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10.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 03
‘...빌어먹을, 진짜.’
노엘 폰 데카라즈난과의 대련을 끝내고 연무장을 빠져 나오는 길, 카인은 아직도 자신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음을 깨닫고 말았다. 방금 전, 노엘 그 여자와 정면에서 검을 나눈 결과물이었다. 그 여자의 검격이 어찌나 가열 차던지, 카인은 검을 나누는 내내 하마터면 손에서 검을 놓칠 뻔 했을 정도였다. 마지막 순간, 노엘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포자기하듯 내지른 검을 ‘흐르는 별’을 통해 고스란히 되돌려주지 않았더라면, 분명 패배한 쪽은 카인이었겠지.
생각해보면 지금으로부터 10년 뒤, 황녀보다는 못하지만 그에 맞먹을 정도의 검기(劍技)와 기량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인물이 바로 데카라즈난 공녀였다. 원래 같으면 그녀에게 승리를 거두기는커녕 검을 맞대는 것조차 불가능 했을 것이다.
이것도 전부 회귀하기 전, 황녀의 아래에서 미친 듯이 구르며 검술을 갈고 닦았던 경험 덕택이라 해야 할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황녀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 당시 황녀의 손에 어찌나 두들겨 맞았던지 아직까지도 간간히 그가 꾸는 악몽 속에 그녀가 찬조출현을 할 때가 있었으니까.
그렇게 카인이 실로 지친다는 듯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후들거리는 오른팔을 주무르고 있을 때였다. 문득, 그의 옆에서 왠지 모르게 뾰로통한 기색을 풍기고 있는 아리아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고 말았다.
“아리아, 표정이 왜 그러니?”
카인이 의아하다는 기색으로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자, 그녀는 흥하고 그에게서 고개를 획하니 돌렸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아무 문제도 없으니까 카인님께서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
세상 천지에 어떠한 얼간이 같은 남자일지라도 그러한 대답을 듣고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리는 없으리라.
‘...얘는 또 왜 이러는 거야.’
그와 함께 연무장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분명 기분이 좋아보였던 것 같은데, 갑자기 왜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방금 전 노엘 폰 데카라즈난과 행하였던 대련에서 아리아의 심기를 거스를만한 요소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단 말이다.
‘...사춘기 소녀 특유의 감수성, 뭐 그런 건가?’
그렇게 카인이 아리아를 보며 영문을 몰라 하고 있을 무렵, 아리아는 아리아대로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만 할 뿐이었다. 어찌나 짜증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는지, 카인을 제외한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바로 헤벌쭉한 얼굴을 하며 카인을 바라보던 노엘 폰 데카라즈난이었다.
‘더러운 계집 같으니.’
아리아는 방금 전, 매력적인 수컷을 바라보는 발정 난 암캐의 표정을 지어보이던 노엘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 여자는 방금 전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가관이었던 것인지 알고나 있을까.
아니, 당연히 모르겠지. 원래, 창녀 같은 여자일수록 스스로가 창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법이었으니까. 또한, 그런 여자들은 바닥 밑에 지하실이 있다는 것을 쉬이 인정하지 못하는 구질구질함까지 겸비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그의 곁에는 아리아 자신을 제외하고도 이제 한 손으로는 도저히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여자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판국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오늘 처음 마주한 남자에게 암캐 같은 눈을 하는 저런 창녀 같은 여자까지 추가가 된다?
‘안 돼, 그것만은 절대 안 돼-!’
이대로 가다가는, 다른 여자들과 월화수목금토일 중 어떠한 요일에 그의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제비뽑기라도 해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몰랐다. 안 그래도 카인의 옆에는 도저히 제정신이라고는 할 수 없는 비앙카 델 카스타나라던가, 관음증에 걸린 엘프인 키리에 엘 데나리스 같은 여자들이 득실거리는 판국이었다. 이제 와,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계집이 그의 옆을 얼쩡거리는 것을 용납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겠는가?
하여간, 꼴에 공녀라고 어디서 남자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이래서, 너무 잘난 주인을 섬기는 것 또한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발상의 전환을 하고 나니, 아리아는 자신의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물론, 아리아의 급격한 표정 변화를 옆에서 실시간으로 관람하고 있는 카인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지만.
“...아.”
그리고 그 때였다. 자신의 방을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카인은, 코너에서 불쑥하고 모습을 드러낸 한 여인의 얼굴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렇다. 하필이면 다른 곳으로 피할 구석도 없는 복도의 한 가운데에서, 사라 세르나드와 얼굴을 마주하고 만 것이었다.
“.....”
