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기만 할 뿐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에 대한 나쁜 말, 험담을 늘어놓도록 하자. 자신이 알고 있는 그의 단점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열거한다면, 어쩌면 데카라즈난 공작은 자신의 결정을 철회할지도 모른다-
“...저, 공작님.”
“왜 그러는가, 세르나드 영애?”
“...하지만, 에스텔 소공작, 그러니까 카인은...”
...하지만 끝끝내, 그녀는 카인에 대한 결점을 말하지 못했다. 아니, 말할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다만, 자신은 다른 사람 앞에서 카인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아, 그랬던 것이다. 그가 자신을 끌어안으며 구해준다고 속삭였던 그 순간, 자신은 이미-
‘...카인.’
가슴이 저미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사라는 두 눈을 질끈하고 감아버리고 말았다.
"왜 그러는가, 영애?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인가?"
"...아무 것도, 아니에요. 공작님."
결국 사라는, 공작의 집무실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 카인의 결점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하였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욱신거리는 심장만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을 따름이었다.
...질투란, 참으로 추한 녀석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