“.....”
서로가 서로를 향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며 그저 떨떠름한 표정으로 상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하니, 두 사람 사이에 순식간에 어색하기 짝이 없는 기류가 형성이 되고 말았다. 어찌 보자면, 그것은 실로 당연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원래, 연인 관계에 있던 남녀가 헤어지고 난 이후에는, 자동적으로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결국, 지옥과도 같은 침묵을 이겨내지 못하고 패배를 시인해버린 쪽은 카인이었다.
“...세르나드 영애. 먼저 지나가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아니에요, 에스텔 소공작. 어찌 제가 저의 용무를 앞세워, 소공작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있겠나요. 소공작님 이야말로, 먼저 지나가시지요.”
그것은, 옆에서 듣고 있는 사람에게마저 숨이 턱턱 막히는 듯한 기분을 안겨다주는 대화였다. 두 사람 사이는, 아무리 보아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둘의 이러한 작태를 보며 사라의 뒤에서 그녀를 호위하고 있던 중년인은 그제야 무언가를 납득하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의 사이는 이 모양 이 꼴이어야 비로소 정상적이었던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얼마 전, 실로 오랜만에 사라를 마주하였을 당시, 왠지 모르게 비정상적으로 흥분한 모습을 보이며 그녀와 단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던 에스텔 소공작이 이상했던 것이겠지.
‘...아니, 소공작이 젊은 나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리 이상한 점은 아닌데.’
원래 젊은이들이란 혈기에 휩쓸려 순간적인 충동을 잘 참아내지 못하는 법이 아니던가? 또한, 조카인 사라 세르나드를 따라 에스텔 공작가를 여러 번 들락거렸던 중년인은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얼간이가 어떠한 남자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찌 잊어버릴 수가 있겠는가. 사라와 약혼을 한 그 순간부터 그녀의 외모에 푹 빠져 매일같이 꽃다발이며 편지를 보내는 것도 모자라, 그녀에게 득달 같이 달려들어 질척거리던 그 꼴사나운 모습에 대하여.
최근 들어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며 에스텔 소공작에 대한 위상이 조금 변화하기는 했지만 중년인이 기억하고 있는 에스텔 소공작은 그저 운 좋게 공작가에서 태어난, 덜떨어진 놈에 불과하였다. 그런 녀석이 사라와 단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해봐야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를 나누었겠는가? 고작해야 사라를 붙들고서 과거에 있었던 구질구질한 추억 회상이나 했었을 것이 분명하겠지.
그렇게, 중년인은 카인과 사라의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잠정적인 결론을 내려버리고 말았다. 저 둘의 사이에는, 더 이상 관계라고 지칭할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고.
그리고 카인을 바라보는 중년인의 눈초리 속에 경멸이라는 감정이 섞여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사라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연극은 꽤나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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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아리아. 과연 해주(解呪)가 가능한 것 같으니?”
그 개 같은 집구석에서 사라를 탈출시키기로 결정을 내린 이후, 우선 그들의 계획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요소는 바로 사라를 감싸고 있는 그 빌어먹을 놈의 저주였다. 카인이 사라를 감싸고 있는 저주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는 그녀가 어떠한 특정 키워드를 말하려 시도할 때마다 그녀의 입을 다물게 한다는 점 뿐이었단 말이다.
만약 이 저주에 위치 추적 기능이라도 달려 있다면 탈출 시도 그 자체가 무위로 돌아갈 것이 뻔하였으니, 과연 이 저주가 해제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필수라고 할 수 있었다.
“...현재의 제 능력으로는 해주가 불가능한 것 같아요. 너무 지독한 저주에요. 아마, 교황급 성직자라면 어떻게든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음.”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경지에 이른 마법사 한 명이 가볍게 해주할 수 있는 저주였다면 이미 사라가 손을 쓰고도 남았겠지. 그녀가 아무리 허수아비라고 해도 명색이 대륙에서 부유한 것으로 치자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세르나드 백작가의 여식이었으니까.
‘...나중에 성녀한테 부탁하면 될 것 같긴 한데.’
하지만 지금쯤 에스텔 공작가에서 나와 법황국으로 돌아갔을성녀를 호출할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으니 결국 저주를 해소할 방도 따위는 없다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음, 그래도 저주 자체에 대한 분석은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어요. 피시전자의 신경 그 자체에 간섭을 해서 특정 키워드를 내뱉지 못하게 하는 것 말고는 별 다른 기능은 없는 것 같아요.”
아리아의 설명에 카인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본격적으로 너를 구출한 방안을 떠들어도 정보가 새어나갈 염려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겠군.”
카인의 발언에 사라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정말 무모한 계획이야. 카인, 이곳은 다른 곳도 아닌 데카라즈난 공작가야. 제국에서 가장 위세가 높은 4대 공작가 중 한 곳이라고. 경비의 수준도, 그 엄중함도, 여타 어중이떠중이 같은 귀족가와는 차원이 다르단 말이야. 이건, 정말로 미친 짓이라고.”
사라의 말에 카인은 피식 웃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한 가지 물어보도록 하지. 우리가 만약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마주하여 이런 계획을 세우고 탈출시도를 감행했더라면, 거기라고 해서 너를 구할 확률이 상승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인가? 아마 절대 그렇다고는 말하지 못할 걸. 내가 생각하기에, 이곳이 다름 아닌 데카라즈난 공작가이기 때문에 네게 달라붙은 쥐새끼들도 함부로 경거망동을 하지 못한다는 분명한 이점도 있는 것 같은데?”
“.....”
카인의 말은 옳았다. 사라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세르나드 백작가에서 곱게 길러낸 ‘상품’이었다. 혹여 그런 ‘상품’이 훼손당하거나 분실된다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그녀의 뒤에는 언제나 가문에서 길러낸 ‘사냥개’들이 졸졸 따라붙고 있는 형국이었단 말이다.
그리고 그런 ‘사냥개’들이라 할지라도 데카라즈난 공작가에서 만큼은 감히 경거망동을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 어떠한 간섭도 없이 카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사실에 대한 반증이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네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단 말이다. 네가, 나를 구해주다가 어떻게 될 지도 혹시 위험에 처하게 될 지도 몰라 물어본 것인데, 너는 왜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일까.
“자,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이곳을 도청하고 싶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쥐새끼들을 위해 이 좁은 공간 안에서 남녀 단 둘이 대체 어떤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었나에 대한 핑계거리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한다만.”
사라 세르나드를 이곳에서 탈출시키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거라면, 내가 생각해둔 것이 있어.”
“뭔데?”
“치정극.”
그리말을 하며 사라는 자신의 단정한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가 입고 있던 드레스를 아래쪽으로 살짝 흘러내렸다. 그 몸짓이 워낙야해보였던지라, 카인 옆에 서 있던 아리아의 두 눈에서 쌍심지가 켜지고 말았다. 이 여자는 자신이 눈을 새파랗게 뜨고 있는 가운데서 대체 무슨 개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우리는 한 때 연인 사이였지. 그리고 지금은 헤어진 사이고. 굳이 나서서 변명을 할 필요도 없어. 이렇게 살짝, 몇 가지 암시만 주더라도 사람들은 이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서 납득을 해줄걸?”
마치 교태를 부리듯 자신을 향해 눈웃음을 짓는 사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카인은 이내 살짝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걸쳐주었다.
“...설사 그렇다 해도,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은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야. 너 자신을 좀 더 아끼도록 해, 사라.”
그러한 말을 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카인의 시선을, 사라는 자신도 모르게 피해버리고 말았다. 대체 어째서일까. 지금까지 그 어떤 사람과 마주할 때에도, 시선을 피해본 적이 없었거늘. 왜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토록 두려움을 느끼고 만 것일까.
...떨렸다. 그와 약혼관계에 있으면서 단 둘이 있었던 적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이토록 떨렸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자기 자신이 대체 왜 이러는 것인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대체 왜-
그 뒤로, 사라는 카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으며, 자신이 그를 향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인지조차 제대로 깨달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시끄럽게 쿵쾅거리는 그 소리에, 모든 소음이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그와의 대화는 끝을 맺었다. 어떻게 본다면 무척 긴 시간이었지만, 정작 사라에게 있어서는 찰나와 같은 순간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렇게 사라가 멍하니 그를 쳐다보자, 카인은 그녀가 긴장한 것이 틀림없다 생각을 하며 부드러운 어조로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쨌건, 기회는 내가 만든다. 그러니.”
사라를 바라보는 카인의 두 눈에는, 굳은 결의만이담겨 있었다. 카인의 진지한 얼굴을 보는 사라의 얼굴에는 어느새, 작은 홍조가 피어오르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또다시 겁쟁이마냥 그의 시선을 피해버린, 자기 자신이 존재하고 있었다.
“너는 나를 믿고 따라와 주기만 하면 된다. 간단하지, 사라?”
카인의 말에, 사라의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기 시작하였다. 사라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푹하고 숙이고 말았다.
그를 대체 어떠한 얼굴로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마워.”
결국 그와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사라는 카인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